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열린 ‘포퓰리즘 입법 안하기 서약식‘. (자료사진)
원래 ‘가치중립적‘..남미 페론정권 이후 부정적 의미
정치권서 상대방 공격할 때 근거도 없이 마구 사용
‘대중지지=포퓰리즘‘ 잘못된 등식..기성정치인 위기의식 발로
"전면적 무상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다", "한국을 지배해온 것은 망국적 토건개발 포퓰리즘", "정치권의 친서민 행보는 포퓰리즘", "우리가 추진하는 것은 우파포퓰리즘으로 나쁜 좌파 포퓰리즘과는 다르다"
‘포퓰리즘(Populism)‘ 광풍이 불고 있다. 최근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등 정책적 이슈가 터져 나올 때마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남발되고 있다. 특히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전가의 보도‘인 양 입만 열면 포퓰리즘을 들먹이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주로 정치권에서 보수 세력이 진보 세력을 비난할 때 사용돼 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정치적 이념에 관계없이 서로 ‘진짜 포퓰리스트는 당신들‘이라고 몰아세우기 바쁘다. 심지어 보수 여당 안에서도 포퓰리즘의 화살이 날아다닌다. 재계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면서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직격탄을 날린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포퓰리즘 앞에는 갖가지 수식어도 붙는다. ‘우파 포퓰리즘‘, ‘좌파 포퓰리즘‘, ‘복지 포퓰리즘‘, ‘반(反)포퓰리즘‘, ‘신(新)포퓰리즘‘. 게다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퓰리즘‘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국민은 헷갈린다. ‘도대체 포퓰리즘이 뭐길래?‘
◇ ‘포퓰리즘‘ 어디서 왔나
포퓰리즘(Populism)을 우리는 흔히 ‘인기영합주의‘, ‘대중추수주의‘로 변역한다. 비현실적인 선심성 정책을 내세워 일반 대중을 호도한다는 부정적 의미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포퓰러스(populus)‘는 ‘대중‘, ‘민중‘이라는 뜻이다. 이를 직역하면 ‘대중주의‘, ‘민중주의‘ 정도가 된다. 즉 ‘대중의 뜻을 따르는 정치행태‘라는 점에서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만 보기 어렵다.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Democracy)도 실은 포퓰리즘과 맥을 같이한다.
영국의 롱맨 사전은 ‘포퓰리스트(Populist)‘를 부자나 지식인보다는 보통 사람들을 대변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와는 달리 가치중립적이다.
기록상 서양에서 포퓰리즘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민관이던 그라쿠스 형제가 개혁을 위한 지지 확보를 위해 시민에게 땅을 나눠주고 옥수수도 시가보다 싸게 팔았는데 이것이 포퓰리즘의 기원이 된다는 설이다.
근대적인 의미로 보자면 1870년 러시아에서 전개된 ‘브나르도(인민속으로) 운동‘을 포퓰리즘의 시초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어원으로 보자면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국민당(People‘s Party)이 당원들을 포퓰리스트라고 부른 것이 뿌리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의 브나르도 운동은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깨뜨리고 러시아 농촌 사회의 전통적 공동체인 ‘미르(Mir)‘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꿨다.
그러나 지식인 운동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농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국의 국민당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누진소득세, 상원의원 직선제, 교통 및 통신에 대한 정부 규제, 거대 기업 간 담합 금지조치를 주장했다.
남부 농민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은 기업가, 은행가, 대지주의 대척점에 서서 소농 지주와 숙련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으려 했다.
국민당은 20년도 안 돼 해체되고 말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뒷날 민주당의 강령으로 흡수됐고 현재는 모두 실현됐다. 국민 다수의 권익을 증진시킨다는 민주주의의 정신에서 보면 당시의 포퓰리즘은 후일 민주주의로 완성된 셈이다.
포퓰리즘이 우리에게 부정적 의미로 각인된 것은 남미 때문이다.
1950년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과 그의 두 부인 에바와 이사벨은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정책을 편다는 명분으로 대책 없이 국고를 탕진해 결국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가뜨렸다.
역사상 소득 분배와 산업화가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페론 정권은 결국 후대에 국민을 위한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이란 이름으로 비난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일제 강점기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운동을 모방했던 ‘브나로드‘ 운동이 시초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후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특정 정치나 정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사용된 것은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당선자가 출연한 KBS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위원이 쓴 칼럼에서다.
당시 칼럼은 포퓰리즘을 일종의 대중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인의 이미지 전략이라는 의미로 규정했다.
◇오·남용되는 ‘포퓰리즘‘
포퓰리즘이 그 본래 뜻으로 봤을 때 ‘대중 지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면 정치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모두 포퓰리즘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논의의 폭을 좁혀 포퓰리즘을 부정적인 의미에 국한해서 본다면 어떨까. 포퓰리스트라고 공격받아 마땅한 정치인이라면 그는 바로 ‘대중의 인기를 얻는데만 급급해 현실성 없는 정책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부정적인 의미의 포퓰리즘을 가름할 잣대는 정책의 ‘현실성‘ 또는 ‘경제적 합리성‘ 여부가 된다.
어떤 정치인이 TV 방송에 출연해 재원 마련 대책도 없이 "서민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대학 등록금을 현재의 절반으로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그를 ‘포퓰리스트‘라고 공격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가 만약 재원 마련을 위해 세제 개편안을 들고 나왔다면 상황은 다르다. 일단은 그가 제시한 방안의 실현 가능한 것인지, 올바른 방향인지 등을 놓고 논쟁을 벌여야 옳다.
그 논쟁이 바로 정치인들이 벌이는 당당한 ‘정책 대결‘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일단 상대방에 대해 ‘포퓰리스트‘라는 낙인부터 찍는다. 대중이 원하는 정치나 정책은 어느새 ‘포퓰리즘‘의 누명 아래 그 타당성에 대한 논의 자체는 가려지기 일쑤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김태현 사회정책국장은 "선거 시즌이 되니 여야 구분없이 국민 표를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먼저 정책을 내는 사람한테 포퓰리즘이라고 욕하고 못 내면 못 낸 아쉬움으로 포퓰리즘이라고 욕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이광재 사무총장도 "친서민 복지 정책에 유권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대중 정치에 익숙하지 못한 기성 정치인들이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모으는 정치인들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붙여 공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국민에게 필요하고 지지를 받는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몰아가거나 이념적 대결구도에 활용하는 모습은 심각하다.
지난 총선 때 이미 여야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반값등록금‘이나 ‘무상급식‘ 문제가 대표적이다. 등록금 인하는 방법상의 문제가 남았을 뿐 그 자체는 이미 전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뤄진 사안이다.
여당은 2014년까지 총 6조8천억원의 재정과 1조5천억원의 대학장학금을 투입해 등록금을 30% 이상 인하는 방안을 내놨고, 야당은 소득세,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철회하면 필요한 재원 4조5천만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참여연대는 대학 등록금 절반을 학생과 학부모가 부담하고 정부가 40%, 대학이 10%를 담당하면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반값등록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재원 마련에 대한 상대방 방안의 허점을 찾아 비판하며 최선책을 이끌어내는 것은 건설적인 논쟁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와 정부 정책을 다짜고짜 소위 ‘복지 포퓰리즘‘으로 모는 것은 문제다.
반값등록금을 포함해 MB정부가 최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친서민‘ 드라이브를 재계가 ‘반기업적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써가며 공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국은 세금 정책으로 귀결되는 상황에서 대기업과 재벌에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중소기업과 서민에 쓰겠다는 것을 포퓰리즘으로 볼 수는 없다.
무상급식도 마찬가지다. 찬반 여부를 떠나 무상급식은 예산 논쟁이다. 우리나라 예산 300조원 중 복지에 어떤 돈을 쓸 것인가가 논쟁의 초점이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쪽은 무상급식 때문에 학교보건시설 개선 비용, 과학실험실 현대화 지원비, 저소득층 급식비 등을 전액 또는 부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편은 각종 토목.개발 사업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면 무상급식 시행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 논쟁은 있는 돈을 복지에 쓸 것인가, 개발에 쓸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여기에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최근 태국 총선 결과를 ‘포퓰리즘의 승리‘로 표현하는 것 역시 성급한 일이다. 2001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집권했을 때 턱없는 포퓰리즘으로 매도됐던 공약들이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겨졌던 만큼 이번에 총리가 된 잉락 친나왓의 선거 공약을 대뜸 현실성 없는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조세연구원의 라영재 교수는 "경제적 합리성과 실현 가능성을 기준으로 포퓰리즘과 그렇지 않은 정책을 구분해야 한다"며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려면 그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 교수는 "포퓰리즘을 남용하는 정치판은 오래전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로 모는 이분법적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며 "이제 제발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그만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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