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삼성 영빈관 승지원에는 골드먹삭스의 존 코자인 회장 일행이 며칠째 드나들고 있었다. 이건희 당시 회장이 삼성의 구조 개혁 방안을 짜 달라고 의뢰를 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일인 만큼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런 속에서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삼성전자의 핵심 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을 제외하고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습니다.” 전자와 생명만 빼고 모두 처분해도 된다니…. 선대 회장부터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온 계열사들인가. 코자인 회장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까?” 이 회장의 답변은 단호했다. “모든 것을 위임합니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시작되기 전, 삼성은 한 발 앞서 자발적인 구조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그처럼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결과 2000년부터는 그 전 60년 동안의 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이익을 매년 거둘 수 있게 됐다. 버림의 경영이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은 늘 변한다. 과거에는 황금알을 낳던 사업도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돼버리곤 하는 것이 사업세계다. 날개 돋친 듯 팔리던 물건이 유행이 지나서 안 팔리기도 하고, 불황 때문에 소비자들의 주머니가 비어서 안 팔리는 일도 많다. 그런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야 기업은 계속 커 나갈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은 구조조정을 상시화하고 있어야 한다. 잭 웰치가 ‘중성자 잭(Neutron Jack)’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는 사업은 가차 없이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사업을 버리는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을 준다. 애써 만든 것에 강한 심리적 애착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본성대로 하다 보면 비즈니스를 망칠 때가 많다는 것은 최근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의 연구 결과다. 성장 가능성이 없다면 과거에 아무리 애써서 키워온 기업이라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구조조정이 그 기업에 좋은 것은 물론 크게 보면 국가경제 전체에도 약이 된다. 부실 기업에 돈이 묶여 있는 만큼 제대로 된 기업,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에 상대적으로 돈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독려하면서 은행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여파로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할 정도로 부실해진 기업이 많은데 퇴출되는 기업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특히 대기업들의 자발적 구조조정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전체 경제를 살려내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기업들이 제 살을 도려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돈을 빌려준 은행들마저 부실화한 기업을 끌어안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나서는 것이 썩 잘하는 일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기업의 대출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원칙적으로 채권 은행이 처리할 문제다.
은행도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 아닌가. 부실해 보이는 기업의 숨통을 끊지 않는 것은 부도의 여파가 두려워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객을 살려놓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조금 사정이 나빠졌다고 야박하게 대출금을 회수해 버린다면 장사를 잘하는 은행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부실기업이더라도 금융위기가 지나고 나면 얼마든지 훌륭한 고객으로 살아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두 가지의 가능성 사이에서 항상 고민과 저울질을 하는 것이 은행이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자꾸 나서다 보면 금융기관과 기업 사이의 자율적 협상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더라도 민간의 자율에 맡겨 두는 게 관치금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김정호 / 자유기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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