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문제 생기면 私財 헌납 한국 오너들의 딜레마

자유기업원 / 2006-02-21 / 조회: 7,382       ECONOMIST, 26-30면

겉으로는 “조건없는 사회환원"“정부서 입김”의심의 눈초리
89년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효시 삼성 99년에도 2조8000억원


이건희 삼성 회장의 8000억원 사재(私財) 출연을 골자로 한 이른바 ‘2·7선언’은 한국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내 최대의 사재 출연금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시 이 회장다운 용단’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것으로 이 회장은 ‘X파일’ 파문 이후 갈수록 거세져온 반(反)삼성 기류를 상당히 바꿀 것으로 기대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고심 끝에 나온 사재 출연 효과를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인 이학수 부회장은 이 회장의 사재 출연이 ‘조건 없는 사회 환원’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자발적인 사재 출연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저기서 이 회장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정부와 의견 조율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 회장의 이번 사재 출연 결정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여론의 끊임없는 압력에 밀렸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재산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사재 출연은 삼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또 최근의 일이 아니다. 위기에 직면한 국내 기업 오너의 사재 출연은 경제위기를 겪었던 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어느새 한국 재계의 반(反)기업 정서 타개책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위기 돌파용 ‘사재 출연’ 카드

최태원 SK회장은 ‘사재 출연’ 카드를 1998년 처음 썼다. 당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그의 매제인 김준일씨에게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넘기는 방법으로 거액의 편법 증여를 했음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SK가 94년 유공이 주당 1만원에 출자한 대한텔레콤 주식 70만 주를 최태원 회장에게 공짜나 다름없는 주당 400원에 넘겼음을 밝혀냈다. 또 95년 선경건설(현 SK건설)이 주당 1만원으로 출자한 대한텔레콤 주식 30만 주를 김준일씨에게 역시 주당 400원에 팔았다는 사실도 잡아냈다. 그 결과 합계 96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이와 함께 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인수한 뒤, 대한텔레콤·SK·SK건설 등의 계열사를 경쟁업체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지원했음도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SK그룹은 궁지에 몰렸고 특단의 조치를 궁리했다. 바로 ‘사재 출연’이었다. 최 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대한텔레콤 주식의 30%를 무상으로 SK텔레콤에 넘겼다. 이어 최 회장의 사재로 SK증권 90만 주(시가 50억여원)를 사들였다. 덕분에 최 회장은 법정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사재 출연의 효과를 본 것이다.

최 회장은 2002년 두 번째로 사재 출연 카드를 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효력이 없었다. 98년 SK증권은 JP모건으로부터 매입한 파생금융상품으로 무려 2억5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최종현 회장 부자는 사재를 털어 SK증권 주식을 대량 매입했다. 그런데 SK증권은 위험 미고지를 이유로 JP모건으로부터 국제소송을 당했다. 이 소송은 99년 JP모건의 SK증권 증자 참여 등을 조건으로 전격 화해하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년 후 그 과정에 이면계약이 있었음이 발각됐다. JP모건이 나중에 신주 매입가에 금융 비용까지 더해 SK그룹에 되팔 수 있도록 풋옵션 조건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실분을 궁여지책으로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해외지사가 몰래 보전토록 했다. 이것이 ‘SK글로벌 사태’의 전말이다.

최 회장은 JP모건과 이면계약을 한 것에 대한 비난여론을 잠재우고 주주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2002년 말 또다시 사재 출연을 발표했던 것이다. 최 회장이 내놓은 사재는 SK C&C 주식과 SK증권 주식 등 총 39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그 정도 사재 출연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최 회장은 끝내 구속되는 수모를 겪고 만다.

2003년에는 최 회장의 세 번째 사재 출연 카드가 나왔다.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적발 이후 보유하던 계열사 주식을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했으며 이 중 워커힐 주식 40.8% 등은 SK네트웍스 정상화를 위해 출연키로 했었다. 그러나 2005년 채권단은 최 회장이 보유한 워커힐 지분을 SK네트웍스에 현물출자 방식으로 유상 출연하고, 대신 그 가치에 해당하는 SK네트웍스 지분 2% 정도를 받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최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워커힐 지분(40.7%)을 SK네트웍스에 ‘무상’ 출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 측에 통보했다. 재판부가 최 회장에 대해 ‘자발적인 사재 출연, 계열사 지급보증 및 담보 제공 등 응분의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이는 워커힐 주식에 대한 무상기부의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워커힐 주식을 유상출자해 SK네트웍스 주주 신분을 회복하고, 금전적 이익을 얻는 것은 SK그룹 사태의 도의적, 법률적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사재 출연으로 효과를 본 경우다. 최 회장은 98년 초 동아건설 워크아웃 때 물러나면서 자신의 지분을 채권단에 위임했다. 500평짜리 장충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36건을 동아건설 법인에 넘겼다. 효과는 컸다. 최 회장은 2002년 파산회사인 동아건설의 소액주주들에 의해 대표이사 회장으로 추대됐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도 사재 출연 카드를 여러 번 썼다. 김 전 회장은 78년 50억원 상당의 대우실업 보유주식을 매각해 대우재단에 내놓았다. 80년에도 200억원을 대우재단에 내놓았다. 89년과 90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16억원을 대우조선 경영정상화 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이어 99년에는 채무 상환기간 연장을 위해 452억원대의 부동산과 1조2000억원대의 주식을 담보용이라며 출연했다. 그러나 이것은 김 전 회장의 마지막 사재 출연이 되고 말았다. 대우는 끝내 패망했다.

99년 이건희 회장은 삼성자동차 부채상환용 사재 출연을 강력하게 요구받았다. 그러자 재벌 총수 사재 출연 논란이 커졌다. 정부와 채권은행단은 이 회장에게 삼성차의 부채 일부를 떠안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삼성 측과 재계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반발했다.
정부는 잘못된 투자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총수의 자발적인 출연을 요구했다. 이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이 회장에 대한 사재 출연 요구는 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삼성이 정부의 압력에 밀릴 경우 다른 기업 총수도 사재 출연 요구에 맞설 명분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오너의 사재 출연이 화두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앞선 98년 ‘12·7 정·재계 간담회’에서다. 당시 정부가 5대 그룹 총수의 사재 출연을 재무구조 개선약정에 담기로 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이 기업개선작업 적용 기업에 출자전환을 해주는 만큼 오너들도 손실분담 차원에서 사재를 출연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재계는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성차 빅딜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금융감독위 등 정부 일각에서 사재 출연을 거론했다. 삼성차 사업을 주도한 이 회장이 부채의 일부를 사재로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채권단도 이 회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삼성차에 거액의 자금을 대출해준 것은 이 회장과 삼성의 신용을 담보로 대출해줬다는 논리다.

삼성차 처리 때 논란 거세

정부는 ‘명예로운 해결방안’ ‘정부 압력이 아닌 사회적 압력’이란 표현을 써가며 이 회장을 압박했다.
이같이 정부와 채권단이 수천억원대의 사재 출연을 압박하자 이 회장은 고심했다.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론이나 정부 강압에 밀려 명분없이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침내 이 회장은 삼성차 차입금 상환을 위해 사재 출연을 결심한다. 당시 삼성 재무팀은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빅딜하면 계열사들이 수조원대의 대우 부채를 떠안게 되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삼성차가 법정관리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정관리로 가면 계열사들엔 별 피해가 없겠지만 이 회장에게 은행 차입금을 갚으라는 여론이 조성될 우려가 있었다. 이 회장은 당시 “빅딜을 하면 삼성그룹 전체가 흔들린다는 데 고민할 게 뭐 있나, 내가 갚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빚을 갚을 돈은 있느냐”고 물었다. “내놓을 건 삼성생명 주식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그걸 팔아버리라”고 했다.

당시 이 회장이 출연하기로 한 사재는 2조8000억원. 삼성생명 주식을 1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해 이 회장이 출연한 400만 주의 가치를 추산한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사재를 내놓는 결정을 내리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 회장은 사재를 출연하지 않아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오너로선 그냥 버텨볼 만도 했던 일이었다. 자동차 사업에 대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재 20억 달러를 출연한 이 회장을 두고 미국 경제지 포춘은 “잘못된 기업투자 결정에 대해 책임의지를 보인 유일한 기업인”이라고까지 했다.

2000년 현대그룹에도 사재 출연을 해야하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채권은행단은 현대의 부실 계열사에 대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자녀들에게 사재 출연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현대도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채권은행단의 계속된 요구에 밀려 우여곡절 끝에 정 명예회장과 후계자인 고 정몽헌 회장의 사재 출연을 포함한 총 1조2794억원 규모의 최종 자구안을 발표했다. 우선 현대차 주식 등 당시 가치로 따져 약 3000억원어치의 사재를 현대건설에 출연했다.

현대투신 정상화를 위한 오너들의 사재 출연도 논란이 됐다. 정부와 현대의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은 채 오너들에 대한 압박은 거세졌다. 더구나 이건희 회장이 삼성차 부채 상환용으로 사재를 내놓기로 한 이후여서 현대도 무조건 거절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로서는 삼성에 견준 사재 출연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현대는 나름대로 논리를 세웠다. 무엇보다 삼성차와는 달리 현대투신 부실이 현대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현대투신 부실은 국민투신과 한남투신 인수과정에서 막대한 부실을 떠안았고, 대우채 손실까지 더해지는 등 책임 소재가 정부에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 삼성생명 상장으로 막대한 자본 이득을 얻는 삼성과는 달리, 현대는 손실만 메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역설했다.

정 명예회장 등 오너들의 사재가 없다는 것도 불가론의 하나로 제시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과 정몽구 회장, 정몽헌 회장 등 3부자 오너 일가의 상장사 보유 지분이 모두 합해 6737억원어치에 불과했다. 비상장사 중에서는 돈이 될 만한 계열사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이들 주식을 내놓더라도 현 증시상황에서는 당장 현금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현물 출자도 주가 폭락 등으로 해당 계열사 소액주주들의 반발이 예상돼 쉽지 않다는 논리였다.

특히 계열분리를 앞둔 정몽구 회장 쪽은 현대투신의 지분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 사재 출연에 동참할 이유도 없었다. 더구나 대우자동차 인수전을 앞두고 현대투신에 돈을 내놓을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개인 현금과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시 현대 측은 “주식 외에 다른 재산은 없다”며 “서산농장도 현대건설 소유로, 지난 98년 북한에 소 1000마리를 보냈을 때도 정 명예회장이 현대건설로부터 소를 사서 보내는 형식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거액의 현금이나 부동산 자산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놓을 경우, ‘비자금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령 숨겨놓은 재산이 있더라도 선뜻 내놓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귀띔이다.

정부는 현행법상 총수의 사재 출연 근거가 희박한 데다 자본주의 논리로도 맞지 않아 공식 언급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성의표시’ 등의 우회적 표현을 동원하며 현대를 계속 압박했다. 재계는 다시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했다. “여론몰이식으로 재산 헌납을 강요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며 “이런 경제 풍토에서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 투자하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주식회사 제도에 따라 유한책임을 지면 그만이라는 논리를 폈다.

주주들이 일정 지분을 출자해 회사를 경영해 이익이 나면 배분하고 손해가 나면 지분만큼 책임지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주식회사의 ‘유한책임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재 출연, 계열사 ‘무한’책임

하지만 재벌들이 정경유착, 문어발식 족벌경영체제, 방만한 부채경영을 한 처지에 자신들이 불리할 때만 자본주의 원리를 내세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정몽헌 회장은 개인 소유의 주식 1000억원어치를 현대투신에 출자했다. 또 현대 계열사 보유 1조7000억원 상당의 주식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했다. 증자·외자유치 등의 경영개선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이 담보로 부실을 메우겠다는 뜻이다. 결국 정부의 압력에 못 이겨 사재를 출연한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사재 출연 문제는 잠들지 않았다. 2002년 이재현 CJ 회장도 여론에 밀려 사재를 출연해야 했다. 당시 이 회장이 소각한다고 밝힌 CJ엔터테인먼트의 BW(신주인수권부사채)는 600만2000주로 보유하고 있던 전량이었다. 이 회장은 2000년 CJ엔터테인먼트가 발행한 900만 주의 BW 760만 주를 인수했다. 이 가운데 160만 주는 등록 전에 팔고 600만200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회장이 나중에 이를 전량 행사한다면 보유지분은 829만 주로 늘어나 당시 최대주주인 CJ의 529만 주보다 많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BW 보유 과정에 시민단체들의 의혹이 제기되자 이 회장은 두말 없이 전량 소각했다.

LG그룹도 LG화학 주식 이동과 관련, 대주주가 부당이득을 챙겼다는 의혹을 받았다. LG는 끝까지 이를 부인하다 결국 참여연대에 의해 고발됐다. CJ처럼 사재 출연의 카드를 빼들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4년 LG카드 사태도 사재 출연 문제로 구본무 회장을 괴롭혔다. LG카드 채권단은 LG그룹에 추가증자를 하지 않으면 청산시키겠다고 최후 통첩을 했다. 구 회장은 어떤 식으로든 방안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렸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내놓은 LG카드 해법은 예상보다 강도가 높았다.

LG카드 정상화를 위해 1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 증자가 필요하며 이에 따라 채권단이 3250억원, LG그룹이 8750억원을 맡아줄 것을 안으로 제시했다. 채권단은 추가 출자 이유로 LG카드 사태가 처음 터진 이후 LG그룹의 지원이 미흡했다는 국민 여론과 채권단의 판단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구본무 회장 등 오너 일가에 대한 사재 출연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LG그룹은 출자전환 여부는 각 계열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고 공을 넘겼지만 해법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추가증자 실패로 LG카드가 상장폐지되면 신용도가 급락해 회사채 상환 등으로 이어져 청산이 불가피하며, 이 경우 LG그룹이 보유한 1조1750억원의 회사채는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LG증권 노조도 LG카드는 LG증권이 아니라 구본무 회장 등 LG그룹 오너 일가들의 사재 출연으로 정상화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들은 일제히 2003년 카드대란 당시 LG카드사의 대주주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매각, 1조원의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노조는 “LG카드의 부실 경영 등 유동성 위기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지고 있으며, 산업은행의 공적 자금 투입으로 국민의 혈세가 빠져나가는 등 국가경제가 막대한 영향을 받는 위기상황”이라며 “한국의 100대 부호 중 20명이나 되는 구 회장 등 대주주 일가가 아무런 책임 없이 건재하다는 것은 사회윤리, 경제정의 측면에서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이어 “금감원은 규정대로 무기징역 또는 손실회피금과 부당이득금의 3배까지 벌금형을 부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LG카드를 청산할 것인가 아니면 1조2000억원 추가 출자를 결정할 것인가를 두고 구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LG그룹은 일단 계열사들에 산업은행의 추가 출자 요구를 전달했지만, 계열사들이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어 결정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LG그룹 구 회장이 사재 출연 등의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는 산업은행이 추가 출자를 요구한 것과 관련, 논평을 내고 “LG카드에 대한 대주주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그것은 대주주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그룹 계열사들과 투자자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며 구 회장을 겨냥했다.

그러나 사재 출연은 없었다. LG카드는 16개 채권금융기관 3조6500억원과 LG투자증권 예상 매각대금 3500억원, LG그룹 1조원 등 5조원의 유동성 지원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는 사실상 정부의 강압이 시장에 어느 정도 적용된 결과라고 보인다. 하지만 정부는 그룹 회장 개인 대주주의 책임을 명확하게 지우지는 못했다.

2003년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은 곤경에 빠졌다. 두산중공업 노조원 분신으로 노동탄압을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데다 오너 일가의 편법증여 의혹까지 증폭됐기 때문이다.

두산은 이에 앞서 99년 BW 1억 달러어치를 발행했다. 며칠 후 박용성 회장 등 오너 3세들과 박정원 사장 등 4세들은 이 가운데 신주인수권만을 70% 인수한 뒤, 다시 3세들 인수분을 정원씨 등 4세 26명에게 양도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BW 전량에 대한 인수권을 행사하면 1090만 주의 주식을 보유하게 돼 있었다. 이는 (주)두산 전체 발행주식의 51.6%로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당시 참여연대는 박용성 회장 등 두산그룹 오너 일가가 지배력 확대와 막대한 시세차익을 획득하고 편법증여를 시도해 증권거래법·외환관리법·상속증여세법 등을 위반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은 궁지에 몰리자 문제의 BW를 전량 소각했다. 난관 타개책으로 ‘사재 출연’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두산 측은 “매입자금과 증여세 납부 등 법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는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고 하면서도 “사회 분위기상 계속 논란이 될 경우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어 소각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회장의 기대와는 달리 다시 사재 출연으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것 아니냐는 여론만 일었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정부 등에서 사재 출연을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强迫)”이라며 “이런 요구가 대주주들이 위험을 회피하는 행동만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투자수익률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실련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국내 기업 오너의 사재 출연은 한국 기업들의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기형적인 경영활동의 부산물”이라며 “처음부터 기업 경영에 책임을 다하려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면 사재 출연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명분을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재 출연은 기형적 기업史 반영”

마지막으로 다시 삼성으로 가 보자.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마지막 해법일 줄 알았던 ‘사재 출연’은 또 다른 파장의 화근이 되고 있다. 이 회장의 사재 출연 선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약속대로 삼성차 부채를 상환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사재 출연 자체도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번에 헌납하기로 한 8000억원 중 추가 출연하는 3500억원 가운데 이 회장이 딸 2명 명의로 500억원을 대납하기로 했으나 증여세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또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도 800억원을 마련하려면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경영권 방어 때문에 매각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삼성그룹의 2·7선언이 두산그룹과 현대자동차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목이다. 두산가(家)는 형제 간 재산권 다툼으로 횡령 혐의가 드러나 최근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고, 정몽구 회장은 계열사 글로비스를 통해 편법으로 정의선 사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기업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오너들이 대규모 사재 출연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앞으로는 그런 사재 출연의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임광 객원기자 (LLKHKB@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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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3
656 [보도] 문제 생기면 私財 헌납 한국 오너들의 딜레마
자유기업원 / 2006-02-21
2006-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