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공공성이다. 80회를 넘긴 촛불집회에서 매번 나의 이름이 불려진다. 태어나서 이렇게 환대받긴 처음이다. 요사이 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나의 족보가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한 탓이다.
자유기업원이 펴낸 리포트는 내가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엄폐하고 정부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구사하는 허구논리라 비판하고, 기존 진보세력은 나를 두고 사회공공성이냐, 사회화냐며 논란을 벌인다. 공공성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의미로 나를 해석하고, 최근 한 정부연구기관이 나에 대해 대규모 연구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내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종잡기 어렵다는 게 중간보고 결과란다.
심지어 나는 영문 이름조차 없다. 영어 꽤나 한다는 학자들에게 수소문했으나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publicity, publicness, public value, public interest 등 여러 후보가 제시되었으나 자신있게 영문명을 정하지 못하겠단다. 한국말 정의도 불투명하고 영문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불려지는 나, 도대체 난 누구인가?
나의 옛 이름, 공익성
사실 내가 공공성이라고 불리는 건 근래 일이다. 이전에는 주로 공익성이었다. 대체로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공적 이익' 정도로 소개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공적 이익'이 무엇이냐가 여전히 남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정치학에선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형성된 국가권력이 공익의 담지자였다. 봉건제 신분질서를 부수고 국민주권의 공화주의를 내걸었던 시민혁명의 성과가 대의제를 통해 의회나 정부로 대표되었다. 국가권력의 통치행위나 공공부문 서비스 등이 공익의 이름으로 행사되었다. 당신나라엔 공익근무요원도 있다.
공익을 표방하는 자발적 조직들도 있다. 공익단체는 정부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시민단체 역시 국가권력의 공익성을 감시한다는 점에서 모두 비슷한 틀 안에 있다. 재벌기업들이 공익적 활동에 나서는 까닭도 시장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리라.
주류 경제학에선 나의 공간이 매우 비좁았다. 사적이익 추구가 결국 사회 이익을 증진시킨다고 보았기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협소했으며, 있다 해도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규제 혹은 시장 밖에 존재하는 공공재, 외부재 등 부수적 범주였다. 2차 대전 이후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등장으로 시장의 구조적 한계에 개입하는 본연의 경제주체로서 국가가 등장하면서 거시경제의 한 칸을 겨우 차지한 정도이다.
공공의 적으로 몰린 공익성
이렇게 나는 시민혁명 이후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국가권력 혹은 공공부문의 공익성, 혹은 자본주의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공공재 등으로 인식되었다. 그럭저럭 이름이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의 존재 근거가 희미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의민주주의를 토대로 형성된 국가권력이 특정 지배계급, 특히 시장권력의 후원자임이 드러났다. 당신 나라에선 태생부터 소수 특권집단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편향국가였고, 공공부문은 공공의 적으로 몰려 있다. 어쩌면 애초 국가의 공익성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난 시장에서도 버림받았다. 주류 경제학이 시장의 원활한 작동이 곧 사회의 선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여전히 시장은 불안정하고 경제규모는 커가는 것 같으나 양극화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시장의 공익성도 애초 없었던 것 같고, 규제나 공공재도 시장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시민혁명의 성과로서 등장한 국가권력이 공익의 담지자가 아니었고, 시장논리가 강화될수록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더욱 궁핍해지고 공공재도 비효율의 상징으로 추락했다. 나는 이렇게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는 듯 했다.
촛불광장에서 지펴지는 급진적 '모의'
그런데 왜 다시 나를! 그토록 열정적이고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촛불광장에서 당신들은 나를 부르는가? 메아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쇠고기(먹을거리)로 시작하여 의료, 교육, 에너지, 물, 생태환경, 교통(철도)으로 이어지고 언론, 문화, 정보 등으로 나아갔다. 뒤늦게 촛불광장에 등장한 비정규직 의제는 일자리 공공성에 다름아니며, 2MB 정권이 부동산 부양책을 추진하면 곧 주거 공공성이, 국책은행 민영화에 재벌자본과 국제금융자본들이 개입하면 금융 공공성이 등장할 것이다. 2MB 집권기에 '시장만능주의 vs 공공성' 대항전선이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섞인 예측까지 나온다.
도대체 무엇이 변했을까? 모두 각각의 생각이 있겠지만 내 의견은 이렇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현대자본주의가 지나치게 '성숙'된 결과다. 이제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병원과 산후조리원에 이어 분유와 기저귀, 놀이방, 유치원 등 보육서비스를 구입해야 하고, 젊어서는 당신의 능력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팔아야하며, 늙어서는 요양서비스를 사고, 장례마저 상조회사에 맡겨야 한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든, 외출하여 친구와 만나든, 당신은 식품, 물, 가스, 전기, 통신, 교통 등 모든 것을 시장에서 사고 있다. 아, 상품화된 세상이여!
상품이란 무엇인가? 돈을 내야만 얻을 수 있는 거다. 소위 등가교환법칙이라 하여 1만 원짜리 상품이면 1만 원을 내야 한다. 무엇이 문제냐고? 돈이 없기 때문이다. 다수 서민들이 이 상품들을 살 여유가 없다. 서민들에겐 시장이 정한 가격대로 이것들을 구입하는 일이 너무 힘겹다.
모든 게 상품화된 사회에서 등가교환은 정당한가? 이 교환은 동일한 가치대로 맞바꾸는 것이기에 공정한 것 같으나, 위계화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전제로 하기에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난 확신한다. 시장불평등이 있는 곳에서 '등가교환은 공정하지 못하다!'
의료시장화에 반대한다고. 왜? 시장기업이 운영하는 민간보험에서는 낸 돈에 연동하여 (회사 이윤을 빼고) 돌려받기에 가난한 서민들은 배제당한다. 물 사유화에 반대한다고. 왜? 시장기업이 상수도를 운영하면 요금도 오르겠지만, 등가원리에 따라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생활필수품일지라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철도, 가스, 전기, 통신? 모두 그렇다. 시장상품으로 운영되는 한 서민의 이용권은 제약된다.
지난 시기 민주주의 발전은 사회구성원들에게 보편적 권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켰다.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먹고 사는' 경제적 민주화의 문제다. 지금처럼 서민의 생활이 힘든 상황에서, 이 고통, 이 원망을 무엇으로 외치지? 생존권, 정의, 평등, 사회주의? 촛불광장에서 들려온 이야기는 국민주권, 그리고 공공성이었다.
난 촛불광장에서 급진적 '모의'를 엿본다. 시장화를 반대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 안에는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엔 시장논리가 적용되지 말아야한다는 외침이 담겨 있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지급되어야 한다고. 촛불이 부르는 내 안에는 등가교환의 시장논리를 넘어서고픈 서민들의 새로운 경제논리, 사회연대를 표방하는 부등가교환이 깃들어 있다.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주류 사회과학이 다루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에서 국가권력이 더 이상 공익의 담지자가 아니며, 시장을 보완한다던 공공재는 오히려 자리를 잃고 있다.
대신 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시장의 피해를 보는 다수 서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시장(이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공익성이 아니라 사회의 공공성을, 시장의 잔여부문이 아니라 현대자본주의 핵심부문으로 사회공공경제가 생겨나기를 바라고 있다.
나도 새로 태어나고 싶다. 필요하다면 기존 공공성(공익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진보적 대중단체들이 선호하는 사회공공성이라 불러도 좋다. 현대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시장과 이윤을 넘어서 사회공공 경제부문을 구축하고,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토대로서 언론, 문화, 정보 등도 제대로 세우고 싶다. 또 모른다. 촛불이 들불로 번질 경우 서민가계에 필수물이 되어버린 이동통신도, 조그만 승용차도 모두 시장논리(등가교환)가 아니라 사회연대교환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펴져갈지 말이다.
건강보험에 주목하라
지금까지가 내가 바라는 나에 대한 이야기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책망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당신들이 촛불광장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만큼 성심껏 이야기했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몇 가지를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첫째, 내가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내가 손에 안 잡히는 이유는 나에게 적합한 사례가 아직 당신 나라에 없는 탓이다. 청계천 하나로 국정운영까지 위임받을 수 있는 것이 정치다. 어서 나를 상징하는 모델 사례를 만들어라.
주제넘게 제안하면, 건강보험에 주목하라. 그나마 당신 나라에서 공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제도가 건강보험이다. 항상 반대만 하지 말고 본인부담 제로의 의료공공성을 어떻게 달성할지 생각하기 바란다. 난 당신들이 민간보험엔 그토록 가입하면서 왜 건강보험료 인상에 인색한 지 이해하기 어렵다. 건강보험료를 올리면 사용자 몫이 늘고 덩달아 정부의 법정책임금도 늘기에 낮은 추가 보험료 보담으로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물론 행위별수가제 보완은 필요하다). 게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과되는 본인부담금과 달리, 보험료가 소득에 따라 정율로 적용되니 이것도 서민들에게 유리하다.
어서 민간보험이 아닌 공적 건강보험으로 의료를 해결하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그러면 나를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의료제도처럼 '능력(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내고 필요(질병)에 따라 서비스를 받는 것이 공공성이다'라고 설명하게 말이다.
등가교환의 불공정성, 부등가교환의 공정성
둘째, 내가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 나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 먹을거리에서 의료, 언론, 금융, 심지어 일자리까지 확장하니 말이다. 문제는 범위가 아니다. 이것들을 관통하는 기둥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선 과거 국가권력을 공익의 담지자로 이해하는 행위주체별 사고는 이제 잊기 바란다. 시장 잔여범주의 공공재 정의로도 나를 담을수 없다. 민주성, 투명성, 중립성 등 절차에 주목하는 공공성도 의미는 있으나 핵심은 아니다.
이제 공공성의 정치경제학이 요청된다. 사람살이 대부분을 상품화하는 현대자본주의, 기존 조합주의체제까지 허무는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시대에서 왜 내가 제기되는지 규명되어야 한다. 주류 학문의 인식틀을 넘어 현대자본주의를 진단하는 진보적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
난 과도상품화된 현대자본주의에서 시장(이윤)논리를 넘어서려는 부등가교환에 관심이 간다. 공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등가교환의 불공정성을 간파하고, 능력에 따라 내고 필요에 따라 받는 '부등가교환'을 사회연대교환으로 재해석하는 정치경제학을 고대한다. 이를 위해선 가능한 소유가 사회적이어야 하고, 재정이 공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며, 운영 역시 민주적이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논란을 더 벌여 달라
셋째, 나의 미래 진로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있다. 시장만능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알겠는데 그래서 어디로 가자는 것인데? 공공성은 단지 반대 운동인가? 자주 듣는 이야기다.
내가 시장에 대항하는 의제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애초 시장에 맞서는 게 진보운동이었다. 동구사회주의가 패망하고 사민주의 역시 도전을 받으면서, 시장을 넘어서는 가치로 새로 등장한 것이 바로 공공성이다. 글로벌 세계화, 시장만능주의 질서에 맞서 진보적 대안찾기 노력의 중간경로라 볼 수도 있다.
아직 나의 미래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검증돼야할 것이 참 많다. 기존 진보운동이 연역적으로 추론된 대안사회 모델을 추구했다면 난 진보적 사례 하나하나를 만들어가는 귀납적 실천을 밟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시장에 대항하여 기존 공공서비스를 하나씩 지키면서 그 영역을 확장강화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래, 모두 어려운 과제다. 지난 100년 진보운동의 좌절과 시장의 승리를 모두 넘어서려는 운동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난 기쁘다. 유구한 게 역사고, 역사의 힘은 희망이다. 나를 두고 더 논란을 벌여 달라. 내가 누구인지를 보다 명확히 밝혀가며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 달라. 힘겹지만 장엄한 귀납 행군에 함께 하고 싶다.
오건호/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onscar@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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