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김순덕 칼럼]전재희 장관은 ‘동화 속 계모’인가

자유기업원 / 2010-03-08 / 조회: 2,184       동아일보

“낙태율을 절반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에 큰 도움이 된다.”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작년 2월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작년 11월 ‘저출산 대응전략회의’에서도 “저출산만 생각하면 등에 불을 지고 있는 심정”이라며 “과거의 낙태에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앞으론 낙태를 단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드디어 지난주 10대 미혼모에게 월 10만 원씩 양육비를 줄 테니 아이를 낳으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이 발표됐다.

‘낙태 자유화’가 세계적 추세다


전 장관이 낙태의 자유화와 합법화가 세계적 추세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기구인 미국 구트마허 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이후 22개국에서 낙태 관련 법 제도를 바꿨다. 엄격하게 한 곳은 엘살바도르 나이지리아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유로 허용하던 낙태항목을 뺀 폴란드 세 나라뿐이다. 나머지는 자유화로 갔다.

조사 대상 197개국 중 선진국을 비롯한 56개국에선 임신 12주까지 낙태에 제한이 없다. 이 밖에도 일본처럼 낙태 허용의 ‘사회경제적 이유’를 따로 명시한 나라가 14개국이고, 여성의 정신건강까지 고려하는 곳이 홍콩 등 23곳이다. 우리처럼 강간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나라는 독재국인 에리트레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의 36개국 정도다. 가톨릭 국가가 많은 남미와 아일랜드를 제외하곤 낙태를 더 엄격히 규제하는 나라는 후진국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가임여성 1000명당 낙태가 29.8건이라고 해서 세계 최대 낙태국인 줄 잘못 알고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도 비약이다. 낙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합법적 낙태가 거의 불가능한 남미(1000명당 평균 31건)다. 낙태를 불법화할수록 오히려 낙태가 많고, 그것도 혼자 위험하게 처리를 하거나 뒷골목 시술을 받아 불행을 초래하는 ‘낙태의 역설’이 존재한다. 포르투갈도 2007년 낙태를 합법화하기 전엔 스페인 ‘낙태 투어’가 많았으나 합법화 뒤 낙태 자체가 오히려 줄었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모자보건법에 있지, 낙태에 있지 않다. 미국 대법원이 1973년 낙태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이라고 판단한 이유도 생명을 경시해서가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는 ‘법적 지위’는 몰라도 생명체가 아닌 반면, 여성이야말로 인권과 선택권을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뒤 75개국이 낙태 자유화로 돌아섰는데 우리는 거꾸로 가겠다고 한다.

전 장관에게 묻고 싶다. 만일 원치 않는 임신을 한 10대 딸이나 조카가 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낳으라”고 하겠는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면 미래 노동력 한 명 늘리기 위해 함부로 정책을 만드는 죄는 짓지 말아야 한다.

‘약자보호’ 명분 정치적 이익 챙기나

옛날 동화 속에 나오는 계모는 전실 딸을 위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제 잇속만 챙겼다. 전 장관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더 많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옥죄는 일은 불행히도 더 있다.

투자개방병원을 완강히 반대해 의료선진화를 막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낙태 단속까지 확실히 할 경우 여성의 생명과 건강보호는커녕 더 성장할 수 있는 의료관광을 역(逆)의료관광으로 만들 판이다. 전 장관은 의료업 진입규제를 풀면 서민들이 갈 병원이 없어진다고 믿는 듯한데, 병원경영에 전문가가 참여하면 경영효율화로 의료비용이 내려가고 일자리 100만 개가 나올 수 있다고 자유기업원은 분석했다. 간병 의료기술 등 서민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를 전 장관이 되레 뺏고 있는 셈이다.

갓난아기는 38만3000원 이상 못 받게 한 보육료 규제만 풀어도 중산층이 안심하고 맡길 어린이집이 더 생길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질 좋은 민간어린이집 확대는 물론이고 여성경제인구 증가를 위해서도 보육료 상한을 폐지하라고 제언한 게 2008년인데 전 장관은 보육교사 수당을 안 올려줘서 그렇다며 예산 탓을 한다.

정치인 출신인 그에게는 ‘서민 보호’가 양보 못할 브랜드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장관직에 있는 한 규제완화는 절대 없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공직자라면 아무리 성실해도 무능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규제 풀어 세금 안 쓰고도 나라 발전시키는 길을 외면하다 오히려 나라에 해를 끼칠까 걱정스럽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더 큰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아서는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고도, 국민을 섬기는 장관이라고도 하기 어렵다. 더구나 자기도 여자이면서 여성의 인권과 행복권을 막아선 안 될 일이다. 마침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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