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운에서 편집부 차장으로 일을 하게 된 권병찬 (맑은샘)입니다.
이제 진정하고 깨끗한 우파, 선진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보수사상을 위해 저희 뉴스타운에서는 "자유주의 사상가 열전"을 기획 특집 연재물로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 연재물은 "자유기업원"에서 강의하고 연재했던 것이나 저희는 이를 보다 더 확산시키고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위해 재편집 각색하게 되었습니다.
이 연재물이 끝나면 신좌익 사상들 비판을 새롭게 보는 기획과, 새시대 바른 헌법 강의 기획, 고품격 자유주의 문화 기획의 일환으로 "새시대 희망문학" 특집이 기획이 되어 있습니다.
뉴스타운을 기점으로 보다 밝고 희망찬 자유주의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부디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소개 :
자유주의 사상가 列傳
(1)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2) 루드비히 폰 미제스
(3) 열린 사회의 철학자, 칼 포퍼
(4) 라인강의 기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발터 오이켄
(5)「라인강의 기적」의 아버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6)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간파한 빌헬름 뢰프케
(7) 英國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마거릿 대처
(8) 칠레의 노동 및 연금 개혁에 성공한 호세 피네라
(9) 미국 新보수주의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
(10)「힘의 우위」를 통해 冷戰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
(11) 레이건·대처의 이념적 스승―밀턴 프리드먼
(12) 좀더 나은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경제학의 주창자 - 제임스 뷰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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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사회주의, 즉 나치즘」이란 점을 간파하다 .
●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관심, 빈 대학에서 미제스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자로 전환
● 1930년대 이래 케인즈 學派의 대두로 오랫동안 외면받다가, 1970년대 이후 케인즈 이론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각광
●『자유시장과 私有재산제도를 폐지하면 다른 모든 자유도 소멸』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이에크의 90회 생일 때 대처 前 영국 수상이 보낸 편지)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全세계의 영화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秩序(질서)를 강조하는 폰 트랩 대령(배우는 크리스토퍼 플루머)과 자유분방한 見習(견습) 修女(수녀) 마리아(줄리 앤드루스)의 아름다운 사랑.
全篇(전편)에 흐르는 珠玉(주옥) 같은 음악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
나치 독재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감행하는 亡命(망명).
오스트리아를 背景(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예비역 海軍 대령 폰 트랩의 집에 견습 수녀 마리아가 가정교사로 부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폰 트랩이 마리아에게 아이들을 소개시키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失笑(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폰 트랩은 「수많은」 자녀들을(영화 「王과 나」에 등장하는 태국王의 자녀들만큼은 아니지만) 호루라기 신호로 불러내어 일렬 횡대로 정렬시키고 군대식으로 이름을 소개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서 마리아가 당황스러워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재치 있는 마리아는 바로 그 자리에서 一針(일침)을 놓는다. 호루라기를 주면서 『앞으로 아이들을 부를 때는 이 호루라기를 쓰라』고 말하는 폰 트랩에게 호루라기를 불어 버린 것이다.
『대령님을 부를 때는 어떻게 하나요?』
이후 아이들을 맡은 마리아는 아름다운 알프스를 누비며 음악과 자유를 가르친다.
탁 트인 알프스를 배경으로 마리아가 두 팔을 벌리고 테마曲 「The Sound of Music」을 노래하는 장면은 우리의 추억에 남을 名장면이 될 만하다.
『저 산들은 수천 년 동안을 노래하며, 노래와 함께 생동하고 있네…』(The hills are alive with the sound of music, with songs they have sung for a thousand years …)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마리아는 폰 트랩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어 수녀의 길을 포기하고 그와 축복받는 결혼을 하지만 곧바로 나치의 亡靈(망령)과 戰雲(전운)이 몰려오게 된다. 祖國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치를 위해 싸울 수는 없다면서 폰 트랩과 그의 가족이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염원이었다. 알프스의 산들이 수천 년 동안 부르던 노래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처럼.
모차르트를 탄생시킨 음악의 나라, 알프스의 장엄한 경관을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는 오스트리아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는 經濟學派(경제학파)가 태동한 곳이다.
바로 「오스트리아學派」로 불리는 學派가 그것이다. 이 학파는 오스트리아의 멩거(Carl Menger)로부터 시작해서 뵘-바베르크(Eugen von Bo¨hm - Bawerk), 비저(Friedrich von Wieser), 미제스(Ludwig von Mises), 슘페터(Joseph Schumpeter),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로 이어지고 그 후 미국의 뷰캐넌(James M. Buchanan), 로스바드(Murray N. Rothbard), 커즈너(Israel M. Kirsner), 모스(Laurence S. Moss)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스트리아學派는 자유주의의 가장 철저한 옹호자일 뿐만 아니라 대처와 레이건 이후 각국의 經濟 개혁에 思想的 토대를 마련해 준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하이에크는 학문적 깊이와 劇的(극적)인 인생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學派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誌는 그를 가리켜 『금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라고 평가했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자로서 화폐 및 경기순환에 관한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철학자로서 사회주의의 誤謬(오류)를 철저히 증명하고 자유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自生的 질서와 文化的 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논리적 일관성과 원칙을 옹호했던 하이에크는 時流에 便乘(편승)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의 화폐와 경기순환에 관한 이론은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케인즈가 名聲(명성)을 날리고 있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의 오류를 지적했지만, 이미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케인즈를 뛰어넘기에는 力不足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주의는 반드시 崩壞(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그의 사회철학은 사회주의가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 되어 있던 시기에 「挑發的(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시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라. 모든 사람들이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로 나선 케인즈에 목을 매고 있을 때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젊은 경제학자가 얼마나 무모하게 보였겠는지를. 사회주의가 보편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그건 반드시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것이었겠는지를.
하지만 옳고 그름은 다수결이나 분위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케인즈의 이론이 공격받고 허물어지는 것을 하이에크는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하이에크의 아들 로렌스 박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
이때 하이에크가 한 말은 간단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사회주의자들의 팸플릿 통해 경제학 처음 접해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1899년 5월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의 축복받은 학구적인 집안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이에크의 조상들은 거의 대부분 官吏로 일하였으나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親인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나중에 빈 대학의 식물학 명예교수가 된 의학박사였으며, 祖父는 김나지움의 교사로서 자연사와 생물학을 연구했다.
동생 하인즈는 빈 대학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으며, 막내 동생 에리히는 인스부르크 대학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하이에크의 딸 크리스틴은 곤충학자, 아들 로렌스는 미생물학자가 되었다.
하이에크의 외조부인 프란츠 폰 유라쉐크는 대륙법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高位관료와 오스트리아 통계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유명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學派의 巨頭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는 하이에크 祖父의 친구였다.
어린 시절 하이에크는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를 여행하며 식물을 채집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식물학과 古生物學, 進化論에 흥미를 가졌다(생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후일 그가 문화적 진화론을 펼치는 데 영향을 미친다).
하이에크가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과목들에 거의 흥미가 없었으며 숙제도 하지 않고 생물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을 건성으로 넘겼기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아서 두 번이나 轉學을 가야 했다.
1917년 3월 하이에크는 군대에 입대하여 오스트리아軍 砲兵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敗戰을 경험했으며 군인이 실제 전투보다는 허기와 질병으로 인해 더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敗戰의 공포와 飢餓(기아)의 고통을 겪은 젊은이가 찾아 나선 출구는 무엇이었을까?
더욱이 그가 군대에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전쟁의 폐허로부터 新세계를 渴求(갈구)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魅力(매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하이에크 역시 사회주의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
하이에크가 최초로 경제학을 접하게 된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정치 팸플릿을 통해서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처음에 나는 모든 젊은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온건한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 … 이 세상의 수많은 불만족스런 문제들에 대한 知的인 해결책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빈 大學에서 미제스와 만나다
하이에크가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군대에서 先任장교로부터 사회주의 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文獻(문헌)을 소개받으면서였다. 그러나 경제학을 소개해 준 先任장교가 공부할 만한 대학까지 소개해 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1918년 군대를 마친 하이에크는 빈 대학에 입학한다. 사회주의에 매력을 갖고 있던 天才가 빈 대학에 들어가다니! (이 글이 연극 대본이라면 이 장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비명소리를 삽입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당시 빈 대학에는 자유주의의 巨頭들이 교수와 강사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칼 멩거를 계승하여 오스트리아學派의 지도적인 인물이 된 프리드리히 폰 비저, 보편 경제학의 창시자였던 오트마 스판(Othmar Spann), 오스트리아의 공무원이자 열정적인 자유주의자였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 등이 하이에크의 스승이 되었다.
특히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하이에크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미제스는 「프리바트 세미나」라는 경제학 토론회를 이끌고 있었는데, 隔週(격주)에 한 번씩 商務部에 있는 미제스의 사무실에서 밤늦도록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하이에크는 이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미제스와 친교를 나누게 되었고, 이러한 交分은 평생에 걸쳐 계속된다.
『나는 사회주의가 해결책이라는 믿음으로부터 금방 벗어났는데, 그것은 내가 루드비히 폰 미제스의 직접적인 영향下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사회주의적 해결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 위대한 저작, 「사회주의」(1922)를 출판한 바 있다.
「사회주의」는 우리 세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매우 느리게 그리고 또 고통스럽게 우리들은 그 책의 중심적 주장에 설득되어 갔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하이에크가 대학에서는 달랐다. 당시 빈 대학은 학생이 자신의 수첩에 담당 교수의 사인을 받고 수업료를 지불한 뒤 강의를 듣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하이에크의 학생수첩을 보면 법학, 철학, 경제학에서 개설된 모든 강의에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하이에크는 두각을 나타냈다. 입학 후 3년 만인 1921년에 하이에크는 법학 박사학위(Dr. jur.)를 취득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경제학 박사(Dr. rer. pol.)가 된다.
학문에 푹 빠진 아들을 바라보면서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던지 하이에크의 사진에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메모를 해 두었다.
「프리드리히는 벌써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어머니뿐만 아니다. 미제스의 婦人 마르지트의 회고에 따르면 『남편은 새로운 학생을 만날 때마다 그들 중의 누군가가 제2의 하이에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였다』고 한다.
1928년, 경제 不況을 예측
하이에크의 스승 프리드리히 폰 비저 역시 하이에크를 높이 평가했다. 하이에크는 두 개의 學位를 받고 난 뒤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는데, 이때 비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슘페터에게,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하이에크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슘페터의 편지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것이어서 하이에크가 미국에 있을 당시 가지고 있는 돈이 바닥 난 후에도 접시닦이를 하지 않고 공부에 專念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하이에크는 1925~1928년 동안 경기변동에 관한 수편의 논문을 썼다. 20代 중반에 쓴 논문이었지만 촉망받는 경제학자로서 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이었다. 1928년 하이에크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미국의 不況이 임박했다고 예언했다.
당시 세계 경제학계의 大家들, 예를 들어 미국의 피셔(Irving Fisher)나 영국의 힉스(John R. Hicks), 케인즈(John M. Keynes) 등은 1920년대의 好況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1927년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함께 빈에서 「오스트리아 경기순환연구소」(Austrian Institute for Business Cycle Research)를 설립하고 初代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하이에크는 경제 통계지표를 활용하여 화폐와 경기순환 사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1929년 「화폐이론과 경기순환」이라는 첫번째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갑작스런 信用增加가 재화들 간의 상대 價格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결국 지속될 수 없는 過剩投資(과잉투자)를 낳게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직후 뉴욕의 株價(주가)가 폭락하고 世界大恐慌(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첫번째 저술이 출판되던 해 하이에크는 빈 대학의 경제학 및 통계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하이에크의 빈 대학 취임기념 강연은 바다 건너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경제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젊은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L. Robbins)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劇的인 결과를 가져왔다.
런던경제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1900년대 初 런던의 에드윈 캐넌(E. Cannan)과 케임브리지의 알프레드 마샬(A. Marshall) 간에 벌어졌던 경제학의 基礎(기초)에 관한 논쟁이 있은 이후 지속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9년 런던경제대학의 경제학과장이 된 로빈스는 케인즈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敵手(적수)가 될 만한 인물로 하이에크를 지목했던 것이다.
1931년 로빈스의 초청으로 하이에크는 1년 期限의 초빙교수로 런던경제대학을 방문한다. 런던경제대학에서 하이에크가 개설한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旋風的(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로빈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저녁 시간의 강의는 선풍적이었다. 그의 강의는 어려운 것이었던 동시에 흥미로운 것이었으며,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기초적 모델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 강의는 하이에크의 학식과 분석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비버리지(런던경제대학의 학장)가 하이에크를 전임강사로 招聘(초빙)하자고 제안했을 때 滿場一致로 찬성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1년간의 초빙교수였던 하이에크는 런던경제대학의 碩座(석좌)교수가 되었으며, 1년 후에는 終身(종신)교수가 된다. 1950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0년 가까이 그는 열정적인 학자로 활동했다. 코우즈(R. Coase, 199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를 비롯한 유능한 제자들을 가르쳤고, 미제스가 했던 것처럼 그는 경제 세미나를 매주 개최하여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런던경제대학 시절에 있었던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로빈스와 함께 케인즈를 상대로 벌였던 치열한 논쟁이었다.
하이에크 VS 케인즈:長期와 短期
케인즈는 1930년 「화폐론」을, 하이에크는 1931년 「가격과 생산」을 각각 발간하였다. 하이에크는 「화폐론」을 비판하는 書評을 발표했고, 케인즈는 「가격과 생산」을 비판하는 論文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하이에크-케인즈 논쟁에는 當代의 경제학자였던 로빈스(L. Robbins), 피구(A. C. Pigou), 스라파(P. Sraffa), 나이트(F. Knight) 등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힉스(J. R. Hicks)는 이를 하나의 「드라마」라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까? 두 책 모두 大恐慌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 책으로서 고전학파의 貨幣數量說(화폐수량설:화폐량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각각이 제시한 공황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정반대였다. 케인즈는 침체의 원인이 「過少투자·過少소비」라 했고, 하이에크는 「過剩투자·過剩소비」라고 했다.
진단이 정반대라면 처방 역시 정반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케인즈는 政府가 적극적인 財政政策을 통해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하이에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市場의 調整能力을 신뢰해야 한다고 했다.
大공황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두고 어떻게 정반대의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답은 셋 중 하나다. 둘 다 맞거나, 둘 중 하나는 틀렸거나, 둘 다 틀렸거나. 필자는 둘 다 맞다는 쪽에 걸고 싶다(단, 長期와 短期를 구분한다는 조건下에서).
케인즈는 유머러스하고 話術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短期的 처방을 찾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경제 현실이 불확실하므로 이론적 一貫性(일관성)보다는 상황에 따른 臨機應變(임기응변)을 중시했다.
누군가가 케인즈의 변덕스러움을 비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정보(Information)가 변하면 결론을 수정한답니다. 귀하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이에 반해 하이에크는 학문적으로 엄격했으며 겸손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현실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논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短期的 처방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長期的으로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에크는 케인즈가 결론을 쉽게 바꾸는 것에 대해 분노했던 반면, 케인즈는 하이에크에 대해 「논리 기계」라고 비아냥거렸다.
케인즈가 1936년 그 유명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발표하면서 논쟁의 결과는 분명해졌다. 승리의 여신은 런던경제대학과 하이에크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케인즈의 처방은 주요 국가에서 채택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대공황 이후 1960년대까지 이 이론에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우리 모두는 케인즈주의자다』라고 선언하여 이런 분위기를 劇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케인즈의 처방은 신통력을 잃게 되었다. 투자와 소비를 늘리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景氣活性化 대신 인플레이션과 失業을 가져왔던 것이다. 케인즈의 처방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뿐이며 失業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하이에크의 이론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케인즈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短期的」으로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長期的」인 眼目(안목)에서 자본주의의 作動原理(작동원리)를 간파한 것은 하이에크였다.
『長期에 우리 모두는 죽는다』고 했던 케인즈는 1946년 65세의 나이로 비교적 「단기적」인 인생을 마쳤지만, 하이에크는 그보다 훨씬 더 「長期的」으로 살면서(1992년, 93세까지 살았다!) 자기 이론의 妥當性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노예의 길」
하이에크와 케인즈의 논쟁을 보면 두 사람이 怏宿(앙숙)이었을 법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경제학에 관해서는 서로 동의하는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는 16세 年上인 케인즈를 「영웅」으로 「존경」하였으며, 케인즈 역시 하이에크를 여러모로 배려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런던경제대학은 케임브리지大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케인즈는 하이에크에게 케임브리지大의 킹스 칼리지에 연구실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44년에는 하이에크를 英國學術院 회원으로 추천해 주었다.
케임브리지大에서 하이에크는 자신을 「大衆的」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履歷(이력)마저 바꾸게 하는 책을 발간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1938년 히틀러가 빈에 入城한 직후 영국에 歸化(귀화)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 결과 집필한 책이 바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1944)이었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西歐 문명을 가능케 한 토대로서 個人主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개인의 견해를 至上의 것으로 인정하며, 개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소질을 계발하는 것이 사회발전에 가장 理想的이라고 보는 신념이다. 自由主義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일상생활에서 사회의 「自然發生的」인 힘을 많이 사용하고, 가능한 한 强制力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사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과거의 모든 因習的(인습적)인 속박과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복잡한 경제활동에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시장경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질서 속에서 인간의 재능이 자유롭게 발휘됨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신속하게 충족될 수 있었고, 생활수준은 놀라울 만큼 향상될 수 있었다. 자유사회에서 物的 성장이 이처럼 성공하자 인간은 더 큰 꿈과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대표적으로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자유사회의 발전은 항상 「長期的」으로 실현된다는 점이다. 지지부진한 것으로 보이는 자유주의 정책과 경제성장에 대해 사람들은 초조감을 갖더니, 급기야 자유주의를 시급히 除去(제거)해야 할 하나의 障碍物(장애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사회에서만 나오는 자연발생적인 힘을 제거하려고 했으며, 非인격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市場기구 대신에 하나의 목표를 향해 意識的으로 指示하고 命令하는 經濟計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경제계획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抹殺(말살)한다. 천문학적으로 많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관한 조건을 중앙계획기관이 파악해서 조정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적 계획이 대규모로 실시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獨裁(독재)가 필연적이며 이에 따른 私有財産權 침해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후의 堡壘(보루)를 허물어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인도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이 우리 모두의 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先決조건이었음을 우리에게 처음 알려 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자유시장과 私有재산제도를 廢止(폐지)함으로써 이것과 더불어 다른 모든 자유도 消滅(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社會主義와 나치즘은 같은 것
번영을 향한 유일한 방법을 포기하고 사회를 철저히 改造해야 더 큰 발전을 신속하게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은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그것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로 歸結된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개인주의적 전통을 말살하려는 集産主義(Collectivism)적 시도라는 점에서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다. 다만 독일의 사회주의는 그 내부에 온건한 요소, 즉 자유주의·국제주의·민주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사회주의는 원래 유토피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온건한 요소들이 사회주의의 실현에 障碍가 된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지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나치즘으로 점차 접근해 간 것이다.
독일에서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간의 관계는 처음부터 밀접했다.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선조들, 예를 들어 피히테(Fichte), 로드베르투스(Rodbertus), 라살(Lassale) 등이 독일 사회주의의 公認된 「아버지」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商人과 英雄」이라는 책을 통해 『독일인의 英雄的 생활이 영국의 商業主義로 인해 부패해졌으며, 독일인의 진정한 騎士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전쟁뿐』이라고 주장한 좀바르트(Warner Sombart)는 1909년까지 마르크스의 사상을 위한 투쟁에 일생의 대부분을 바친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에 관해 좀바르트만큼 권위자였던 플렝게(Johann Plenge)는 사회주의적 「組織思想」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온건하게, 그러나 더욱 효과적으로 국가사회주의 사상에 도달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나치즘으로 접근해 갔는데, 이는 나치즘과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사회주의자들을 迫害했다는 점을 들어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하이에크는 강하게 반대한다.
『나의 많은 영국 친구들은, 의심할 것 없이 진짜 사회주의 信念을 가지고 있는 독일 망명객들이 표명하는 準파시스트(semi-fascist)的 견해를 듣고서, 충격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 영국의 관찰자들은 이것을 독일인의 特性에서 起因하는 현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적 요소보다도 독일적 요소가 全體主義를 탄생시켰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그는 「공산주의 러시아」와 「국가사회주의 독일」의 內部체제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가증스러운 특징들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이 널리 認定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와 나치즘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한탄한다.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전통을 말살하려 한 것은 사회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동일하며, 독일에서 多數派로부터 크게 輕蔑(경멸)받던 그 사상(나치즘)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만든 支持는 정확히 사회주의 陣營으로부터 나왔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하이에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 포퍼 역시 「열린 사회와 그 敵들」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전체주의가 같은 範疇(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히틀러 역시 국가사회주의와 사회주의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無知와 行動規則
「노예의 길」은 영국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케인즈를 비롯한 주요 학자들이 그 책에 대한 書評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까지 그 책의 내용을 거론했다. 미국에서의 반응은 영국에서보다 훨씬 더 강렬해서 이듬해(1945년) 하이에크는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동료 경제학자들은 하이에크가 순수 經濟學을 넘어서 政治 서적을 발간한 것을 불만스러워했다(音大 교수가 대중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을 했다면 동료 교수들이 뭐라고 할까? 아마 「축하해」라고 할 것이다.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하이에크 역시 자신이 경제학을 넘어선 것이 越權 (월권)행위가 아닌지 걱정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증오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런 心的 負擔(부담)에도 불구하고 「노예의 길」로 인해 하이에크의 학문적 履歷(이력)이 바뀐 것은 運命的(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그 후 하이에크는 사회철학자로서 社會主義의 오류를 증명하고 自由社會의 哲學的 기초를 탐구하는 데 獻身(헌신)하게 된다.
하이에크가 말한 자유사회는 어떤 것일까? 먼저 다음 질문에 답해 보시기 바란다.
― 인간의 本性은 다음 두 가지 중 무엇인가?
① 利他心 ② 利己心 ③ 둘 다 아님
古來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의 답이 ①번이냐 ②번이냐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워왔다(性善說 VS 性惡說). 하지만 이 문제에 접한 하이에크는 씩 웃으면서 ③번을 선택한다. 인간은 때로는 利己的이기도 하고 때로는 利他的이기도 하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적 특징은 바로 「無知」이며 이것만이 변함없다. 물론 인간이 白痴(백치)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無知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知識이 制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항상 불완전하고 틀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 삶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사회적 환경에 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지식이 제한적이라면 인간의 삶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인간이 構造的으로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일정한 「行動規則」을 따르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복잡한 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하자. 사고를 내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信號燈(신호등)과 里程標(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게 없다면 운전자는 도로상의 복잡한 교통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교통량, 차량의 속도, 地理的 지식, 심지어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운전자의 기분까지!).
하지만 신호등과 표지판 덕분에 이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녹색불은 左右의 차량들이 지금 정지하고 있으리라는 기대 및 정보를 전달해 준다. 「광화문 直進」이라고 돼 있는 표지판은 바로 그 방향에 광화문이 있다는 정보를 알려 준다. 신호등과 이정표 같은 것이 바로 행동규칙이다. 인간의 삶은 일정한 행동규칙에 따름으로써 이뤄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환경을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다.
치명적 自慢
자유사회의 행동규칙은 「~을 하지 말라」는 禁止의 형식을 띠고 있다. 「自由와 禁止」,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이러한 행동규칙은 특정의 행동방식을 금지할 뿐이고 금지되지 않은 것은 개개인들의 자유재량에 맡긴다. 宗敎規則, 道德規則, 傳統慣習, 法規則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람들이 이것을 따를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질서가 바로 「自生的 秩序」(Spontaneous Order)이다. 이 질서는 질서를 바로 잡는 사람이 없어도 형성되는 질서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금지의 규칙을 지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때 형성되는 질서이다.
이러한 질서는 大規模 社會를 형성하는 질서로서 대표적인 例가 시장경제질서이다.
자생적 질서로서 시장경제의 長點은 인간의 지식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는 동시에 흩어져 있다. 시장경제에서 개인은 「금지의 규칙」을 지키는 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아무 지식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지식을 사용할 경우 시장이 가격 시스템을 통해서 곧바로 처벌한다. 金錢的인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장경제는 개개인 스스로가 흩어져 있는 지식을 활용하도록 하는 동시에 잘못된 지식을 즉시 選別해 냄으로써 인간을 현명하게 만들고 巨大 文明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 자생적 질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질서도 있다. 하이에크는 이런 질서를 「자생적 질서」와 대비하여 「人爲的 秩序」(Artificial Order)라고 하였다. 인위적 질서를 형성하는 행위규칙은 「~을 하라」는 命令의 형식을 띠고 있다.
人爲的 질서에서는 계획하는 사람이 있고 나머지 사람은 그 사람이 하라는 것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질서는 小規模 社會의 구성원리가 된다. 회사, 학교, 정당 등의 소규모 조직을 구성하는 질서가 바로 人爲的 질서인 것이다.
그런데 人爲的 질서를 형성하는 행위규칙들을 가지고 거대사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명백히 불가능하다. 거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所在와, 그러한 지식이 사용되어야 할 方向과, 그것이 사용되었을 때 나타날 結果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거대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사람(또는 위원회, 정부)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루소, 마르크스 등으로 이어지는 一團의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過信한 나머지 사회를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철학적 思潮(사조)를 「構成的(구성적) 合理主義」라고 부르는데, 이런 합리주의는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거대 문명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여 連帶(연대)나 利他主義 같은 原始 사회의 덕목을 찬양함으로써 결국 理性의 힘을 이용해서 거대 文明사회에서 탈출하여 소규모 原始사회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성에 대한 맹신은 文明을 파괴하고 野蠻(야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進步」가 아니라 「致命的(치명적) 自慢(자만)」에 불과한 것이다 (루소가 한 말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라』였다!).
模倣과 革新
자생적 질서가 거대 문명을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질서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질서의 타당성을 증명하지도 못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그 질서를 「싫어」한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공포감을 느끼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자생적 질서를 가능케 하는 행위규범(예를 들어 所有權 존중, 責任 倫理, 契約과 約束의 충실성 등)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직접적으로 충족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자생적 질서를 싫어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광범하게 확산될 수 있었는가. 수많은 인간 집단 중 「어떤 이유」에서(하이에크는 이 부분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한다) 자생적 질서를 가능케 하는 행위규범을 채택한 집단은 급속한 物質的 繁榮(번영)과 人口증가를 누릴 수 있었다. 한 집단의 번영을 가능케 한 질서는 進化的 선택에 의해 급속하게 주변으로 확장된다.
행위규칙의 확산은 주로 模倣(모방)과 革新(혁신)을 통해서 이뤄진다. 기존의 행동규칙들 중에서 성공적인 것은 모방을 통하여 개인에서 개인으로, 집단에서 집단으로 확산된다. 모방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규칙을 잘 알고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칙이 과거에 성공적이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방한다.
모방뿐만 아니라 革新을 통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기도 한다. 집단 내부에서 과거와는 다른 어떤 규칙이 생겨나면 이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집단을 離脫(탈출 또는 추방)하게 된다. 이탈한 사람들이 채택한 규칙이 전통적인 것보다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그러한 혁신을 이룬 사람(들)이 名望을 얻게 되면, 이제 旣存의 집단이 그 규칙을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행위규칙이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물질적 번영과 인구증가이다. 原始 사회가 文明 사회로, 封建 사회가 資本主義 사회로 진화된 것은 새로운 사회에서 채택한 행위규칙이 傳統社會에서 통용되던 행위규칙에 비해 물질적 번영과 인구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文化的 進化論은 다윈(Charles R. Darwin)의 生物學的 進化論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 個體의 遺傳的(유전적) 選別을 다루고 있는 반면, 문화적 진화론은 集團的 制度의 進化를 다루고 있다.
원래 進化 사상은 도덕, 法, 언어, 시장, 화폐 등과 같은 사회적인 것에 적용되던 것인데 다윈이 이것을 생물학에 적용했다. 하이에크는 다윈의 진화론이 19세기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으로 變質(변질)되면서 문화적 進化 과정이 무시되고 개체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제도와 관행이 발전한다는, 일종의 人種主義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戰鬪에서 아직 진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특히 유럽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敵對的(적대적)인 지역이었다. 「鐵(철)의 帳幕(장막)」이 유럽을 가로질렀으며, 共産黨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統制하고 있었다. 西유럽의 다수 국민들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와 같은 사회주의적 복지정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 하이에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하이에크는 「자유로운 사회의 存續을 보장할 수 있는 원칙들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관심사가 비슷한 학자들의 국제적인 모임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主導로 1947년 스위스의 제네바湖 부근에 있는 몽페를랭에서 10개국 39명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몽페를랭 협회」(Mont Pelerin Society)가 시작된 것이다. 이 모임에는 하이에크를 포함하여 미제스(L. Mises), 로빈스(L. Robbins), 디렉터(A. Director), 오이켄(W. Eucken), 프리드만(M. Friedman), 나이트(F. Knight), 포퍼(K. Popper), 뢰프케(W. Ro¨pke), 스티글러(G. J. Stigler) 등 當代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1950년 하이에크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 및 도덕과학(Social and Moral Science) 교수로 재직하면서 社會思想委員會(Committee on Social Thought)의 구성원이 되었다.
미국에서 그는 「경제학 강의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철학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연구했으며, 「自由憲政論」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발표하는 한편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定期的인 세미나를 개최하여 미국 사회에 자유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冷戰시기에 兩大 진영이 武器 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절에 하이에크는 武器보다 중요한 것이 「思想의 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나는 故 케인즈卿에게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케인즈의 얘기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의 思想은 옳든 그르든 간에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 善惡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것은 旣得權(기득권)이 아니라 思想이다」
… 자유주의의 징표였던 「思想의 힘」에 대한 신뢰를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면 戰鬪는 아직 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思想戰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하이에크는 聽力(청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며 이것은 우울증으로 연결되었다. 우울증이 회복되기를 기대하면서 1962년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지만 다른 문제가 생긴다.
1960년대 사회주의적 복지정책과 국가개입주의가 세계를 風味(풍미)하면서 하이에크는 무시되거나 공개적인 비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옥스포드의 철학자 앤서니 퀸튼(A. Quinton)은 하이에크를「거대한 공룡」으로 묘사했으며, 급진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하이에크가 황야 속의 예언자를 自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聽力 低下와 學界에서의 非難은 그의 우울증을 악화시켰다.
당시 하이에크는 몽페를랭 협회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말고는 거의 여행도 하지 않았다. 196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은퇴한 뒤 祖國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부여한 「名譽교수」職도 「1970년대 초반에 처한 비참한 상태」를 만회해 주기에는 力不足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法, 立法, 그리고 自由」를 執筆하기 시작한 하이에크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살아서 사회주의의 몰락을 지켜보다 .
1974년의 스웨덴 王立 學術院은 「경기순환론과 화폐정책 및 신용정책의 효과에 대한 功勞」를 인정하여 하이에크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수여했다.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漂流(표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警告가 너무 非대중적이어서 자신이 그 賞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하이에크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벨상 수상은 病弱해진 하이에크가 다시 活力을 찾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그의 聲價(성가)를 回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賞은 명성을 얻는 것에는 큰 장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갑자기 당신의 얘기를 경청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이에크의 노벨상 受賞 이후 케인즈 理論이 몰락하면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노벨상을 휩쓸게 되었으며 몽페를랭 협회 회원 중에서 일곱 명이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학계에서의 反轉에 이어 현실 정치에 있어서도 하이에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정치인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이에크의 「自由憲政論」을 읽고 感銘을 받은 바 있는 마거릿 대처 前 영국 수상은 1989년 하이에크의 90세 생일에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작업과 사상이 우리에게 준 지도력과 靈感(영감)은 절대적으로 決定的인 것이었으며,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조지 부시 前 미국 대통령은 1991년 『이후 世代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驚異感(경이감)과 畏敬心(외경심)을 가지고 그의 著作을 읽을 것』이라면서 하이에크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大英帝國 名譽 勳位(Companion of Honor)」를 수여했고 1982년 독일연방공화국은 「科學 및 藝術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사회주의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예언이 적중하는 것을 살아서 지켜본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根本을 解體한 마지막 著書 「치명적 自慢」(1988)이 발간된 지 1년 만에 베를린 障壁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著作이 러시아語로 번역되어 공산주의 母國에서 출판되는 것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을 이룬 후 하이에크는 1992년 통일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93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이에크가 永眠(영면)하던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비난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Friedrich August von Hayek, 1889-1992
Among the most masterful and insightful of 20th Century economists, Friedrich A. von Hayek alone could have stood shoulder-to-shoulder with his great rival, J.M. Keynes. Trained by Wieser and B?m-Bawerk in the Austrian tradition at Vienna, F.A. Hayek nonetheless carved a distinct spot in the economic pantheon - in some ways more different from the Austrian School than that of his friend and intellectual companion, Ludwig von Mises.
After some fundamental early contributions (e.g. his 1928 article is often credited with having introduced the concept of a fully intertemporal equilibrium), Hayek's early work was primarily in monetary cycle theory (1929, 1931, 1939). Drawing upon the "cumulative process" of Knut Wicksell and a Continental tradition of multi-sectoral overinvestment models, Hayek argued that when finance permitted investment to be greater than savings, then both desired investment and consumption demand cannot be met by actual output - thus there will be "forced saving" and changing degrees of "capital intensity" (with capital conceived in a very Austrian sense) changing output and employment. However, forced savings are not sustainable as capital goods demand will not be maintained if consumer goods producers are being dried of consumption demand. Thus, there is a contraction in output and a subsequent fall in capital intensity. Hayek argued that this "concertina" process was the main motor behind business cycles.
Hayek presented his main treatise on monetary cycle theory in a slim book, Prices and Production (1931), in England and was immediately drafted by Lord Robbins to join the L.S.E. - where he would serve as that institution's answer to Cambridge's John Maynard Keynes who was then working on similar issues. Keynes did not take lightly the criticisms Hayek made of his Treatise on Money (1930), and thus Keynes and Sraffa joined forces to bury Hayek and his cycle theory in the Economic Journal in 1932.
At the L.S.E., Hayek was instrumental in furthering its then-novel "continental" bent and he was highly influential on his junior colleagues (such as Hicks) and students (which included Lerner and Kaldor). However, following the appearance of the General Theory by J.M. Keynes in 1936, Lerner and Kaldor, like the rest of the economics profession, were drawn away from Hayek's orbit. Kaldor's departure was particularly stinging - since his subsequent criticisms of the "Ricardo Effect" upon which Hayek was hanging the remnants of a shredded cycle theory, led Hayek to abandon his cycle theory entirely.
Hayek's attempted to work a new system in his Pure Theory of Capital (1941), which he originally envisioned as a part of a larger work. In it, he attempted to develop a joint theory of investment and capital. Inexplicably, his 1941 book fell dead-born from the press and proved to be his last substantial effort in the area of theoretical Neoclassical economics. Nonetheless, many of the Hayekian capital themes would emerge later in the theory of investment by his students, notably Friedrich and Vera Lutz and Abba Lerner and, more distantly, Trygve Haavelmo.
Hayek turned in 1944 to the political arena with his Road to Serfdom, a polemical defense of laissez-faire - the work for which he is best known outside academia. His subsequent political activities include the foundation of the libertarian "Mont Pelerin Society" in the 1940s.
In 1935, Hayek had edited a book on the Socialist Calcuation debate in which Mises had been engaged. In resurrecting Barone's 1908 article, Hayek realized that the Mises attack on the socialist position was untenable. As a result, in several famous articles - notably, "Economics and Knowledge" (1937) and "On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1945) - Hayek composed a response which advanced the "Socialist Calculation" debate to a new level. Succinctly, he claimed, countering Lange and the Paretians, that prices are not merely "rates of exchange between goods", but rather "a mechanism for communicating information" (Hayek, 1945). Hayek argued that people have little knowledge of the world beyond their immediate surroundings and this is what forces them to be price-takers - the crucial ingredient that makes the price system work. If, on the other hand, a particular agent's knowledge were greater, agents would then refuse to act as price-takers but rather make decisions in a way which would manipulate their environment to their advantage thereby destroying the price system. In a complex, uncertain environment, Hayek argument, agents are not able to predict the consequences of their actions, and only this way could the price system work. In Hayek's words, the "fatal conceit" of the Oskar Lange and other "Socialists" in the calculation debate was that they believed this order could be "designed" by a planner who just gets the prices right, without realising that a price system evolved spontaneously as a result of lack of knowledge. The same limited knowledge which afflicts the agent's predictive power must necessarily constrain the planner's as well.
Hayek enhanced this argument with considerations of "spontaneous order" - the idea that a harmonious, evolving order arises from the interaction of a decentralized, heterogeneous group of self-seeking agents with limited knowledge. This order, he claimed, was not "designed" nor could be "designed" by a social planner, even a very wise one, but merely "emerged" or evolved spontaneously from a seemingly complex network of interaction among agents with limited knowledge. Hayek's elaborations on this complex, evolving spontaneous order are found in various places (e.g. 1952, 1964). Hayek continued with his work on "evolving order", linking it with his work on political and legal theory (e.g. 1960, 1973). In tackling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al, legal and economic institutions, Hayek is rightly conceived as one of the founding fathers of "evolutionary economics".
In many ways, one can see how the work of the social "evolutionist" and skeptic philosopher, David Hume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on Hayek. Indeed, Hayek's scholarly work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 e.g. on John Stuart Mill, Richard Cantillon and the Bullionist Debates - often echoed his search for bedfellows in the past, those who had resisted the "rational", calculable worldviews and simplistic solutions ever-so-present within intellectual circles. In his work on the philosophy of science (1952), Hayek traces the intellectual roots of the rational-socialist tendencies of economics to the theories of Comte and Saint-Simon in the 19th Century.
Hayek's efforts were nonetheless ignored in the Keynesian mainstream which then dominated economics. Finding a deaf ear in economics, he looked elsewhere. In an apparently bizarre interlude, Hayek turned his attention to psychology - turning out an anti-behaviorist (and Hume-drenched) tract, The Sensory Order (1952), which fit into his "group selection" type of evolution he had applied to his "spontaneous order" in economics.
All this led to one of his most famous works, the Constitution of Liberty(1960) bringing all his previous work on political theory together into one magnificent defense of "Old Whig" political doctrine and a return attack on the Saint-Simon-Comte collectivism.
Having seen his old idea of a "commodity reserve currency" (1943) fail to generate much interest, Hayek turned in the 1970s to champion the cause of a "free banking system" originally proposed by Vera Smith Lutz and the devolution of monetary control away from the central banks and into the hands of private banks (1978). This drew upon him the opposition of Milton Friedman and the Chicago Monetarists.
After spending many fruitful years at the L.S.E., Hayek joined the Committee on Social Thought (not the economics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in 1950. In 1962, Hayek left for the University of Freiburg in Germany and subsequently Salzburg, where he spent his remaining years. Hayek shared the Nobel Prize with Gunnar Myrdal in 1974 in one of the more controversial and surprising awards ever made (controversial because Myrdal had called for the abolition of the Nobel prize as a result of it having been awarded to Hayek and Friedman, and surprising for, at that time, Hayek was virtually forgotten in the economics profession). Interest in Hayek and his work increased after the 1974 award (his Nobel speech being a reiteration of his Counterrevolution thesis) and has kept on that track until today - his stock being enormously boosted by the collapse of Communism in Eastern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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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ources on F.A.Hayek
The Hayek Scholars Page of Greg Ransom - excellent -- massive bibliographies and links.
Curriculum Vitae of Hayek at Nobel Institute
Press release of Nobel award (1974)
Hayek Page at Nobel Prize Internet Archive
"Friedrich August von Hayek" by Roger Garrison and Israel Kirzner (1987), in New Palgrave
Roger Garrison's Time and Money: the macroeconomics of capital structure, 2000
Roger Garrison's Powerpoint Presentation of Hayek's Macroeconomic Theory (nice!)
"Phillips Curves And Hayekian Triangles: Two Perspectives on Monetary Dynamics" by Don Bellante and Roger W. Garrison (1988), HOPE
"Hayek Made No Contributions?" by Roger Garrison (1999), The Freeman
Peter Boettke's Essay on Hayek.
Friedrich Hayek Papers at Hoover Institution
Bibliography of Hayek
The L.S.E.'s Hayek Society.
Greg Ransom's list of articles on Hayek that are available on internet - excellent.
Greg Ransom's Hayek Quote page.
Greg Ransom's Hayek quote sources page.
Reason magazine interview with Hayek
Hayek Biography by Peter Klein, at von Mises Institute
"On the Legacy of Mises and Hayek: Symposium", Cato Journal, 1999
Hayek-L e-mail list.
"Hayekian Triangles and Beyond" by Roger Garrison (1994), in Birner and van Zijp, eds. Hayek, Coordination and Evolution
Hayek Centennial at Freiburg
Hayek Page at LSE History
Hayek Page at Britannica.com
Hayek page at Britannica Guide to the Nobel Prizes
Hayek Page at Laura Forgette
권병찬 기자
NO. | 제 목 | 등록일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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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 | [보도] ‘한국판 신보수’세상을 경계한다 자유기업원 / 2008-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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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 [보도] Korea’s Fight Against Record Oil Prices and Weak Dollar 자유기업원 / 2008-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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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 [보도]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자유기업원 / 2008-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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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 | [보도] 자유기업원 “金産 분리서 융합으로 가자” 자유기업원 / 2008-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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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 | [보도] 한미간 현안 : 전시작전통제권 자유기업원 / 2008-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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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5 | [보도] Korea’s Fight Against Record Oil Prices and Weak Dollar 자유기업원 / 2008-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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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 | [보도] “이명박정부, 전작권 전환 시기 최대한 늦춰야”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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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 | [보도] "금산분리는 경기장 절반만 쓰는 칸막이 규제"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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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 [보도] 보수단체 토론회 `대북 합의사항 선별 수용해야`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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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 | [보도] “새 정부, 전작권 전환 시기 최대한 늦춰야”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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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 | [보도] "전작권 전환, 철회는 못해도 미뤄야"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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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 | [보도] "친북좌파 척결운동 계속 진행돼야" 자유기업원 / 2008-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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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8 | [보도] "총선에서 좌파세력 척결하자" 자유기업원 / 2008-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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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 | [보도] 보수단체 총집결, "총선에서 압승해 좌파 척결" 자유기업원 / 2008-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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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 | [보도] “대선은 절반의 승리” 신발끈 고쳐맨 보수진영 자유기업원 / 2008-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