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리뷰] 한국 싱크탱크 장악한 기업연구소 /
삼성경제연구소는 그 위상에 걸맞게 자주 화제의 중심이 된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미래복지사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산업 선진화 방안’에 관한 연구용역을 5억원에 삼성경제연구소에 수의계약으로 발주했을 때도 그랬다. 삼성은 건강관리서비스 시장화와 원격의료 도입을 뼈대로 하는 보고서를 냈는데, 논란의 초점은 이대로 정책이 실행되면 최대 수혜자가 삼성그룹 계열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보다 뛰어난 언론감각 주효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를 둘러싼 논란은 ‘친기업’을 내세운 현 정부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참여정부 시절에 삼성,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의 ‘유착’ 논란이 더 잦았다.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 시절, 삼성경제연구소가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의제’라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여기에 담긴 ‘국민소득 2만달러론’ ‘동북아 금융허브론’ ‘산업연구단지 조성방안’ 등이 참여정부 주요 국정과제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참여정부가 삼성으로부터 ‘사람’과 ‘머리’를 빌려 쓰고 있다는 비판이 높았다.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은 이에 대해 “그 보고서를 직접 본 적은 없다”며 “만약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제출된 여러 보고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오랫동안 삼성에 대해 연구해 온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힘은 보고서 자체의 우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언론에 어필하는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 지적한다. 언론이 꼭 필요로 하는 시점과 형식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언론이 삼성경제연구소를 얼마나 애용하는지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매체비평지 <미디어오늘>이 2008년 한해 동안 18개 언론에 인용된 삼성경제연구소 기사를 조사한 결과 총 3197건이었다. 주요 경제지와 일간지에선 하루 평균 한번꼴로 기사화되고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기자들이 “왜 이 문제를 다루는 보고서를 내지 않는가?”라고 요청하여 연구가 시작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삼성경제연구소의 영향력은 더 위력적이다. 랭키닷컴에 따르면 삼성경제연구소는 경제연구소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점유율이 70%를 상회하며, 웹사이트 전체 순위에서도 2010년 10월 기준 520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누리집의 회원수는 170만명을 넘고, 1300여개의 지식포럼, 250만건의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국내 연구소 가운데 최초로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1년에 120만원의 회비를 내는 세리 시이오(SERI CEO) 회원이 1만명을 넘는다. 심지어 대학생 리포트와 직장인 기획안의 상당수가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를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자신의 기준에 사회 맞추려는 의식”
엘지경제연구원이나 현대경제연구원, 에스케이경영경제연구소, 포스코경영연구소, 케이티경제경영연구소 등의 기업연구소나 하나금융연구소, 대신경제연구소, 국민은행경제연구소 등 금융권 연구소들은 주로 모기업 경영에 필요한 연구, 조사나 경기 동향과 거시경제지표 분석 등에 집중한다. 반면 삼성경제연구소는 ‘국가적 의제’나 정책을 제안하는 데 적극적이다. 정책결정자, 언론, 대중들이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김상조 교수는 “다른 기업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주어진 룰에 따르는 데 익숙하다면 삼성은 자신의 기준에 사회를 맞추려 하는 의식이 강하다”며 “삼성경제연구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삼성경제연구소의 정책적·대중적 영향력이 크지만 보고서 내용에 대한 검증이나 논쟁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부동산 대세 하락 없다’는 논지의 보고서를 발표한 뒤, 김광수경제연구소, 시민경제사회연구소 등이 이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삼성경제연구소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맞수’가 될 것이라며 출범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다른 목소리’ 역시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곤 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선택할 문제이지만 다양한 예측과 분석, 전망이 경쟁하고 다투는 ‘공론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아쉬움을 준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은환 박사는 “연구소의 보고서는 ‘정책소비자’들에 의한 엄격한 시장검증을 거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잘 팔린다고 해서 그 물품과 회사가 곧 좋은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그 회사가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 오피니언 리더 100인이 본 싱크탱크 영향력/자료: 한겨레경제연구소
친노동 싱크탱크로 불균형 해소 필요
100명이 넘는 석·박사급 경제학 전공자가 모여, 기업 이익과 국가 의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때로는 막강한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삼성경제연구소. ‘기업’ 연구소라는 꼬리표는 늘 따라다닌다. 정치적 논란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특정한 기업, 재벌, 자본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스스로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책경쟁과 검증의 장을 만드는 언론의 노력이 절실하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막대한 자원과 엄청난 영향력을 경계하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친기업’, ‘친시장’의 프레임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정책이 만들어지도록 돕는 더 많은 ‘두뇌집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되곤 한다. 예를 들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만든 한국경제연구원은 ‘자유시장, 자유기업, 자유경쟁’이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걸고 재계 이데올로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성봉 정책기획실장은 “우리는 ‘친기업’이 아니라, ‘친시장’”이라며 “시장경제를 왜곡하는 정책에 대해선 정권을 가리지 않고 비판한다”고 설명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독립한 자유기업원이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선전가 역할의 전면에 서고, 전경련은 로비활동과 조사업무에 집중한다면, 한국경제연구원은 중장기적 국정과제 연구와 이념적, 학술적 기반을 넓히는 역할에 주력한다. 최근에는 공무원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경제’ 교육을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언론과 대중의 인식을 좌우하는 지식 생태계가 지나치게 불균형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불균형의 해소를 위해선 다른 목소리를 더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함께 얘기하고, 서로 귀담아듣도록 해야 한다. 그 첫번째 주자는 ‘친노동’ 싱크탱크들일 것이다.
홍일표 한겨레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iphong173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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