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칼날이 성장 숨통 죈다
요금인하 압박등 기업에 일방적 희생 강요
IPTV등도 규제탓에 선진국보다 뒤쳐져
“정부, 통제보다는 경쟁환경 조성에 힘써야”
“당신네 회사는 공기업입니까.”
올 봄에 해외 IR에 나섰던 모 통신사 관계자는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외국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통신비를 20% 인하하라고 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통신비 20% 인하 선언은 현실성이 없어 결국 관철되진 못했다. 하지만 통신서비스업계가 받은 충격은 상상 외로 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즉 친기업을 표방한 MB정부가 시장원리를 철저히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기업들은 정부가 언제든 정치논리에 따라 규제의 칼날을 코 앞에 들이댈 수 있다는 걸 직감했다.
우려는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정부는 지난 6월11일 저소득층에 대한 이동전화요금감면을 기초생활수급자 전체와 차상위계층을 전면 확대하는 요금인하안을 발표했다. 필요 재원 5,000억원은 정부가 아닌 이통사들에게 떠넘겨졌다. 기업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것이다.
이 같은 MB정부의 막무가내식 통신 규제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공통된 진단이다. 방송통신위원회 등 정부는 겉으로 업계의 자율경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업계가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속내를 거스를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관련업계에서는 “경영전략을 세우는데 가장 큰 변수는 경기나 경쟁사가 아닌 정부 규제”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만큼 규제가 대외여건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요금을 직접 규제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며 “통제 대신 경쟁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선진국 등 해외에서 통신요금에 대해 직접 통제를 하는 곳은 거의 없다. 영국의 오프컴(Ofcom), 프랑스의 알셉(Arcep) 등 유럽 규제기관의 경우 번호이동(MNP) 제도 개선, 접속료 조정 등 도매시장 규제는 하고 있지만 강제적인 요금인하 같은 소매규제는 전무하다. 있다면 EU 차원에서 국가간 이통요금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로밍 요금에 대해 인하를 종용하는 정도다.
아울러 글로벌 기준으로 볼 때 정부가 통신요금에 메스를 들이댈 정도로 한국의 통신비와 이통사들의 이익률이 과도하게 높은 지도 의문이다.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넷(EIU) 기준으로 한국보다 IT산업 경쟁지수가 높은 상위 7개국의 이동통신 평균 분당요금(RPM)은 0.137로 한국의 0.11에 비해 25%나 높았다.
요금과 밀접한 수익성을 보면 국내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은 OECD 주요 이통사업자들의 2007년 EBITDA(법인세 차감전 이익) 마진 순위에서 27개국 중 21위다. EBITDA 평균은 40.0%인데 비해 SK텔레콤은 35.7%였다. 반면 SK텔레콤의 서비스 매출 대비 투자비율은 16.4%로 5위를 기록했다. 요금인하가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에 근거하기 보다 ‘국민 정서법’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법 하다.
통신업계는 시간이 갈수록 경쟁 격화로 통신요금이 내려가는 건 대세라고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에서 자연스러운 경쟁을 통해 요금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정부가 급하게 인위적으로 요금인하를 강요, 경영을 악화시키고 이에 대비할 시간을 뺏어버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통신업계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 심지어 방통위의 모 간부는 “그동안 국내 통신기업간 경쟁이 약해서 문제였다”며 “경쟁이 치열해져 후발사업자는 망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의 규제가 산업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건 요금 뿐만 아니다. IPTV, 인터넷전화 등 자라나는 새싹들을 키우기는 커녕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지난해 시작했어야 할 IPTV는 이제 겨우 사업자 선정을 마친 상태다.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성 제도 역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한 끝에 이달 시행 예정이다.
신사업들이 제때 출범을 하지 못하면서 IT코리아의 경쟁력은 크게 뒤쳐지고 있다. 실제로 EIU의 IT산업 경쟁지수가 지난해 3위에서 올해 8위로 추락했다. 인터넷보급률 선두권인 한국이 IPTV에서는 경쟁국에 비해 3~4년이나 늦어 버렸다. 인터넷전화 등 관련 IT장비업체들은 기다리다 지쳐 도산하거나 업종을 전환하는 사례마저 생겼다. “방통위는 그동안 뭐했냐”는 분노어린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이유다.
김상택 이화여대 교수는 “IPTV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도입될 때는 관대하게 규제를 하거나 무규제여야 해당 서비스가 잘 자라난다”며 “하지만 정부는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는 괜찮은 서비스가 나오면 먼저 규제부터 하려 든다”고 지적했다.
이규진 기자 sky@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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