1. 시장으로서의 증권거래소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민간시장들이 있다.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임대로 운영되는 수많은 쇼핑센터, 백화점 들은 모두 민간시장들이다. 증권거래소도 시장이다. 다만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기업의 소유권, 즉 주식이 거래되는 장소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그 시장이 다른 시장들과 마찬가지로 증권시장도 민간시장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증권시장은 민간 시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법에 의해서 설립이 독점되어 있고, 운영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다.
여러 개의 점포들로 구성되어 있는 민간시장들은 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입점업체들의 행동을 규율한다. 개점시간, 폐점시간, 환불제도 등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을 만들어서 시행한다. 그 규칙이 시장관리자와 입점업체들 간의 타협을 통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결국 손님들을 위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손님들은 개별 점포의 매력 뿐 아니라, 시장 전체의 분위기까지 고려해서 어떤 점포에서 쇼핑할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시장전체의 분위기는 점포의 가격 및 임대료에 영향을 준다. 시장 관리자는 시장전체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개별 점포들의 행동을 규율한다. 개별 점포에 대한 규율에 성공하는 시장공급자(시장을 공급하는 사람)는 비싼 값에 점포를 분양할 수 있고, 또 임대료도 높이 받을 수 있다. 최근 이런 일에 가장 성공한 기업이 동대문 시장에서 출발한 밀레오레이지만, 그것말고도 영업실적이 좋은 백화점들은 모두 소비자들의 선호에 맞게 입점업체의 행동을 규율하는 데에 성공한 기업들이다. 이런 성공이 다른 시장공급업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을 하도록 자극을 준다. 밀리오레의 성공에 힘입어 주변의 동대문 상가들이 비슷한 형태로 재개발을 하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증권거래소도 마찬가지이다. 증권거래에 있어서 소비자는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이고 입점업체들은 상장사 또는 등록기업들이다. 시장공급자는 증권거래소의 운영주체이다. 시장전체의 분위기가 좋아야 개별 점포들의 이익이 늘 듯이, 거래소 전체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높아야 개별 상장기업들이 좋은 조건에 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또 그런 환경을 제공하는 거래소에는 더 많은 기업들이 상장할 것이고, 높은 거래수수료와 상장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마치 소비자들의 신뢰가 높은 상가일수록 더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그런데 점포의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시장공급자가 입점업체에 대해 어느 정도의 규제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획일적인 답은 찾기 어렵다. 규제가 강할수록 개별 점포주의 기회주의적 행동이 억제될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별 점포주의 자유를 제약해서 비용을 높일 수 있다. 어느 정도가 적정한 규제인지는 결국 시장에서 시장들끼리의 경쟁을 통해서 가려질 수밖에 없다.
증권거래소의 설립이 자율화되고, 또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허용된다면 저마다 상장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규칙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상장사의 가치, 즉 주가가 높아져야 증권거래소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대개 그곳에 상장한 기업들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사외이사의 숫자를 얼마로 할 것인지, 어느 정도를 내부자거래로 보고 어떻게 벌칙을 부과할 것인지, 소수주주들에게 어떤 권한을 줄 것인지, 예를 들어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할 것인지, 장부열람권 행사의 요건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이 증권거래소의 규칙으로 다루어질만한 것들은 대개 지배구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리고 그 규칙은 상장기업과 거래소간의 계약적 성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가가 높아지면, 거래금액 또한 커질 것이고 결국 증권거래소의 이윤도 커지게 된다. 따라서 증권거래소는 주가를 높이고 거래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운영이 자율화된다면, 당해 거래소에 상장하는 기업들의 주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상장 및 거래규칙이 만들어질 것이다. 증권거래소간 경쟁체제를 통해 좋은 지배구조 규칙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추론은 미국 각주의 회사법이 진화해온 과정을 통해서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2. 미국 회사법 경쟁의 교훈
오늘날 미국의 회사법은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 글로벌 스탠더드로도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규정들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만, 불행히도 어떤 과정이 그런 회사법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미국은 주마다 제각각의 회사법을 가지고 있다. 각 회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회사법(판례 포함)을 가지고 있는 주를 선택해서 소재지를 결정한다. 여기에서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가 진가를 발휘한다. 소위 명목소재지의 원칙(Domicile Rule)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주된 영업장소가 어디이건 상관없이 원하는 회사법을 가진 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들어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영업을 하는 기업일지라도 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델라웨어주에 명목소재를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사법 관련 분쟁이 생겼을 경우 델라웨어주의 회사법에 의해서 재판을 받는다. 각 주들은 기업들에게 회사법을 제공하는 대가로 면허세(Franchise Tax)를 받는다. 주영업소재지의 회사법을 적용받아야만 하는 유럽과는 판이한 제도이다(Real Seat Principle).
미국 회사법 학자들의 연구 결과, 현행 회사법을 만들어낸 것은 각주들간의 회사법 경쟁이라고 한다. 즉 주들은 기업 유치를 통해 조세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좋은 회사법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쟁이 과연 회사의 경영자만을 위하고 투자자들에게는 불리한 회사법을 만들도록 유도하지 않았느냐는 논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각 주들이 회사법을 형성함에 있어 투자자들이 맡았던 역할을 간과했기 때문에 나온 우려였다. 투자자들에게는 투자의 자유가 있다. 따라서 어떤 기업이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회사법을 가진 주로 이전해갔다면 투자도 당연히 거두어 들일 자유도 있다. 따라서 기업이 투자자들로부터 낮은 가격에 많은 투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투자자에게 좋은 회사법, 다시 말해서 기업의 수익률을 높여주는 회사법을 가진 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회사법이란 기본적으로 지배구조 규칙이다. 미국에서의 회사법 형성 과정은 지배구조 규칙 공급자간의 경쟁을 통해서 좋은 규칙이 진화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셈이다.
3. 증권거래소 설립 및 운영 자율화의 필요성
우리나라의 경우 광역자치단체에게 회사조례를 만들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면허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또 기업들에게 명목소재지의 원칙을 적용한다면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의 정치상황이 그런 체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증권거래소의 설립 및 운영의 자율화는 그런 공백을 메꾸어 줄 수 있다. 즉 증권거래소의 설립을 자율화하고, 각자 나름대로의 상장규칙을 제정해서 운영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상장을 원하는 기업은 자신들이 원하는 증권거래소를 선택해서 상장을 하고, 투자자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 거래소에서 상장한 기업의 주식을 거래하면 되는 것이다. 좋은 규칙을 가진 거래소일수록 많은 기업이 상장하고, 또 주가와 거래량도 높아 거래수수료도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거래소들은 좋은 상장규칙(지배구조 및 거래 규칙)을 제공하기 위해 경쟁할 것이다.
4. 증권거래소의 독점 내용
우리나라의 증권거래소는 독점이다. 물론 다른 거래소인 코스닥이 있긴 하지만, 소비자인 기업의 선택권이 제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독점이다. 우리의 증권거래법은 제71조(설립)와 제76조(유사시설 개설 금지)를 통해서 현재의 증권거래소에게 독점적 영업권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협회중개시장 및 제2조제8항제8호의 증권업을 영위하는 자에게도 증권거래의 특전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독점적 상황을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독점이 깨지려면 공급자 간의 경쟁이 치열해야 한다. 그러나 협회중개시장의 경우 기존의 증권거래소와 상장요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서로 다른 업종에 대한 시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업역에 대해서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상장규칙적 성격을 갖는 상장회사에 대한 여러 가지 지배구조 관련 규칙들이 상법이나 증권거래법상의 강행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설령 증권거래소의 설립 및 운영이 자율화된다고 해도 그들간의 경쟁을 통해서 좋은 지배구조 규칙이 진화해가길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의 증권거래소가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독점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뉴욕증권거래소(NYSE)나 런던증권거래소(LSE) 등 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시작함에 따라 한국의 증권거래소는 한국 기업 주식의 상장을 놓고 외국의 증권거래소들과 미진하나마 경쟁적 관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외국 투자자들이 우리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들의 주식을 사기 시작함에 따라,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를 놓고 한국의 증권거래소가 외국 증권거래소와의 경쟁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경쟁의 정도가 피부로 느낄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상장 규칙이 정부의 규제일색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경쟁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5. 어떻게 할 것인가?
증권거래법 제71조 및 제76조를 폐지하여 증권거래소의 설립과 운영을 자율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증권거래소 자체를 하나의 영리법인으로 삼아야 하다. 그래서 증권거래소 자체의 상장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거래소를 선택해서 상장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고 복수의 거래소에 상장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거래소 설립과 운영의 자율 중에서는 거래규칙이나 수수료뿐만 아니라 상장규칙을 자신들의 의사대로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 특정 거래소에 상장하는 기업은 그 거래소가 요구하는 상장규칙을 지킬 의무도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규칙들 중에는 주의의무 위반시 이사의 배상책임 정도, 집중투표제 의무화 여부, 집단소송제를 택할 지의 여부, 소액주주 권리의 내용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물론 거래소나 기업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강행규정으로 처리되어야 할 성격의 것도 있기는 하다. 기업이 약속을 하고 나중에 바꾸어 버리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것이 우려된다면 위에서 열거한 지배구조 관련 규칙들을 모두 정관의 규정사항으로 하되 정관의 개정에 관해서는 강행규정으로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서 아무런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의 횡령이나 배임 같은 것은 여전히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주가조작이나 허위공시 여부를 가려내는 것도 금융감독원과 같은 정부기관의 정당한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김정호(자유기업원 부원장, kch@c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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