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해온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 이하 ‘편찬위’)는 경술국치일인 지난 8월 29일 3,090명의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하였다. 앞으로 해외와 지방의 사례를 더 조사하여 2007년에 최종적인 결과를 발표한다고 하니, 친일인사의 명단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편찬위는 친일파 선정 기준에 대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 객관적인 사료를 최대한 수집해 엄정한 평가를 거쳤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명단 선정방식을 크게 ‘지위당연범’과 ‘행위범’으로 구분했다.
‘지위범’이란 일제하 일정 직급이상의 공직종사자를 자동으로 친일명단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행정관료는 군수 이상, 경찰은 경부(경위) 이상, 사법부는 판검사, 군대는 위관급 이상 장교”로 기준을 정하였다.
일제시대 일정 직위의 공직에 종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이 기계적 발상이 놀랍다.
이른바 부역으로 알려진 식민통치 가담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각도의 논쟁이 있다. 식민지에서 식민본국인과 토착인 사이의 차별문제의 핵심주제가 바로 공직참여 개방이었다. 예컨대, 청년기에 영국에 충성심을 가졌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자신이 영국의 정식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처럼 식민지 현장에서는 토착인들이 자신들을 차별하지 말고 더 많은 공직참여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이야말로 당시에는 진보적 주장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식민통치세력들은 토착민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하위 말단직 외에는 이들의 진출을 봉쇄했다. 결국 일제하 공직자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식민지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잣대를 적용한 셈이 된다.
광복직전 통계에 의하면 경찰인력의 40%인 무려 1만 1천여명이 조선인이었다. 현재 경찰이 10만명 정도인 것을 볼 때도 일제시대 공직자가 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시험에 의한 경쟁을 통해 상대적으로 고위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친일인사로 규정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편찬위가 공직자를 일괄해서 친일인사로 규정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그러면 유신헌법을 공부하고 당시 판사직을 수행한 노 대통령도 유신독재세력이고,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에 항명하지 못한 모든 장교들도 신군부세력이냐고 비판하고 있다.
건국 후 반민특위에서는 682건을 조사하여, 이중 559건에 대해 검찰에 송치하였으며, 여야 국회의원이 참여한 민족정기수호모임에서는 일제식민지 민족반역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편찬위’는 통상 친일인사로 분류된 사람들 보다 무려 2400여명이나 더 늘려 놓았다. 이른바 ‘지위범’이라는 기준 때문에 그 수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결국 편찬위는 특별히 새롭게 자료나 증거를 발굴하는 수고 없이 몇 가지 자의적 기준을 만드는 무척 쉬운 방법으로 기존의 4배 가까운 친일인사를 새로 제조해 내는 실적을 올렸다. 역사학자들이 모여 일종의 학술활동의 차원에서 작업을 한다면서 사료에 의하지 않는 방법을 적용한 것은 그 자체가 게으름이다.
이 사전은 2003년말 국회예산지원이 삭감되면서 지난해 초 오마이뉴스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모금운동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추진되고 있다. 대중모금까지 했으니 무언가 새로운 실적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일까? 실적주의가 친일파의 수자를 늘리는 결과를 맺은 것일까?
2. 문화예술인들은 투사가 아니다.
‘편찬위’가 행위범으로 지목한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경우는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나 잡지에 그림을 출품하거나 기고를 했다는 죄목을 들고 있다. 이 대목도 현재 잣대의 과잉이 아닐 수 없다. 글을 써야 먹고 살 수 있었던 당시 문인들은 때때로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정책을 찬양하는 글을 써야만 했다. 이를 거부하면 아예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극소수의 절필자들을 빼곤 당시의 거의 모든 문인들은 사실상 친일파였다. 결국 이런 기준들은 차라리 反日을 하지 않은 사람들 명단작성에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되어버린 ‘친일파’로 몰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나약한 보통사람일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인들에게 모두 투사나 지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런 관점은 비현실적인 독선이다.
친일논란에서 가장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문화예술인들이다. 그들은 속성상 글, 그림 등 비교적 명확한 증거를 남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타 분야의 사람들에 비해 쉽게 친일파로 몰리게 된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문화예술인들은 전쟁동원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살벌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굳이 따지자면 생계형 친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역사의 원근법
편찬위는 나름대로 능동적 친일과 수동적, 생계형 친일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길게는 100년이 지난 일들을 놓고 과연 이런 구분을 그 누가 자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연주자의 총독부행사장에서의 연주가 과연 얼마나 기꺼이 이루어졌는지 그 누가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회화에서 원근법이 적용된 것은 혁명에 비유된다.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좀 더 흐리고 작게 그려서 보다 현실에 가깝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역사도 원근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과거의 일일 수록 구체적인 대목은 조금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명백히 인정해야만 한다.
이번 편찬위의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자신의 권한과 능력의 밖에 있는 일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누가 언제 친일행위로 보이는 어떤 행동을 했다는 정도를 조사해서 알리는 행위가 역사가 또는 역사학술단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능일 것이다. 누가 친일인사라고 규정하기에는 많은 경우 깔끔한 결론을 내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70% 가까운 여론이 편찬위의 발표에 대해 부정적이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한 세기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3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에 대해 친일인사라고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 항상 용기 있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복거일의 저서 <죽은 자들을 위한 변명>에 나오는 친일파의 정의를 인용해본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친일 행위나 친일파라는 말들은 본질적으로 조선이 독립국가였던 시기에 만들어졌고 뜻을 지닐 수 있었던 개념들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이 공식적으로 일본의 한 부분이 된 뒤 한반도에서 살았던 조선인들에 관한 한, 그 말들은 뜻을 잃었다. 이미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일본 제국의 국민들이 된 조선인들에게 그런 말들을 쓰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친체제행위’와 ‘친체제파’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고 정확할 것이다.” - [출처 : 자유기업원 ] https://www.cfe.org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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