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과 히틀러의 특이한 유사성 진중권이라는 특이한 인물과 진중권 현상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빌려 왔지만 차일 피일 미루다 반납일에 떠밀려 결국 읽어 본 책이 히틀러 평전이다. 악을 연구하다가 악에 물들까 내심 두려웠지만 참으로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중권이 아니었다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이 책을 보면서 내 정신세계에 조금이라도 나쁜 게 들어왔다면 나중에 예술적 체험이나 정신수양으로 닦아내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때마침 가수 임재범이 시연한 나치 복장 퍼포먼스를 두고 유명 작곡가 김형석님과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달고 있지만, 실상은 한국 최고의 궤변가로 명성이 자자한 진중권의 설전이 있어 더욱 시기적절했고도 유용했다. 루돌프 올덴(R. Olden)이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를 보고 평한 내용 중에 참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예를 들어, 그는 곤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졸라 죽이는 독뱀의 집게 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사람은 그 독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아돌프 히틀러 (필자 김휘영은 이 문장을 ‘히틀러의 독뱀‘으로 부른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류들이 들어 있어 논문 한 편을 써도 제대로 고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1) 독뱀은 집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2) 인간을 조여 죽일 수 있는 뱀은 독니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3) 설사 인간이 그런 뱀에게 목졸라 죽임을 당하더라도 결코 독니를 알게 되지 못한다. (p 358,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한인희 譯, 도서출판 푸른숲) 번역자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히틀러 평전의 저자 요아힘 페스트의 지적인지 위 올덴의 평인지를 필자가 잘 구별하기 힘들지만 하여간 이 책의 같은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계속된다. 그런데 아래 내용은 화제의 인물 진중권에게서 드러나는 특성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깜짝 놀랐다. 독자들도 함께 비교해 보기 바란다. 1. <나의 투쟁>에는 ‘사고의 과장된 무질서‘와 동시에 그런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날카로운 확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2. 그러나 그러한 확신들은 깊은 비합리성에서 튀어 나온 것이며, 드물지 않게 적절한 형식이나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날카로운‘과 ‘인상적인‘ 이란 말은 비꼼의 뜻으로 보인다-필자 주) 3. 이 작품 즉 <나의 투쟁>의 내용을 특징짓는 것은 모순되고 차단된 모습들이다 4. 그의 완고함과 완강함은 폭풍우같은 구절들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취향과 모순된다. - 한국에서 좌파적 인사로 알려진 사람 중에 소통이 안되는 인물 1위에 등극한 진중권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논리력이나 품성의 측면에서까지 꽉 막힌 사람이 폭풍우같이 온갖 이슈에 나대고 있는 진중권의 행각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5.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양식화 의지는 자기통제의 결핍과 모순된다.- 해석이 어려운 점은 아마도 번역상의 실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원문의 의도에 따라 필자(김휘영)가 덧 붙이면 ‘자기 통제가 결핍된 인간인 히틀러가 언제나 양식화의 의지를 노출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우스꽝스럽다‘는 점을 비꼰 대목이다. 이 점도 초딩 중딩들하고도 욕설까지 주고 받을 정도로 자기 통제가 안되는 진중권이 걸핏하면 한국인들에게 파시스트니 촌스럽니 하는 딱지를 붙히고 있는 행동 특성과 너무 비슷하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사람이 건방지게 나대는 꼴이다. 6. 이 책은 상당히 정확하게 저자(히틀러)의 초상을 보여준다. - 필자가 진중권과 관련해서 히틀러와의 성격적 유사성에 주목하는 부분은 아래 7번과 특히 아래 8 이다. 7. ‘단조롭고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중심주의‘만이 모순없이 드러난다. - 얼마 전 B급 좌파 김규항씨가 진중권을 두고 "진중권은 좌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다"라는 주장을 하여 논쟁이 일었다. 하지만 김규항도 진중권을 잘못 봤다. <억지와 위선>이라는 책은 진중권이 실제로는 우파이면서 좌파로 위장하고 있음을 여러가지 실증적인 예로 증명했다. 사실 진중권을 두고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건 자유주의자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자유주의자는 최소한 다른 사람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일에 철저히 책임을 진다. 이런 점이 결여된 진중권은 천상천하 유아독존격인 철저한 에고이스트에 불과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능사로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때로는 인간의 죽음 마저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히틀러를 두고 평한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 중심주의"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8. 그는 남이 자기를 꿰뚫어 볼까 의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주는 사람이다 - 히틀러 평전 p358 (요아힘 페스트 Joahim C. Fest 著, 안인희 譯, 도서출판 푸른 숲, 1998) - 진중권은 자신을 향해 쌍욕하는 건 아무리 많아도 일부러 내두려 둔다. 그러면서 그걸로 "자신의 논리는 맞는데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라는 사기를 칠 때 철저히 이용해 먹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진 면목이 드러내는 논리적 반론에는 언급을 회피한다. 필자가 이런 진중권의 행각에 경종을 울리려고 공개적으로 내건 <디워의 서사구조에 대한 30억 내기>에 입도 뻥긋 못하고 도망만 다니고 있다. 요즘에는 이런 유형의 글이 종종 삭제 당하고 있는 현상까지 확인되고 있다. "논객의 싸가지는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라던 말이 과연 누구의 말인지 궁금하다. 여태까지 진중권의 발표해 온 글에서 분명하게 풍기는 ‘논리와 문체의 가난뱅이 냄새‘ 가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독자들을 역겹게 만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중권의 글에 환호하는 소수 네티즌들의 지적 수준과 교양의 정도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이를 잘 이용해 먹고 있는 진중권의 능력도 정말 대단하다. 계속 이어지는 히틀러에 관한 평이다. 9. 언제나 똑같이 암울한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환기되지 않는 그의 모든 콤플렉스와 감정이 기반 하고 있는 의식 바탕도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여태까지 진중권씨의 괴이한 행동을 보아 온 지성인들과 네티즌들 중에서 진중권의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콤플렉스를 지적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필자도 이 지적에 십분 동의하게 되었다. 유아기 때 부친을 잃은 점, 권위있는 기관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심사에 대한 냉혹한 퇴짜와 좌절 등 히틀러와 진중권의 성장과정에도 공통점이 많지만 필자는 두 사람이 각 사회에 내 보인 비슷한 성격 유형에 더 관심이 간다. 히틀러의 독뱀과 진중권의 궤변 이번 임재범 사태에서 진중권이 보여 준 짧은 문장에는 위 히틀러의 독뱀보다 더 많은 논리적 오류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지성인이 잘 정리해서 올려 놓은 글을 소개한다(참고 : http://felab.tistory.com/206) 참고 글에서 보듯 몰취향, 윤리적 논란, 도덕적 변명 등 이 짧은 문장에 엉터리 용어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물론 소개 칼럼에는 진중권이 자신을 방어해 오는 데 철저하게 이용해 먹었던 ‘싸가지 타령‘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오로지 논리적인 비판이다. 이것 마저도 네티즌들이 "자신 더러 논리는 맞는데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고 거짓말 할 것인가? 네티즌들이 진중권에게 하고 있는 말은 "진중권은 논리도 없지만 싸가지는 더 없다" 가 정답이다. 진중권이 알면서도 모른 채 딴청을 떨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인간인지 짐작케 하는 일이다. 다음을 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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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누차 말해 왔듯이 진중권의 글은 3-4줄만 넘어가면 틀린 용어가 나온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누구보다 엄밀해야 할 평론가라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주제에 여러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한국의 지식 검정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 났단 말인가? 위 문장들에서 인용한 대목을 빼고 나면 오로지 진중권이 쓴 문장만 남는다. 그런데 그 문장에 맞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 더구나 그가 미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너무나 황당한 논리가 구성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진중권 이 미학(美學)이 뭔지도 모르고 그 역사와 속성과 역할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일단 평론가로서의 매우 중요한 자격요건인 진중권의 용어에 대한 개념파악의 능력이 과연 어느 수준에 있는지 부터 구경해 보자. 앞에서 말한 한 지성인의 비평을 부분 복사해 왔다. 참고 인용 : http://felab.tistory.com/206 혹시 글자가 작아서 잘 안보이는 분들은 Ctrl+ 마우스 스크롤을 위로 하면 커지니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용이 더 있으니 제가 소개한 주소로 직접 가 보시면 더 좋습니다. | |||||||||||||||||||||||||||||||||||||||||||||||||
위 글을 쓰신 분이 필자의 블로그 안부 게시판에서 와서 이런 진중권현상(지독하게 무식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영역에 까지 나서서 욕설을 퍼붓는 현상)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한탄을 하시기에 보게 된 명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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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인지능력장애가 의심되는 진중권 인지능력장애라는 게 있다. 뇌 신경의 시냅스의 연결에 결함이 있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이 장애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필자의 친구 중에 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아는 체 할 경우 참 당혹스럽다고 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장애인 난독증 정도는 아니지만 의외로 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고 우리가 잘 아는 가수 신해철이 이 증상을 가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필자가 진중권의 글을 오래 접하면서 느낀 결론은 진중권이 혹시 인지능력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물론 얼굴 등의 이미지가 아니라 ‘용어의 개념 파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맛이나 색깔, 음정, 글이나 얼굴 인식의 여부는 쉽게 판별이 가능하다. 이에 장애 증상이 있을 때, 각각 미맹, 색맹, 음치, 난독증, 인지능력장애라는 용어로 분류한다. 하지만 용어의 개념 파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증상은 그 당사자 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색맹처럼 이를 간단한 테스트로 구별해 낼 수 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설령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한들 이를 특정한 종류의 장애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장애 증상들과 뇌 중추의 관계에 대한 특성으로 유추해 볼 때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는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다만 밖으로 드러나고 안 드러나고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의 글을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필자가 진중권을 향해 이런 의혹을 제기한 건 임재범 김형석 사태 때문이 아니라 벌써 수 년이 넘는다. 예를 들어 규모의 경제(The economy of scale)의 경우를 보자. 이는 생산량을 ‘늘릴수록‘ 여러모로 이롭다는 경제용어로 이 뜻은 고등학생만 되도 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 용어를 가져와서는 <디워>같은 영화를 만들면 ‘안된다‘는 해괴한 논지로 써먹었다. 이는 진중권이 여기에 나오는 규모가 원어에 나온 대로 스케일(scale)인 줄 모르고 크기 즉 사이즈(size)로 잘못 파악한 데서 오는 해프닝이었다. 이해를 위해서 필자가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같은 규모라도 1)사이즈-크기-정태적(고정)인 외연이 있는가 하면 2)스케일-품-동태적인 외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이즈는 와이셔츠 크기인 X-large 같은 데 쓰고 스케일은 "우리 사장님은 씀씀이가 크다, 또는 생각하는 스케일이 달라요"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을 바꿔 쓰는 경우는 없다. 이를 잘 알면 규모(規模=scale)의 경제가 생산량의 증가를 의미하는 즉 동적(動的)인 의미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런 개념상의 구분이 전혀 안된다. 그래서 규모의 경제를 시장의 크기(size)로 착각하고 헛소리를 논리랍시고 그 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이건 경제용어라 그렇다 치더라도 철학에 들어가서 좌파의 태두가 마르크스이고 마르크스의 바탕 철학이 유물론인데도 불구하고 관념론이 진리라고 신문기사에서 버젓이 말한다. 이를 보다 못한 한 네티즌이 독일서 5년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왔다는 진중권을 보고 훈계한 내용은 유명하다. 기성용 세러모니에 나온 동물을 이용한 원색적인 용어를 빼고 옮기면 "이 바보야 철학이 어떻게 진리냐? 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수단일 뿐이지, 하지만 널 원망하지는 않아, 덕분에 실컷 웃을 수 있었으니까" 이 얼마나 명쾌하고 확실한 문장인가? 여기에 진중권이 평소 좌파진보의 대표적 논객이라고 광고해 온 걸 생각하면 더욱 기가 막힌다. 게다가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데 ‘마르크스의 반자락‘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는 해괴한 일은 약과다. 좌파운동의 산실 민주노총 보고서에 있었던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 라는 표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영어공용화를 반대할려면 다른 논리로 주장을 해야지 적어도 프놀레타리아 혁명을 위해서 민족을 버리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경우 이런 해괴한 경우를 들라면 끝도 없다.그런데 진중권은 마르크스를 통해서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광고해 먹고 있다. 진중권이 마르크스에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진중권은 정말 경이로운 인물이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중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선전 광고 하나는 괴벨스 뺨치게 잘 한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점은 미맹이 요리 심판관이 되고 음치가 위대한 탄생의 심사위원이 되고 색맹이 타인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가 되고 (이미지)인지능력장애를 가진 사람이 강도나 살인범의 목격자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사회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 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개념)인지능력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론가의 탈을 쓰고 이러쿵저러쿵 헛소리를 하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 이를 방치함에서 오는 피해는 주로 나이 어린 학생들이 받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명색이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쓴 글을 본 학생들이 대입논술에서 ‘몰취향‘이라는 국어 사전에도 없는 말을 쓰다가 감점을 받아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그로 인해 인생 행로가 바뀐다면 진중권이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대학입시는 2-3 점에도 수만명의 순위가 걸려 있는 관계로 이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기성용의 세러머니와 임재범의 퍼포먼스 | |||||||||||||||||||||||||||||||||||||||||||||||||
얼마 전 기성용선수가 한일 축구 A 매치에서 원숭이 세러모니를 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진중권의 말대로 나라 망신 까지는 아니지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 맞다. 그러나 이번의 임재범의 나치복장 퍼포먼스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기성용의 인종차별 세러모니와 임재범의 나치의상 퍼포먼스는 결정적으로 두가지가 다르다. 1. 기성용은 국가 대표 축구선수이지만 임재범은 자유로운 개인이자 더구나 저항정신을 그 생명으로 하는 락아티스트다. 국가대표 선수는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민간사절단과 같은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이유야 어쨌든 기성용은 충분히 비난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설사 기성용이 정말 관중석에서 욱일승천기를 보았다 하더라도 (필자는 이를 기성용 측의 궁색한 변명으로 본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국 축구협회에서 적어도 이 정도는 가르쳐서 경기장에 내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숭이 세러모니는 미리 연습을 해 두지 않으면 하기 힘든 동작이었기에 갑자기 화가 나서 그랬다는 말은 신뢰하기 힘들다. 기성용의 변명이 맞든 틀리든 간에 진중권이 기성용의 원숭이 세러모니에 대해 비난을 한 건 나름대로 옳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한 호되게 질타하는 칼럼을 쓰고 싶었는데 진중권이 대신 수고해 주었으니 감사하기조차 했다. 문제는 진중권이 워낙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각인되어 아무리 그가 선의를 갖고 한 말이라도 대중과 소통에 실패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곤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스타일이 그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 보기 바란다.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싸가지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소통이 중요한 시기에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싸가지가 나쁜 사람은 그 만큼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진중권에게 정작 논리라도 있었는가? 진중권의 말과 주장에 보이는 건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와 사기술이 대부분이었지 않은가?
결정적 차이-사회문화적 차이 2. 또 기성용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보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런 몰상식한 짓을 했고 임재범은 역사적으로 독일의 나치와 피의 역사를 가진 유럽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임재범은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게 진중권이 말하는 미학적(美學的) 이유라면 하등의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사회문화적으로 봐도 큰 문제가 없다. 기성용이 만일 유럽에 가서 그런 식의 행동을 했다면 적어도 2-3 년의 출장정지를 받아 선수생활에 최대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국가대표가 아니라 일개 관중이라도 경기장으로 바나나를 던지는 등 인종차별 행위를 하면 경찰이 그를 잡아 처벌 한다. 하지만 관중이 아닌 국가대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용은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이것도 미학이나 윤리ㆍ도덕에 관계없이 오로지 사회문화적인 차이 때문이다. 유럽은 노예제도의 잔인했던 역사가 있었고 또 이민자가 많아서 인종차별은 현존하는 심각한 문제이기에 이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같은 피부색에 같은 머리색 까만 눈 등 외모에 의한 인종차별이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인종차별은 먼나라 이야기로 여기에 특별히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는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인이 황인종보고 바나나라고 하면 문제가 되지만 같은 황인종끼리 바나나라 한들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한갓 우스개 소리로 다가올 뿐이다. 미학과 표현의 자유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피아노의 늘씬한 다리가 음란(淫亂)하다 하여 보자기로 싸고 공연을 하게 했던 게 인류 예술의 역사다. 온갖 이유를 들어서 학자들의 사상의 자유와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왔던 게 인류 역사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미학은 각종 예술의 존재양식을 규정하고 예술을 종교와 도덕 등 각종 억악과 규제로 부터 독립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화장실 소변기 조차 예술가에게 선택되고 전시회에 전시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는 마르셀 뒤샹의 ‘샘(1917년)‘의 미학과 1960년대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잔 손탁의 이론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했다. 표현의 자유의 역사 필자는 20대 때, 마광수 교수가 말한 "창작은 배설행위다"라는 배설론에 찬동하지 않고 "창작은 공감을 위한 활동이다"라며 공감론(共感論),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소통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법기관이라는 국가권력이 개입하여 마교수의 작품 <장미여관>이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라며 법의 심판을 내렸을 때는 필자는 마광수 교수가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촌스럽고 근엄했던 한국조차도 21세기가 되자, 마광수 교수의 그 장미여관을 올 누드 배우까지 출연해서 공연하는 시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있는 시대‘ 다. 불과 몇년 만에 변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 졌다는 증거다. 법적ㆍ 도덕적ㆍ 윤리적 측면과는 별개로 보통 사람들은 사실 이런 작가나 아티스트들의 지난한 투쟁과 저항의 역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은 자유를 누려 왔다. 이들 창작자들이나 공연자들이 단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했든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서 했든 상관없이 이들은 표현의 자유의 확장을 가져왔고 그 만큼 인류사회를 풍족하게 하는 데 기여해 왔다. 또한 그들의 저항과 투쟁은 고루한 사회인습과 도덕적 금제(禁制)에 대한 반기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튀는 행동엔 언제나 그 당시 사회 공동체로 부터 반대와 비아냥이 넘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지지가 따랐다. 예술과 사상 그리고 이에 밀접하게 연관된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다양한 권력들과 싸워 왔다. 법 등의 제도화된 권력 뿐 아니라 편협한 종교단체, 고루한 도덕주의자, 이데올르기, 무지한 평론가, 보수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어용학자들과도 싸워 왔다. 미셸 푸코의 수십년에 걸친 저작들에서 보인 각종 억압과 금기에 대한 연구들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이처럼 적어도 미학자나 예술가들이 이들의 자유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투로 태클을 거는 일은 없었다. 배꼽잡는 미학 그런데 2011년 7월 정말 해괴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미학적(美學的) 견지에서 한 아티스트의 공연 즉 표현의 자유를 비아냥거리며 딴지를 거는 특이한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이건 정말 세계 미학사가 아니라 기네스 북에 올라가야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어이없는 현상을 보고 배꼽이 빠질 뻔 했다. 진중권을 노벨 미(美)학상 아니 미(未)학상에 추천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무식한 놈한테 봉변을 당한 유명 작곡가 김형석 교수님 90 년대 최고의 작곡가, 아니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위상을 가진 김형석님이 진중권이란 사람의 인성(人性)을 너무 모르고 끼여 들였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냥 어느 유명한 분이 진중권을 두고 평한 대목처럼, "미친 개가 짖어대는 구나"라고 생각 하고 지나갔으면 될 일을. 김형석 같이 점잖은 분이 상대를 너무 몰랐다. 업적과 인성, 그리고 논리에서도 자신보다 훨씬 무식하고 저질인 인간한테 그것도 말도 안되는 인신공격을 받아야 했다니...., 진중권에게 세련. 매너, 민주 시민의 소양, 게다가 논리, 이런 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다는 점이 작곡가 김형석님의 불행이었다. 마치 으르릉거리는 야수처럼 물어뜯고 할퀴는 말싸움질을 논리적 대화라고 착각하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다니. 진중권과 이런 일을 해야 할 사람은 필자 한 명으로 그쳤으면 좋겠다. 무식하고 막돼먹은 인간 한 명 때문에 이 무슨 국가적 낭비인가? 악마에 영혼을 판 지식인 필자가 보기엔 진중권을 규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진중권이 열심히 광고해 먹고 있는 마르크스,비트겐슈타인, 벤야민이 아니라 히틀러, 괴벨스, 그리고 쇼펜하우어다. 이 점은 진중권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 세 사람을 연구하면 오늘날의 진중권이 나온다. 이중에서도 진중권의 양심을 가장 망가뜨린 정신적 스승은 쇼펜하우어다. 필자는 그의 책 <토론의 38 가지 법칙>을 보고 또한 깜짝 놀랐다. 진중권이 여태까지 해 온 수법과 너무나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진중권이 걸핏하면 말했던 ‘검객‘이란 표현도 수없이 나온다. 이 책의 주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이다. 놀라지 말기 바란다. 1)진리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싸워 이겨 얻는 전리품이다. 그러므로 토론에 이기려면 2)사악해져라 3) 극도로 뻔뻔해져라 4) 교활해져라. 5) 실제로 수준높은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밀리더라도 수준낮은 대중들 앞에 "이기는 체" 보이면 된다. 세상에 이런 책이 존재하다니.... 이건 필자가 전혀 과장한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1)사악 2)교활 3)뻔뻔 4)‘이기는 체‘란 용어가 몇 번이나 반복된다. 불과 70 장 정도 밖에 안되고 글씨도 큼직큼직하니 관심있는 분은 도서관에서 지나는 길에 한번 정도 슬쩍 훑어 보기 바란다. 토론에 이기려면 논리가 아니라 사기를 잘 쳐야 하며 마지막 38장에는 안되면 "인신모독을 하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장하준-정성일 교수와 ‘TV책은 말한다‘ 토론에서 무식한 진중권이 논리로 안되니까 써먹은 수법은 이 책의 16번째 기술(p73) 이다. 토론 상대가 아니라 ‘청중들을 향해서‘ 말도 안되는 이의제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의제기가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전문가만 알 수 있을 따름이라고 책에 써 있다. 예를 들어, 진중권이 "그러면서 당신들은 왜 좌파라고 합니까?" 이런 유치한 수법으로 이의제기를 하다가 "우리가 언제 좌파라고 했나요?"라는 역습에 챙피만 당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진중권에 의한 이런 해괴한 이의제기는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건 자유기업원에서 하는 말입니다"는 "자유기업원에서 하는 말도 옳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독재자 박정희를 두둔하고 있습니다"는 "우리는 지금 박정희의 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실시한 경제개발정책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에 의해서 무참히 박살났다. 진중권이 신경쓰는 건 상대 패널과의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이 ‘더러운 책‘이 말하듯이 <철저하게 무식한 대중들>이다. 진중권은 전문가들에게 아무리 무식한 인간이라는 평을 듣더라도, 지적 수준낮은 대중들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게 훨씬 돈이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중권의 문체를 보라! 그게 어디 지성인을 향한 문체인가? 철저하게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감정에 아부하고 고자질 하는 형식의 문체이지 않은가? 무식한 대중이 많으면 그걸 깨우쳐 줄 생각은 않고 그걸 옳다구나 하면서 이용해 먹으려 하다니? 필자는 규모의 경제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을 경제 토론에 불러 낸 방송사의 의도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이런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문가들이 토론해야 하는 프로에 주제넘게 나가는 진중권의 특이한 배짱은 더 이상하다. 돈을 위해서라면 부끄럽고 창피한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가? 이 책의 p73 는 이렇게 계속된다. "상대방은 전문가이지만 청중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도 안되는 이의제기를 하면 청중들의 눈으로 볼 때 상대방이 패배한 것이 된다. 더군다나 나의 이의 제기가 상대방의 주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청중들은 금새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고, 청중들을 쉽게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기술 p73 보다시피. 이 책은 진리가 무엇이며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전문가인 상대 패널의 논리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오로지 우매한 청중들을 속여서 "이기는 체" 사기를 치는 방법만 가르치고 있다. 진중권이 이런 괴상한 유머를 가장 많이 써 먹은 토론이 바로 디워 토론이었다. 논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갑자기 혼자 준비해 온 "충무로와 지하철 한번 갈아 타는 관계" 라고 말하면서 대중을 웃겨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가던 사기술.... 그리고 자신의 싸가지를 문제 삼는 건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는 사기술의 극치 등 무식한 대중을 상대로 이런 사기술을 써 먹은 걸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필자 같은 전문가가 보기엔 진중권이 토론에 나와서 논리라고는 논자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유독 수준 떨어지는 네티즌들도 제법 설치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진중권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상대를 완벽하게 논리로 무너뜨렸다는 거짓 광고가 많이 나돌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걸 아예 전략적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진중권의 정신적 스승 쇼펜하우어가 쓴 이 책에는 심지어 이런 내용까지도 나온다. 한자도 빼지 않고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 "28번에서 배운 기술을 여기에 사용하여 , 상대의 대답으로부터 우리의 불합리한 주장이 증명되었음을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위해서는 (논리력이 아니라) 극도의 뻔뻔스러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기술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기술 p112~P113 진중권이 이런 사기술을 극단적으로 발휘한 토론이 바로 지만원박사와의 토론이었다. 내가 보기엔 진중권이 논리적으로 이긴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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