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대접받는다◆
경제학에는 학파가 뚜렷하다. 뛰어난 학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 사상과 이론을 같이하는 학문의 계보를 이룬다. 각 학파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에서부터 문제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견해를 달리한다. 유효 수요를 중요시하는 케인스학파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흔히 시카고학파로 알려진 통화주의자들은 시장을 중시한다. 시장에 맡기고 정부 개입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학계는 물론 실제적인 정책결정에서도 주류로 부상한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흔히 한국 경제의 1세대 혹은 1.5세대로 평가되는 학자들의 상당수는 케인스주의자로 평가된다. 60년대 미국 유학파의 경우 특히 그렇다. 당시 미국 학계에서 케인스주의가 정통으로 대세였던 점은 물론 그들이 배운 교과서 대부분이 케인스주의자들이 저술한 책들이다. 폴 새뮤얼슨 경제학원론이 대표적이다.
명실상부한 한국 경제학 1세대 대표주자는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81)다. 조순 교수는 60년대 미국 유학파로 체계적인 경제학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은 물론 서울대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조순의 ‘경제학원론’은 국내에 케인스 이론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경제학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제자와 후배 양성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조순 교수의 지도를 받았거나 같이 연구 활동을 했던 학자들은 흔히 ‘조순학파’로 불리기도 한다.
정운찬 서울대 교수와 김중수 전 청와대경제수석,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김승진 한국외대 교수, 이영선 한림대 총장,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박세일 서울대 교수 등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를 은사로 따르며 이른바 조순학파의 계보를 형성한 학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조순 교수가 1967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 상대 부교수로 부임해 첫 제자로 맞이한 경제학과 정운찬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로 꼽힌다. 케인스주의자로 알려진 정 교수는 평소 재벌 비판, 정부의 시장 개입, 구조개혁 등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성향 때문에 정파를 막론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영입 대상으로 손꼽힌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대외협력실장은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국내 학계에서 케인스학파가 정통으로 자리를 잡았다”면서 “학계뿐 아니라 이들 교수에게서 배운 많은 학생들이 관료로 진출하면서 국가의 시장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 나갔다”고 밝혔다. 당시 개발경제시대와 맞물려 케인스주의가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을 지지하는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는 설명이다.
조순·변형윤 1세대 경제학자
조순 교수가 미국 유학파의 1세대 주자라면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82)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지만 국내파로 국내 경제학계에서 비판이론을 수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변형윤 교수는 한국 경제학계에 계량경제학을 도입한 선구자로 꼽힌다. 4·19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에 가담하는 등 반독재 운동을 했다.
하지만 변 교수는 시장경제의 큰 틀에서 분배를 강조한 온건개혁론자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변형윤 교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나 제자들은 소위 ‘학현학파’로 불린다.
이들은 운동권 인사에서 관료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학현학파의 이름은 변 교수가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강단에서 쫓겨나면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82년 광화문에 ‘학현연구실’을 설립한 데서 유래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된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 이정우 경북대 교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 학현학파로 분류된다.
조순, 변형윤 교수와 비슷한 시기나 조금 늦게 활동을 시작한 경제학자들도 흔히 1세대 혹은 1.5세대 학자로 평가된다.
이학용 고려대 명예교수나 박진근 연세대 명예교수, 박영철 고려대 석좌교수,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등이 대표적 학자들이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미국 등에서 유학했다. 이들의 경우에도 교과서와 각종 저술 활동 등으로 국내에 주류경제학이 뿌리를 내리는 데 일조했다.
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과 김인준 서울대 교수 등도 1.5세대 학자들로 평가된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서울대에서 활동하며 국내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노력했다.
순수한 학파와는 거리가 있지만, 70년대 경제성장을 이끈 집단으로 서강대 교수 출신 인사들을 묶어 ‘서강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만제·이승윤 전 부총리를 등을 중심으로 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끈 집단이다. 이들은 성장주의자로 재벌 우선, 수출지상주의, 선 성장 후 분배 등을 통해 압축 성장을 추진했다. 이들은 경제성장의 기적을 창조했다는 호평과 80년대까지 관변학자들을 총칭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엇갈린다.
최승노 실장은 “서강학파는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자로 아직까지 학계에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실사구시의 관리형 경제성장을 주도한 집단”이라 설명했다.
80년대 말과 9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학계는 좀 더 다양해진다. 민주화 과정을 통해 좌파진영과 시장주의자들의 구분도 뚜렷해졌다.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학현학파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자문그룹이었던 중경회 등이 전면에 나섰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시장보다는 분배와 균형 발전에 집착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중경회의 핵심멤버로는 김태동 교수, 윤원배 전 금감위 부위원장, 이진순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이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이들의 성향은 전체적으로 중도 내지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다는 평가다.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이정우 교수나 김병준 전 정책실장 등은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분배와 균형 발전을 추진했다.
80년대 이후 통화주의자 늘어
국내에서도 70년대 말과 80년대 이후 유학파를 중심으로 통화주의자의 영향력이 커졌다. 시카고대나 시카고학파의 학풍이 강한 대학에서 거시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케인스학파가 주류를 이루던 국내 거시경제학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킨 것.
‘한국의 시카고학파’로 부를 수 있는 대표적 학자로는 프리드먼 교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김인철 교수(성균관대)를 비롯해 시카고대 출신의 이지순 서울대 교수, 조하현 연세대 교수, 김동주 고려대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시카고학파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일군 자유주의적 경제사상과 철학을 믿고 따르는 일군의 학자들을 통칭한다. 시카고 출신 학자들의 성향은 시장주의를 강조한다.
시카고대 출신인 Y교수는 “미국 로체스터대, 미네소타대, UCLA 등에서 시카고학파의 뿌리가 강하다”면서 “금융 등 거시경제는 물론 노동시장과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장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분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경제학계에서 대표적인 시장주의 경제학자로 손정식 한양대 교수와 남성일 서강대 교수, 이종화 고려대 교수와 신관호 고려대 교수 등이 꼽힌다. 남성일 교수는 노동시장에서 시장주의적 분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면 이진순 전 KDI 원장이나 이정우 교수, 유종일 KDI 교수,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진보 진영으로 평가된다. 진보 진영 교수의 상당수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과 연결돼 있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는 김수행 교수와 함께 이병천 교수 등이 손꼽힌다. 그 밖에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채언 전남대 교수, 강남훈 한신대 교수 등이 대표적인 진보학자들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사다리 걷어차기’ 등의 책으로 알려진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지만 정부 정책을 통한 성장 등 독특한 주장을 내놓는다.
반대 진영에선 ‘한국 하이에크소사이어티’를 결성해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김영용 전남대 교수와 민경국 강원대 교수 등을 비롯해 전경련에 몸담았던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시장 기능을 신봉한다. 자유기업원장을 지낸 공병호 소장도 시장주의자였던 하이에크 학문을 따랐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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