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국민 배고픔 달래자" 삼양라면 전종윤 회장 스토리

자유경제원 / 2015-01-16 / 조회: 2,576       미디어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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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배고픔 달래자" 삼양라면 전종윤 회장 스토리잘 나가던 보험회사 사장 팽개치고 "가난한 사람 돕자" 뛰어들어
한정석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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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16  10: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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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선택과 아름다운 경쟁, 삼양라면 전중윤 회장

배고팠던 60년대, 5원짜리 '꿀꿀이죽’ 대신 사먹던 국민 구호식품 라면이 출시 50년 만에 일본을 제치고 전 세계로 진출한 글로벌 한류식품이 됐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제2의 주식’이라던 라면은 '우리 집에서 라면먹고 갈래?’라는 청춘남녀의 애정고백 유행어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한국 라면은 1억 달러가 넘는 사상 최대의 수출을 기록하며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식품으로 그 위상을 떨쳤다. 한국 라면은 일본 라면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한국 라면의 성공 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적과 같은 한국 라면의 성공사에는 한국인들이 시대속에서 애환과 희망을 담아 끓여 먹었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시장에서 벌어졌던 경쟁과 기업가 정신이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한다.

  
▲ 자유경제원이 주최하여 2014년 10월 27일 열린 기업가연구회에서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이 전중윤 삼양라면 회장의 경영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다. 

잘나가던 보험회사 사장님과 꿀꿀이 죽

1959년 겨울, 한 중년의 신사는 남대문 시장 골목길에 사람들의 긴 줄을 보았다. 그의 눈에 사람들이 들고 있는 깡통이나 냄비같은 것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 사장이었다.

호기심이 일었던 남자는 골목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다름아닌 '꿀꿀이 죽’이라고 불렸던 가난한 서민들의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모아서 끓인 꿀꿀이 죽은 한 그릇에 5원이었다. 거기에는 햄조각이나 소시지같은 것들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영양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오늘날 부대찌개라고 불리는 음식의 원조가 바로 그것이다.

꿀꿀이 죽속에서는 때로 담배꽁초나 씹다 뱉은 껌도 나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든 깡통이나 냄비에 뜨거운 꿀꿀이 죽을 담아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갔다. 그 광경을 본 보험회사 사장은 참담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며칠동안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일본 출장에서 맛본 한 음식이 떠올랐다.

기름에 튀긴 꼬불꼬불한 국수. 육수를 내는 분말 스프를 넣고 끓여 먹던 음식. 바로 라면이었다. 맛도 좋았지만, 기름에 튀긴 음식이라 먹고 나서 든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쌀은 부족해도 밀가루는 미국 원조로 넘쳐나지 않는가! 그 남자는 결국 잘나가던 보험회사 사장직을 내던지고 라면 개발사업에 뛰어 들었다.

바로 제일생명(現삼성생명) 사장이었던 삼양식품의 故전중윤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밀가루로 수제비만 해먹어도 견디는데 거기에 비해 라면의 영양가는 대단한 편이었어. 그때 우리 뱃속에는 지방분이 없었어. 사람이 지방을 하루에 최소한 70g은 먹어야 하는데 5g도 못 먹었으니까. 밀가루는 지방분이 3~4%밖에 안 돼요. 지금은 소득이 높아져 오히려 비만으로 고생할 정도가 돼서 지방질을 멀리해 18g밖에 안 넣고 비타민·칼슘·단백질 같은 영양분을 다양하게 추가하지만, 초기에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으니 식량 대용으로 이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든 거예요.” (전중윤 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1963년, 한국에서 라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중윤회장은 사재를 털어 작은 공장을 짓고 일본을 오가며 라면제조 기술을 배웠다. 당시 일본에는 묘조식품이라는 회사가 인스턴트 라면을 한국보다 4년 앞서 출시해 판매를 하고 있었다. 전중윤회장은 묘조식품 회장을 찾아가 라면제조 기계 판매와 기술전수를 간곡하게 설득했다. 당연히 묘조식품회사의 입장에서 선뜻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묘조식품 회장은 전중윤회장이 국내 굴지의 금융인이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성실함과 의욕을 보고 라면기계 판매와 기술전수를 결심하게 된다.

금융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아무도 해보지 않은 라면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 중국 고사에 식족평천(食足平天), 먹는 게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는 말이 있어. 중국 제왕들도 그렇게 말했고,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어느 나라 국민이나 마찬가지예요. 먹는 게 제일이야. 내가 동방생명을 만들고 나중에 제일생명도 운영하다가 넘겼지만, 생명보험이라는 게 뭐요? 1년에 사람이 얼마나 태어나고 몇 살 때 얼마나 죽고, 또 평균 수령이 어떻게 된다 하는 숫자가 나와 그것을 보험료 산출 근거로 삼는데,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1960년대가 돼도 식량이 모자라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어요. 그게 우리나라 실정이었어”(전중윤 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 12월 19일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조사에 따르면, 한국 1인당 라면소비가 세계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한 사람이 1년에 약 74.1개의 라면을 먹는 것으로 집계됐다. 

모든 기업인의 사업동기는 self interest

전중윤 회장이 라면사업을 시작한 동기에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는 기업이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그 목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기업가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시장에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려 든다. 그렇다면 전중윤회장은 기업의 이윤창출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결로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전중윤회장은 '박리다매’라는 전략으로 한국에서 라면시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self interest'(자기관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 경제학의 기초를 닦은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우리의 식탁을 걱정해 주는 자비심때문이 아니라, 각자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자기관심(self interest)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종종 아담스미스의 self interest를 이기심이라고 번역하는 글들을 본다. 하지만 아담스미스가 말한 self interest는 우리가 알고 있는 selfish(이기심)와는 다른 개념이다. self interest란 도덕철학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을 뜻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행복추구의 방식은 저 마다 다르다. 푸줏간 주인은 사람들에게 좋은 고기를 가능하면 남들보다 싸게 파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빵집 주인 역시 그렇다. 부(wealth)란 그러한 self interest를 가진 사람들이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 얻게 된다. 다시 말해 부자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남들보다 더 많이 제공한 대가로 소득을 얻은 사람들이다.

흔히 미국의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거나 하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런 활동도 아담스미스가 말한 self interest에 속한다.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고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중윤 회장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사회공헌’이라는 자신의 행복추구의 방법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라면을 싸게 파는 것' 이라는 self interest로 이해해야 한다. 

'라면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싸게 팔고 싶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 이러한 전중윤회장의 생각은 食足平天(식족평천) 즉, 배불리 먹어야 세상이 평화롭다라는 삼양라면의 기업이념을 창시하게 된다.

전중윤 회장의 '박리다매’라는 기업가정신

기업을 통한 사회공헌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경영을 통해서만 가능한 법이다. 아무리 좋은 동기를 갖고 사업을 한다고 해도 그 사업에서 이윤이 창출되지 못하면 어느 날 기업은 쓰러지게 된다. 그렇다면 전중윤회장은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식품사업으로서 왜 하필 라면을 선택한 것일까. 우리는 그의 선택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쌀이 부족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농지들이 많이 파괴되었던 데다, 수리시설이 부족해서 홍수나 가뭄이 흉작을 불러 오곤 했다. 반면 미국으로부터 원조식량으로 들어온 밀가루는 시중에 풍족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은 밀가루로 칼국수나 수제비등을 해 먹었다. 문제는 밀가루 반죽만을 삶아서 끓여 먹는 것으로는 한끼에 필요한 열량과 지방, 단백질을 얻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전중윤 회장은 같은 밀가루 국수 200g에 비해 기름에 튀긴 라면 한 봉지 200g이 훨씬 열량이 높고 단백질과 지방도 많이 섭취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당시 꿀꿀이 죽은 한 그릇에 5원이었고 짜장면은 40-50원이었다. 전중윤 회장은 라면의 가격을 10원으로 정했다. 서민들로서는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계산해 보니 라면 한 개에 5전이 남는 장사였다. 그렇다면 무조건 많이 팔아야만 했다. 박리다매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이라고 해도 전략이 필요한 법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고 판매할 것인가. 가격은 얼마로 할 것인가. 흥미로운 사실은 전중윤회장의 삼양라면 출시 전략이 사실은 전중윤회장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전중윤회장은 소비자의 욕구와 필요를 잘 파악한 것이다. 다시말해 전중윤 회장은 자신이 출시할 삼양라면의 가치가 생산자인 자신의 생산비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을 현명하게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라면에 대한 소비자의 효용(만족)이 가격에 따라 꿀꿀이 죽이나 짜장면보다 못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중윤 회장은 고민해야 했다. 그 결과가 바로 1개 라면을 팔아 5전을 남기는 박리다매였던 것이다.

전중윤 회장의 이러한 전략은 1963년 처음 삼양라면이 출시되었을 때 예상대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라면이라는 식품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꼬불꼬불한 모양 때문에 섬유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딱딱함 때문에 플라스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전중윤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거의 1년간 곳곳에서 무료시식을 열었다. 식품은 먹어봐야 맛을 안다. 결국 삼양라면은 이듬해부터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먹어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삼양라면은 빠르게 시장에 진출했다. 결국 전중윤 회장의 박리다매의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출시 3년 만인 1966년 11월까지 삼양라면의 누적 판매량은 240만 봉지를 넘어섰다. 특히 1969년에는 월 1,500만 봉지가 팔리는 등 명실공히 대한민국 대표 먹거리로 우뚝 섰다. 당시 급증하는 출하량을 맞추기 위해 매년 제조설비 증설에 나섰다. 1969년 엔 국내 업계 최초로 베트남 시장에 라면을 수출하면서 '라면 강국 코리아’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 삼양라면의 포스터.  

라면은 소비자가 생산한다? 소비자를 섬겨라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한 가지 경제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시장에서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은 생산자의 주관이나 생산비의 객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효용, 즉 만족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소비자 효용의 주관성’이라고 말한다. 삼양라면 한 봉지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한 비용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소비자를 궁극적인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소비자를 속이거나, 소비자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가격과 제품은 생산자가 아무리 자기 제품을 변호하더라도 시장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래서 소비자는 왕이다. 전중윤 회장이 그런 점을 잘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양라면이 출시된 2년 후에 밝혀지게 된다.

1965년, 삼양라면이 히트를 치면서 경쟁 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롯데라면을 비롯해 7종의 라면이 시중에 등장했다. 전중윤회장의 삼양라면은 시장에서 도전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중윤 회장은 잘 팔리는 삼양라면의 가격을 종전대로 10원으로 유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자장면이 40원인데 라면 값을 10원 받고 했는데 말이야. 그러면 한 개에 5전쯤 남아요. 이게 돈 될 게 뭐 있어? 자장면은 라면에 비해 원가가 4분의 1도 안 들어. 라면은 기름부터 다르고 스프에 들어가는 게 천지 차예요. 그렇기 때문에 라면은 한 개에 1원도 아니고 5전 정도 남더라니까. 그런데 여기저기서 생겨나니 말이야. 참 별일이 다 있었어. 이게 그냥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야. 나중에 그네들이 워낙 이익이 박하니까 라면값을 올리자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인상할 수 없다고 고집했어. 먹지 못하는 고통을 아느냐고 말이야. 저 사람들한테는 10원도 크고, 10원이 생명 값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격을 올리느냔 말이야. 그렇게 했더니 결국 맛이나 가격에서 우리를 당할 수 없자 점차 정리되더라고. 그때도 나로서는 위기였지. 집에 생활비도 갖다 주지 못하고 말이지….”(전중윤 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아름다운 경쟁, 삼양라면을 이겨보라

라면에 대한 인기가 늘고 수요가 늘어서 사실 가격을 올리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전중윤회장은 처음 각격 10원을 고수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라면 사업자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시장 점유율 90%대에 달하는 선도기업의 제품이 10원인데 다른 신제품들이 그 가격보다 많이 받아서는 팔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중윤회장의 전략은 한마디로 '제품과 기술로 나를 넘어서 보라’라는 진입장벽이었다.

이러한 시장전략에 대해 흔히 경제학에서는 '약탈가격’이라고 한다. 시장 점유율이 큰 기업이 일부러 낮은 가격을 유지해서 경쟁자들이 시장에 버티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시장전략은 때로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학의 설명은 다르다. 그러한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는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라면회사들이 삼양라면의 저가정책을 이기려면 제품 차별화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비슷한 제품을 삼양라면보다 비싸게 판다면 경쟁력이 없기에 다른 라면회사들은 고급제품을 만들어 가격을 높이든지, 맛의 차별화를 시도하든지 해야만 한다. 이러할 때도 앞서 말한 '소비자의 주관적 효용’은 절대적이다. 삼양라면보다 비싼데 맛이나 품질이 그 값을 못한다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결국 7개나 되던 라면기업들은 시장에서 철수했고 롯데의 롯데라면만이 힘겹게 미미한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삼양라면과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변화가 왔다. 1971년이었다. 롯데는 삼양라면의 닭고기 수프와 차별하기 위해 '소고기라면’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했고 대히트를 쳤다. 롯데는 단숨에 삼양라면이 차지하던 95%대의 시장점유율에서 무려 25%를 얻어냈다. 이러한 결과는 롯데가 삼양라면의 저가경쟁을 제품과 기술로 극복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삼양라면과 같은 가격에서 만족할 만한 다른 라면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오늘날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롯데의 신라면의 가격은 삼양라면과 같은 750원이다. 롯데가 이처럼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맛있는 라면을 저가에 공급할 수 있는 이유도 다름아닌 삼양라면의 박리다매 정책과 경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용을 낮추면서 제품의 질과 맛을 함께 올리는 혁신이 롯데라면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전중윤회장의 저가유지 경쟁은 궁극적으로 소비자의 후생을 감소시켰다기 보다는 증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 삼양라면 제품 모습  

삼양라면이 공익과 사익을 조화시켰던 방법

전중윤회장이 비록 삼양라면의 저가 전략을 공익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전략은 삼양라면의 가격 경쟁력을 유지해 소비자 선택의 이탈을 막으려는 사익적 관점이 본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점에서는 이기적일 수 있다. 다른 사업자의 시장참여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참여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삼양라면보다 싸고 맛과 질이 좋은 라면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한다면 소비자가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삼양라면보다 고급제품을 만들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시장에 경쟁자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선도기업의 프리미엄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행동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소비자들에게는 이익이었다. 특히 서민들로서는 라면의 가격이 오르지 않고도 더 자주 사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라면이 잘 팔린다고 해서 제 값을 못하는 엉터리 라면들이 시장에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익의 추구가 공익의 조화를 만든다'는 아담스미스의 성찰은 삼양라면의 경쟁전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삼양라면으로부터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삼양라면은 1963년 출시로부터 1971년 롯데의 소고기라면이 히트하기 전까지, 사실상 라면의 독과점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장점유율은 90%대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흔히 독점이론에서 기업은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을 제한하고, 가격을 올리며 질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양라면에서 그러한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삼양라면은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컵라면과 같은 신제품 개발에도 최초를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독점이란 진입이 자유로운 자유경쟁 시장에서는 성립하지 못한다. 만일 정부가 라면시장을 규제해서 몇 개의 회사만이 라면을 제조할 수 있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기업들은 시장진입에 장벽이 생겼으므로 자신들끼리 경쟁한 후에 1등 기업만이 살아남아서 독점의 폐해를 소비자에게 남겼을 것이다. 라면 시장에 누구나 뛰어 들 수 있는 자유시장 경쟁의 원리가 존재했다는 점은 우리가 오늘 저렴하고 다양한 라면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게 된 배경이다.

동시에 라면과 칼국수, 라면과 꿀꿀이죽처럼 대체재가 존재하는 경우, 독점기업은 사실상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삼양라면은 비록 라면의 독과점기업이었지만 가능한 많이 팔기 위해 가격을 저가에 묶고 신제품을 개발하며, 기존 제품의 질을 높이는 작업을 지속했다. 90년대 전반까지 라면사업에는 특별한 규제가 없었다. 누구나 라면사업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기에 삼양라면은 점유율 90%이상인 상태에서도 소비자로부터 더 많은 선택을 받기 위해 소비자 효용을 높이려 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전중윤회장이 시장원리에 충실한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만하지 않고 겸손했으며 항상 소비자가 왕이라고 생각했다. 전중윤회장이 '정직과 신뢰’를 기업의 모토로 삼은 이유는 여기에 다름이 아니다.

미약한 출발, 거대한 번영

물론 전중윤 회장의 라면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중윤 회장이 일본에서 라면사업을 벤치마킹해서 국내 생산을 결심했을 때 일본으로부터 라면 제조기계를 구입해 들여오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라면기계를 사올 달러였다. 당시 달러는 정부가 관리하고 있어서 아무나 구입할 수가 없었다. 라면기계 하나에 5만달러. 총 두 대를 살 10만달러를 구하기 위해 전중윤회장은 정부를 집안처럼 드나들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전중윤회장은 지인의 소개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된다.

당시 5.16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대통령과 그 측근들에게는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국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며 잡은 쿠테타 권력이었지만 군인들은 경제를 몰랐다. 김종필씨는 전중윤회장의 라면사업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당시 쌀은 귀하고 먹을 것은 부족하던 터에 밀가루는 그나마 충분해서 수제비와 칼국수같은 음식이 국민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고 있었다. 전중윤회장은 김종필씨에게 라면이 가진 장점을 설득했다고 회고록에서 말한다. 밀가루 200g으로는 얻을 수 없는 500칼로리와 18그램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을 라면 200g 한봉지로 가능하다는 말에 김종필씨는 라면 시제품을 먹어보고 두말 않고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문제는 정부에 10만달러라는 외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중윤 회장은 회고록에서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어떻게 한 국가에 라면기계 두 개 살 달러가 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가까스로 미 농무부가 지원해 주기로 한 10만달러 가운데 5만달러를 전중윤 회장에게 불하해줬다. 하지만 난리가 났다.

  
▲ 삼양식품의 홈페이지. 삼양라면을 비롯한 각종 제품들이 메인화면에 소개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실을 알고 대노했지요. 그 까짓 튀김국수 만드는 기계에 국가가 가진 달러를 쓴다는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어요. 김종필씨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 지 아주 난감해 했다면서 저희에게 털어놨더랬습니다” 전중윤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도 라면에 대한 이야기와 시식을 해보고는 적극 라면사업을 지원하기로 결심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전중윤회장이 일본에 건너가 라면기계를 사오는 과정에서 묘조식품 오쿠이 회장을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일본 기업의 입장에서 자신의 라면기술을 한국에 전수한다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묘조식품 오쿠이 회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잘나가던 보험회사 사장까지 하던 전중윤 회장은 일본에서 라면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견습공으로 일했다.

“묘조식품 오쿠이사장이라는 정말 큰 인물을 만난 덕분에 가져오게 됐는데, 그 과정도 사실 내가 양심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기술을 주기 전에 나에 대한 뒷조사를 다 하고, 내가 보험회사 사장이었다는 것도 자기들이 조사해서 알고는 깜짝 놀라. 그러고는 만나는 친구들의 됨됨이까지 전부 알아보고는 그제야 가르쳐줬어. 자기 심복인 비서실장한테도 가르쳐주지 않던 기술을 말이야.”(전중윤 회장 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묘조식품 오쿠이회장이 전중윤 회장에게 라면제조 기계와 함께 라면 기술을 전수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전중윤회장의 열정과 정직성이 크게 작용했다. 전중윤 회장이 오쿠이회장을 큰 인물로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묘조식품이 처음 라면을 개발하는 과정 역시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한 일본 기업인의 기업가 정신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은 안도 모모후쿠라는 대만계 일본 기업가에 의해 발명됐다.

1910년 대만 출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2차대전 종전 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1948년 닛신식품을 설립했다. 이렇게 해서 58년 그가 개발한 것이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 라면’이다.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안도 회장은 당시 이사장을 맡고 있던 신용조합이 도산하면서 무일푼의 신세가 됐다. 그러던 안도회장은 추운 밤 포장마차에서 길게 줄을 서 라면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할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자신의 집 마당에 창고를 개조한 3평짜리 실험실을 차려놓고 라면 개발에 매진했다. 여러차례 개발에 실패한 안도회장은 자살을 결심하고 혼자 식당에서 술을 먹던 중, 튀김을 만드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면을 기름에 튀겨 부패하지 않게 하는 '순간 유열 건조법’에 착안했고, 노력 끝에 인스턴트 라면 개발에 성공했다. 그렇게 탄생한 일본의 라면은 서민들에게 행복을 안겨줬다. 묘조식품의 오쿠이회장 역시 라면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단지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라, 인류행복에 이바지한다는 식품철학을 공유한 오쿠이회장은 전중윤회장이 갖고 있던 열정과 사명감, 그리고 기업가 정신에서 동질성을 느꼈다. 

“그 양반이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한국의 삼양식품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그래요. 은인이야. 그러더니 정말 기술자를 보내서 시설부터 첫 생산될 때까지 전부 도와줬어요. 그래서 첫 출하를 1963년 9월15일에 했어. 창업은 1961년도에 했지만 2년 만에 라면시대를 연 거야. 그러고 첫 출하 날을 우리 삼양식품 창사일로 삼고. 허허허….”

시장에는 경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기업가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경쟁적 동물적인 감각이 있지만, 그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때로는 협동이라는 이타적인 행동도 한다는 점이다.

묘조식품의 입장에서 한국에 라면 제조 기술을 전수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잠재적 경쟁자를 키운다는 위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라면시장을 세계화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삼양라면이 성공한다면 일본 묘조식품의 입장에서는 한국 시장 진출에 시장이 열린다는 점도 의미한다. 경쟁을 회피하지 않는 기업가의 정신은 전중윤회장에게도 마찬기지였다. 한국에서 라면 출시가 이뤄진 이듬해 여러 기업들이 라면 시장에 진출한 것에 대해 전중윤회장은 '환영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의중을 표현했다. 회고록에 의하면 전중윤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끼는 기업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라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라면을 즐겨 먹었다. 전회장에게 라면기계 구입 외화자금을 불하해 준 김종필 당시 정보부장도 전중윤회장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다. 이처럼 권력 실세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가진 기업인이라면 초창기 자신의 시장에 뛰어드는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정부에 로비를 해서 시장진입규제를 막고 싶은 유혹에 놓이기 쉽다. 63년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지 2년밖에 안된 시점이었고 당시 군인들은 경제에 대해 몰랐다. 만일 전중윤 회장이 군부 권력 실세들에게 '삼양라면의 박리다매로 서민들의 이익이 보장되려면 한국 최초의 삼양라면을 일정기간 지나친 경쟁으로부터 보호해 줘야 한다’고 간청했다면 통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전중윤 회장은 시장 경쟁 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박리다매 전략을 고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른 기업들이 제품과 기술력으로 도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한 삼양라면 전중윤회장의 전략은 적중했지만 한편으로는 롯데라는 경쟁자로 하여금 같은 가격에 더 나은 제품개발의 동기를 부여해 결국 성공하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삼양라면의 불행이라고 하기 어렵다. 라면 소비시장의 비약적인 확대로 인해 비록 삼양라면의 시장 점유율이 경쟁사로 인해 하락함에도 전체 판매량과 판매 이익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아름다운 경쟁’이라고 부를 만 하다. 소비자는 같은 가격에 더 만족스러운 라면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됐고, 라면시장의 확대로 인해 투자와 고용이 늘면서 일자리들이 만들어 졌다. 치열한 경쟁 결과 한국의 라면은 가격과 품질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춰 세계시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만일 정부가 삼양라면을 '서민을 위한 기업’이라는 명목으로 경쟁보호막을 쳐 주었다면, 삼양라면의 품질은 떨어졌을 것이고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인해 한국의 라면시장은 오늘날처럼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 경쟁을 받아들인 삼양라면 전중윤회장 현명했다고 볼 수 있다. 

우지파동, 무지한 공권력이 기업을 죽이다

이러한 삼양라면의 초기 성공의 역사는 그러나 1993년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우지(牛脂)라고 불리는, 라면을 튀기는 쇠기름이 '식용이 아니라 공업용 기름’이라는 검찰의 수사로 인해 삼양라면과 전중윤회장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989년 11월3일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삼양식품을 비롯한 식품 관련 5개사 대표 등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과 언론은 2등급 우지(쇠기름)를 '가공해야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공업용’이라고 몰아부쳤다.

2등급 우지는 이미 일본에서도 라면에 쓰였고 마아가린에도 쓰였던 식용이었다. 그런 식용 우지가 '공업용’으로 둔갑했던 것은 당시 우지수입으로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가 우지수입 권한을 '기계공업협회’로 이관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식품관리 규정에 의하면 쇠기름인 우지는 모두 12등급으로 분류된다. 극소량의 1등급 우지는 바로 생식이 가능하지만 가공하면 먹을 수 있는 2,3등급 우지는 '생식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은 '비식용’이라고 분류하고 있었다. 이하의 등급은 가공해도 먹기에 부적당하므로 비누나 공업용에 사용한다. 문제는 국내 언론과 수사기관 모두 이러한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2등급 우지를 공업용 우지라고 주장하며 멀쩡한 기업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삼양라면은 1993년 우지파동으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법정관리로까지 가야했다. 1000여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전중윤회장은 자신의 사재와 공장들을 팔아 부도를 막아야 했다. 40%를 넘던 시장 점유율은 5%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6년을 끈 소송에서 삼양라면은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이미 삼양라면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떨어졌다. 언론들은 초기에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탐욕에 눈먼 사악한 기업’이라고 삼양라면을 공격했다. 전중윤 회장은 80세가 넘었던 시절,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섭섭했던 것은 제 아들이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 제가 화를 낸다는 루머였습니다. 저는 매일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합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미스테리를 풀어 보려면 1993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돌이켜 봐야 한다. 1987년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 변화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흐름은 '반기업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운동을 추동했던 핵심 세력 가운데는 급진적인 이념의 운동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한국사회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노선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한 운동은 노동주의와 결합해 노조파업과 시위로 이어졌다. 자유보다는 평등의 이념이 강조되면서 기업가들은 '이기적인 자본가’로 지목되곤 했다. 분명히 어떤 기업가들은 법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고, 또 어떤 기업가들은 부도덕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업가들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기업인들 가운데는 삼양라면 전중윤회장 같은 이들이 있다. 평생 소비자만을 바라보고 정직과 신용으로 기업을 일궈온 기업가들이 과도한 반기업, 반시장, 반자본 이념에 의해 한순간에 부도덕과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했던 사건을 '삼양라면 우지 파동’이 잘 보여 준다. 언론과 심지어 국가 기관인 검찰마저 그러했던 것이다. 검찰은 심지어 삼양라면의 우지는 안전하다고 발표한 보사부의 주장마저 묵살했다.

“창피를 모르는 노태우 정권과 무지한 검찰의 정치적 합작이야. 말할 것도 없어.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고 절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아예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어. 정치적으로 맞을 일이 있었는지, 조사도 하기 전에 결과부터 언론에 흘리고, 꼭 함정수사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지. 그런데 사건을 어마어마하게 확대하니 우리는 원래 규정보다 10배나 좋은 우지를 써왔기 때문에 제품으로는 위반될 게 절대 없는데 혹시나 해서 우리가 그때까지 정제한 물건을 전부 미국에 다시 보내 분석을 의뢰했어. 97개 항목에 걸쳐 해왔는데 하나도 유해한 게 안 나와요. 그래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내 방에 써 붙인 것처럼 정직과 신용이라는 신념에 욕될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절대 무해하다는 말을 했지. 그런데도 계속 확대되고, 그러면서 검찰이나 언론이 일제히 비도덕한 기업이니 악덕기업이니 그런단 말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사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고 전율을 느꼈어요.” (전중윤회장.2009.월간중앙 인터뷰 中)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남용이 시장경제와 기업에 적용될 때, 그리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해야 할 언론이 시장경제에 포퓰리즘과 선동을 내세울 때 한 국가의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기업들은 더 이상 기업으로 활동하기 어렵게 된다. 전중윤 회장은 너무나 억울해 검찰을 상대로 소송을 낼 것도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이 국가 사정기관을 상대로 법적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더 큰 피해만 불러올 것이라 판단되어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 전중윤 회장은 80세가 넘은 나이였을 때 자신의 회한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가장 섭섭했던 것은 제 아들이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 제가 화를 낸다는 루머였습니다. 저는 매일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합니다”

  
▲ 삼양라면 홈페이지에서 소개된 삼양라면 모습 

다시 소비자가 왕이다

굴곡의 반세기를 걸어온 삼양라면과 전중윤 회장의 성공 비결은 언제나 소비자를 섬겼던 정신에 있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은 식당이나 상점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전중윤회장은 소비자 주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이를 자신의 경영이념으로 승화한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라면의 경쟁이 본격화 되었던 사업 초기에도 그는 라면 가격을 올리지 않고 기술과 제품으로 경쟁을 선언했다. 그것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소비자의 편을 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라면 가격 10원이 싸니 올리자는 업계의 제안을 저는 거부했어요. 10원이라는 돈이 기업들에게는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10원이 자신의 생명값과 같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주장하는 전중윤회장의 소비자 중심의 사고는 아름다운 경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라면 가격을 올리고 싶은 기업은 그렇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삼양라면보다 더 비싸지만 맛있고 영양가 높은 라면을 개발하는 것은 그 기업의 자유다. 전중윤 회장은 다른 기업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삼양라면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 것이 바로 아담스미스가 말한 self interst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소비자 중심의 경영을 폈던 전중윤회장은 93년 우지파동을 거쳐 97년 IMF사태를 맞아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였다. 그때 삼양라면에는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전중윤 회장이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이리저리 공장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익산공장과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삼양라면 사먹기 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강원도가 고향인 전중윤 회장은 6.25 피난 시절 익산에 머물며 끼니를 거를 때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전회장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1971년 익산에 삼양라면 공장을 설립했다. 거기서 주민들을 고용하고 교육을 시켰다. 또 지역봉사와 기부 활동도 많이 베풀었다. 익산 주민들은 그러한 삼양라면의 기업정신을 이해하고 애정을 가졌다. 그런 배경이 삼양라면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익산에서 삼양라면을 사먹자는 운동을 낳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감동스러운 사건은 2005년에 일어났다. 당시 삼양라면은 우지파동으로 이미 롯데의 농심에 크게 시장 점유율을 뺏겼고, 다른 라면들과의 경쟁속에서 이렇다 할 만한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뜬금없이 '라춘쇠’라는 이름이 적힌 삼양라면을 모으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2006.11.10.일까지다 라춘쇠’라는 식으로 적혀있는 삼양라면의 유통기한 표기는 네티즌 사이에서 '건방진 유통기한’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을 탔다. 도대체 라춘쇠라는 자가 누구이기에 유통기한을 반말로 표시한다는 건가. 라춘쇠라는 독특한 이름과 '건방진’ 유통기한 표기는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었고 라춘쇠 라면 모으기 열풍이 일었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유쾌했다. 유통기한에 표기된 '2006.11.10.일까지다’의 '다’는 다름아닌 삼양라면의 익산공장 생산시설 구별 기호였고 라춘쇠라는 주인공은 30년간 익산공장을 지키며 품질관리를 하던 대리급 직원이었다. 삼양라면이 63년 처음 출시때부터 포장지에 유통기한 표시를 했던 최초의 식품회사였다는 점과 직원 라춘쇠씨가 삼양라면의 험난한 위기속에서도 30년간 자신의 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해왔다는 점에서 그는 네티즌들의 영웅이 됐다.

네티즌들은 이 즐거운 사건을 경험하며 30년간 삼양라면을 지켜온 라춘쇠 대리를 과장으로 승진시키자는 운동을 온라인에서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은 삼양라면이 비록 시장 1위를 경쟁사에 내어 주고 비교도 안될 만큼 낮은 자리에 머물렀음에도 소비자들 사이에 깊은 사랑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직과 신용으로, 그리고 소비자들을 섬기는 정신을 소비자들이 알아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삼양라면과 전중윤회장이 반세기전에 이 땅에 심은 라면 산업의 현주소를 한번 살펴 보자.

황무지에 뿌린 씨앗, 그리고 거대한 열매들

2014년 소비자 조사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가운데 7명 이상은 1주일에 1회 이상 라면을 먹는다. 1주일에 3회 이상 라면을 먹는 사람도 15%에 달했다.

세계라면협회(WINA)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연평균 라면 섭취량은 74.1개로 전 세계 국가 중 1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라면 마니아들인 것이다. 한국의 라면은 세계 8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2014년 한류 히트 상품 베스트 10에 한국의 라면이 포함됐다.라면은 세계 인스턴트 식품 가운데 최고의 '하이테크 대박’이라는 찬사가 붙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라별로 한국의 라면을 먹는 방법이 특화돼 있다는 점이다. 롯데식품이 파악한 각국의 라면요리의 형태를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도시락 라면에 마요네즈를 풀어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홍콩인들은 한국 라면에 치즈를 넣어 먹는 것을 즐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매운 컵라면을 즐긴다는 보고도 있다.

식품 전문가들은 라면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비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모디슈머(modi-sumer)’ 즉 스스로 라면을 이렇게 저렇게 입맛에 맞춰 여러 형태로 응용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라면은 일본보다 4년 늦게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일본라면을 세계에서 당당하게 제끼고 일본라면보다 비싸게 팔려나가고 있다. 50년전 전중윤 회장에게 라면제조 기술을 전수했던 일본 묘조식품은 역으로 삼양라면을 수입해 일본에 출시해서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은 인스턴트 라면의 종주국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러한 경쟁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세계 각국의 저소득 층들은 맛있고 값싸고 영양이 담긴 라면을 통해 자신들의 식생활을 해결하고 그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할 수 있다. 한국의 라면과 일본 라면간에 경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삼양라면과 일본 묘조사의 치킨라면간에 초기 협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라면 기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중국 고사에 식족평천(食足平天), 즉 먹는 게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는 말이 있어. 중국 제왕들도 그렇게 말했고,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어느 나라 국민이나 마찬가지예요. 먹는 게 제일이야. ”

전중윤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굴지의 생명보험회사 사장에서 라면장사로 변신한 전중윤회장은 2014년 향년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가 먹을 것을 통해 사회공헌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는 자선사업가도, 사회사업가도 아닌 기업인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자신과 기업의 운명을 과감하게 소비자의 선택에 맡겼다. 늘 소비자가 자신들의 주인이었다는 생각과 이를 위해 정직과 신용을 기업의 모토로 삼아왔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라면 단기적으로 적자를 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 그런 생각은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다. 자신을 온전히 소비자에게 던지는 것이다. 동시에 시장에서 경쟁을 회피하지 않고 제품과 기술로 경쟁하던 박리다매 전략은 결국 한국의 라면산업이 일본을 넘어 국제 경쟁력을 갖게 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소비자가 왕이다.’

이 말을 시장경제 용어로 풀어보면 '생산은 언제나 소비자의 주관적 효용이 결정한다’가 된다. 전중윤 회장은 이를 깨닫고 삼양라면을 '박리다매’라는 원칙에 고정시켰다. 그렇기에 전중윤회자은 항상 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이 글은 지난해 10월 자유경제원 기업가연구회에서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이 전중윤 삼양라면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발표문이다. 자유경제원 사이트  '한국의 기업가'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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