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과 10월 3일(현지시간)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하원의 표결이 있었다. 9월 29일 표결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부결되었다. 반대가 228표였는데, 여당격인 공화당에서는 2/3 이상이나 되는 133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나흘 뒤인 10월 3일에도 133명 중 108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부시 행정부가 내놓은 안이지만 공화당 반대표가 민주당 반대표를 훨씬 상회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구제금융안에 대한 표결이 있기 전 공화당 하원의원 100여명은 폴슨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민간 기업에 대한 연방정부의 그 같은 대규모 투자는 경제관리의 자유시장 접근법이 아니며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구제금융안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이것은 미국식 보수주의와 미국식 자유주의 헌법관을 여실히 드러낸 장면이다.
지난 30일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국내은행이 비거주자로부터 차입하는 외화표시 채무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에 대한 표결이 있었다. 물론 '구제금융'과 '지급보증'은 차원은 다르다. 하지만 국가의 시장에 대한 '전면적 개입'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종적인 책임의 주체는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다.
재적의원 299명 중 238명이 참석했고, 찬성 218명, 반대 10명, 기권 10명이었다. 과연 자유주의 헌법관 혹은 보수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평가되는 한나라당 의원들 중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나는 이것이 미국 공화당과 한국의 한나라당이 결코 같을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 공화당과 한국의 한나라당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이라는 면에선 결코 같을 수 없는 한 사례가 아닐까?
'자유주의' 헌법론자들이 생각하는 경제질서는
'이른바 혹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생명과 자유에 대한 개인의 기본권은 사유재산권의 행사를 통해서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헌법 중 소유권 보호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친다.
자유주의자들이 있다. 시장은 결코 개입이나 규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유시장경제는 '보호의 대상'이지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헌법으로 억제할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리는 자연스럽게 감세, 경제적 규제 완화, 소유권 준절대적 보장, 국가에 대한 불신, 작은 정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먼저 이석연 법제처장의 강연을 한 번 들여다보자.
"대한민국이 1990년대 말 IMF사태를 맞은 것도 정부가 시장개입을 적게 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는가 한다. (중략) 정부는 시장경제의 핵심인 공정한 경쟁의 틀을 조성하는 등 구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개별사안을 직접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정부실패(government failure)를 자초할 뿐만 아니라 헌법상 경제질서의 기본원리에 반한다.(법제처 홈페이지 참조, 9월 3일 미국 콜롬비아 로스쿨에서의 강연원고 중)"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의 일관된 논리도 비슷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의 근거가 되는 경제질서조항 자체를 철폐하자고 주장해왔다.
"재산권을 분명히 해주면 경제라고 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하지 않더라도 잘 굴러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굳이 경제조항을 두어야 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경제조항을 두어서 걸그적거리게 만들 이유도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뭐 100% 찬성"(좌승희 편, 새헌법연구, 433면)
하이에크 전문가인 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도 있다. 민 교수는 "민주정치 속의 경제불안"이 한국경제의 특징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불안은 정부 실패가 아니라 헌법실패다"라는 것이다(좌승희 편, 새헌법연구, 236면). 민 교수의 입장에선 한국 헌법 최고의 결함은 시장경제를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규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과 정부 권력에 대한 무제한의 신뢰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점이다. 그는 "헌법은 법을 정치화하여 이를 타락시키고 있다(266면)"고 주장한다.
학자나 법률가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뿐 아니라 정치인인 한나라당 의원들도 나름대로 정리된 입장이 있는 것 같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헌법을 연구하는 국회의원 모임(이병석, 박진, 전재희, 김기현, 김명주, 김정훈, 박승환, 심재엽, 주호영, 홍문표, 나경원, 박순자 의원)'에서 발간한 「헌법개정은 시대정신의 반영입니다(2005)」라는 책이 있다.
"또 127조에서는 '국가'가 규제와 조정, 계획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경제조항에서는 '법률을 통해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 이로 인해 국가가 경제에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임. 따라서 헌법을 개정한다면 경제조항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음."
경제질서조항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헌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규제와 조정에 대한 실질적 비판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시장 개입 말라더니 왜 지금은 가만 있나?
지난 시절 한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운동가들은 '시장은 선' 혹은 시장만능주의적 입장에서 정부 개입에 대해 철저히 비판으로 일관했다. 또 자유주의 헌법관에 선 이들은 툭하면 '위헌소지론'을 이야기하며 국가정책을 무력화시키는데 앞장서왔다. 그러면 지금 이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간단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이번 지급보증 건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무엇일까?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구제금융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IMF와 혹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이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수도권 규제완화는 역으로 지방에 대한 규제의 강화 혹은 지방경제에 대한 보호의 포기를 의미한다. 여기에 대한 입장은 무엇일까?
은행 지급보증을 통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서도 찬성하고, 부동산과 금융에 대한 규제 완화에 대해서도 적극 찬성하는 입장인데, '시장 개입'의 기준은 어디까지로 설정해놓고 있는가?
청바지, 짜장면, 삼겹살 등 생활물가지수 52개가 있었다. 가격을 규제하여 물가를 잡겠다고 했다. 이것은 '생활물가'이기 때문에 개입이 정당화되는가?
대기업에게는 고용을 늘리고 투자에 나서라고 촉구한다. 며칠 전 홍준표 원내대표의 대표연설에서도 다시 반복됐다. 연기금의 주식 매입을 종용하고 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정부가 나서서 YTN의 지분 매각을 촉구했고 여기에 따른 은행도 있었다. 이것은 이들이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자유주의 헌법논리에 합치되는 것일까?
우리 헌법과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와 내 입장에서는 이번 지급보증은, 그 적실성 여부와 별개로, 충분히 합헌적이다. 시장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적절한 개입과 조정을 통한 국민경제의 보호다. 그렇다면 한나라당과 자유주의 헌법론자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란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입장 차이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때로는 헌법상 경제질서조항의 유용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접수해도 좋다는 말인가? 이런 때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런데 자유주의 헌법 이론가들은 지금 침묵 중인 것 같다. 이들이 전범으로 삼고 있는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최재천/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pey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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