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삼성전자와 쌍두마차 LG `구인회 포목상점`의 신화

자유경제원 / 2015-03-12 / 조회: 2,506       미디어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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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쌍두마차 LG '구인회 포목상점'의 신화"국민생활에 도움주는 기업 돼야"…한국 전자산업 견인차 역할
김영용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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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1  11: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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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걱정해 주는 것은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푼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더 끌어다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두려워 차관을 사양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외국 빚 많이 얻어 썼다가 나중에 파산한다 하지만, 그 돈 꾸어다가 잘 먹고 잘 입는 데 탕진한다면 모르거니와, 산업 일으키는 데 쏟아 붓고 열심히 키워 나가는데 왜 파산을 합니까?

해 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는 패배주의자는 결국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합니다. 빚을 얻어서라도 도전하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원자재를 생산하게 될 것이고 기술도 높아져서 세계 수준의 공업국가가 되지 않겠어요?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그 날이 오는 것을 낙으로 삼고 일합니다.”

“최근 들어 자꾸만 외국 차관들을 들여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나중에 빚더미에 올라 앉아 큰 일 내는 것 아닙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암의 답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인기다. 생산업자는 부족한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내는 게 참 애국하는 길인기라.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사업을 한 번 성공시켜보자. 그런 보람 한 번 찾아보자” 국민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연암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사업은 기회고 선점이다.” “몇 년 해서 안 된다고 문을 내릴 순 없다. 구름 뒤에 숨은 해를 생각해야 하는 기라.”개척 정신을 강조한 연암의 말이다.

  
▲ LG

구인회포목상점을 열다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1907~1969)!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연암이라는 구인회의 호는 연암이 사업의 기틀을 잡았던 부산 연지동 집터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연암은 연지동 공장 시절에 플라스틱 공업과 생활용품 사업을 본격적으로 일으켜 사업가로서의 자리를 잡았다.

초창기 한국의 자본가-기업가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연암은 토지자본을 상업자본화하여 유통 부문에 진출한 후, 이를 다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화학산업, 전자산업, 그리고 중화학 공업으로 다각화된 오늘의 LG그룹을 탄생시켰다.

연암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중앙고보 2년을 수료하고 1947년 LG화학(당시 락희화학공업사) 사장, 1953년 LG상사 사장, 1962년 금성사 사장, 1964년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대의 변천과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힘을 기르면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도전을 계속했고 사업을 하는 목적을 국리민복에 두었다. 또 팀워크와 책임 경영을 강조하면서 인화단결과 합작을 제일의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연암은 1931년 7월 부친으로부터 받은 종자돈 2000원과 동생 구철회의 자금 1800원으로 진주에 '구인회포목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장사가 잘 안 되어 500원의 손해를 본 후 고향의 토지를 담보로 동양척식회사로부터 8000원을 융자받아 포목 유통으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36년 병자년의 대홍수로 그 동안 축적했던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연암은 이후 꽤 많은 돈을 벌었는데, '대홍수 뒤에는 풍년이 들고, 그렇게 되면 혼수용 포목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옷감 등 생필품 수요가 급등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연암이 병자년 수해를 딛고 다시 일어선 것은 그가 평소 사람들과 좋은 신용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실의에 빠진 연암은 재기를 꿈꾸며 부산과 진주의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자금을 구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전부터 사귀어 온 원창약방의 주인 원준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연암은 한 장으로 정리한 사업계획서를 들고 원준옥을 찾아가 큰돈을 빌릴 수 있었다. 신용이 재기의 발판이 된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국제공항에 설치됐던 LG전자의 옥외 광고판 / LG전자 제공

깨지는 크림통

연암은 1941년 '구인회포목상점’의 간판을 내리고 '주식회사 구인상회’를 발족시키고 1945년 광복과 함께 부산에서 미군정청 승인 제1호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연암이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 화장품이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우기 직전 'Lucky Cream(樂喜크림)’을 개발·생산하고 사진 모델로는 할리우드 여배우 디아나 더빈(Deanna Durbin)을 내세웠다.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럭키크림을 본격적으로 생산했고 매출이 급증했다.

그 과정에서 '글리세린’원료가 부족하여 '글리콜’을 사용하면서 시장의 평판이 나빠져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글리세린을 확보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제조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했다. 연암은 이 때 글리콜로 만든 크림을 전량 회수함으로써 시장에서의 평판을 유지했다.

또 다른 문제는 크림통 뚜껑이 쉽게 깨지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한국에 플라스틱이란 단어조차 생소한 시절이었는데, 연암은 서울에 연구소를 차려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합성수지를 개발하여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칫솔, 비눗갑, 빗 등을 생산했고 이어서 비닐시트와 필름, PVC파이프, 비닐장판 등, 합성수지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대한민국에 플라스틱 시대를 열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1956년 반도상사를 출범시켜 종합무역상사를 발전시키는 기틀을 다졌다.

이 때 연암이 한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인기다. 생산업자는 부족한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내는 게 참 애국하는 길인기라.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사업을 한 번 성공시켜보자. 그런 보람 한 번 찾아보자.”

  
▲ ‘MWC 2014’에서 LG유플러스가 LTE-A(Advanced) 핵심기술인 향상된 업링크 콤프’ 기술을 시연하는 모습이다./LG유플러스 제공

전자산업의 시작

연암은 1950년대 후반 전기통신 시설이 상당한 수준으로 복구됨에 따라 수요가 늘어난 라디오를 비롯한 전자공업 진출을 모색했다. 연암의 전자산업 진출에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사업은 기회고 선점이다.”라는 용단으로 1959년 '금성사’를 설립하여 'Gold Star’라디오 국산화에 성공했다.

1959년 11월 국산 라디오 제1호인 이 탄생한 것이다. A는 AC(교류전기), 501은 진공관이 5개 들어간 제1호 모델을 의미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외국 제품에 대한 선호와 밀수로 말미암아 금성사는 물론 락희화학도 어려워져 금성사 존폐마저 거론됐고 보좌관들도 전자보다는 화학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연암은 “몇 년 해서 안 된다고 문을 내릴 순 없다. 구름 뒤에 숨은 해를 생각해야 하는 기라.”고 말하며 자신의 결심대로 밀고 나갔다. 이후 운 좋게도 박정희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에 힘입어 회생하고, 이를 바탕으로 종합 전기전자 공장을 지어 냉장고, 흑백TV, 에어컨, 승강기 등의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사업 기반을 다졌다.

냉장고의 조기 개발은 어찌 보면 우연이었다. 1964년 여름 금성사 구정회 회장 집의 미국산 냉장고가 고장났으나 수리를 의뢰할 곳이 없어 금성사 제작 3과의 임종염(林鍾琰) 과장에게 부탁했는데, 임과장은 공과대학 출신으로 냉장고를 완전히 분해하여 작동 원리까지 터득했다. 이를 본 연암은 아예 냉장고 개발을 지시하게 된다.

그러나 재료와 부품을 제대로 구할 수 없어 냉장고 개발은 난항에 부딪혔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연암은 “좋은 물건 만들어 내자면 어차피 선진국과 기술제휴를 해야 할거니, 외제 냉장고 하나 더 사다 놓고 모델로 삼아 만들어 보소.”라고 조언한다. 부단한 노력 끝에 1965년 4월 국산 냉장고 제1호인 이 개발되어 6,000대가 생산되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히타치(日立)와 기술제휴, 성능이 한결 개선된 냉장고의 양산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암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남이 안 하는 것을 해라. 뒤따라가지 말고, 앞서 가라. 새로운 것을 만들라.”라는 것이었다. 이후 금성사는 전화기, 선풍기, 세탁기 등을 개발·생산하여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1960년대는 연암이 화학공업의 대표 주자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다진 시기였다. 치약의 생산 시설을 증설하고 금성사가 세탁기를 개발함과 동시에 1964년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를 생산함으로써 주부들의 생활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주방용 세제인 '에이퐁’과 머리감는 데 사용하는 크림샴푸를 개발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개선했다.

  
▲ LG전자가 ‘완벽한 화질로 밝혀낸 진실’이라는 주제로 이색적인 글로벌 소셜 캠페인을 전개한다./LG전자 제공

정유산업 진출과 화학공업의 완성

연암의 화학공업은 정유산업에 진출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일상의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는 것을 간파한 연암은 칼텍스와 합작비율 50:50으로 전라남도 여수에 호남정유를 설립하고 1969년 6월 준공식을 가졌다. 지금의 여천 화학공업 단지가 연암의 미래에 대한 통찰과 추진력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상의 역정과 일화를 바탕으로 연암을 자본가-기업가-경영자에 관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자본가로서의 연암

어느 나라든지 경제 발전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다. 그리고 자본 축적은 자본가의 저축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당시 한국의 사정으로서는 토지자본이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를 상업자본으로 활용하여 모은 돈을 산업자본화하여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안정적이며 튼튼한 한국 경제의 근간을 다졌다.

여느 사업가와 마찬가지로 연암은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은 사업가였다. 연암의 이러한 생각은 이 글의 첫 문장인 “나는 한 푼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더 끌어다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두려워 차관을 사양합니까?”에 잘 나타나 있다. 자본가로서의 기능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생산요소인 원자재, 토지, 근로자와 만들어진 생산요소인 자본재가 필요하다. 제품은 이러한 생산요소를 조합하여 시간이 걸리는 생산 과정을 통해 미래에 완성된다. 중요한 점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완성된 제품을 팔아 그 동안에 투입된 생산요소에 대한 사용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토지 소유자와 근로자는 당장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품, 의복, 주택, 그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자원이 필요한데, 이러한 자원을 '현재의 자원’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이들이 소유하는 토지나 노동은 그 서비스가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미래에 완성되는 재품 생산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이를 '미래의 자원’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들에게 현재의 자원을 제공하고 이들이 소유하는 미래의 자원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바로 자본가이다. 즉 자본가는 토지 소유자와 근로자에게 현재의 자원을 제공하고 그들이 소유하는 미래의 자원을 사서 시간이 걸리는 생산 과정에 투입하여 미래에 완성되는 제품을 팔아 소득을 얻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자본가가 얻는 소득은 시간의 비용인 이자다. 물론 이러한 이자 소득은 시간이 걸리는 생산이 차질 없이 이뤄져야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 도중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미래는 불확실하고, 그러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얻는 소득은 기업가적 기능에 대한 보상이다.

요약하면 토지 소유자가 받는 지대와 근로자가 받는 임금은 바로 자본가의 저축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자원을 제공할 자본가가 없다면 경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갖출 수 없다. 즉 오늘 소비하고 남는 잉여가 있어야 저축이 되고, 이 저축이 있어야 자본이 형성될 수 있다. 자본가의 중요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연암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가들은 이처럼 자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일부 사업가들은 토지자본을 바탕으로 상업자본을, 또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만들었으며, 빈손으로 시작한 사업가들 역시 처음 성공한 사업에서 모은 자본을 축적하여 오늘날 한국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 탈바꿈시킨 사람들이다.

기업가로서의 연암

위에서 우리는 자본가가 얻는 소득인 이자는 생산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제품이 완성돼야 실현된다고 했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실한데 바로 이 불확실성이 이윤의 원천이다.

즉 자본가가 얻는 소득이 이자라면 기업가가 얻는 소득은 경험적 확률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성공적으로 떠맡은 데 대한 보상인 이윤이다. 이는 곧 기업가란 불확실한 상업 세계에서 미지(未知)의 발견되지 않은 이윤 기회를 찾아 나서는 행동인임을 의미한다. 즉 기업가는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한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불확실성 하에서 미지의 이윤 기회를 포착하여 부(富)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닌 사람이다.

여기에서 이윤 기회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이나 생산물로써 미처 채워지지 않은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능을 가진 기업가의 특성은 무엇일까? 우리의 탐구 대상인 연암에 대해 살펴보자. 물론 그러한 특성은 하나하나가 별개로 성립하는 것들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창의적이며 모험적

첫째, 기업가란 지금까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창조적이며 모험적인 사람이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해라. 뒤따라가지 말고, 앞서 가라. 새로운 것을 만들라.”는 연암의 말은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창의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가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만큼 모험적이고 투기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처음 가는 길이 모험적이어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험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한 치밀성도 갖추고 있다.

기업가와 이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기업가로 하여금 창의성과 모험심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심리적·물질적 이윤 동기이다. 이윤은 불확실성을 성공적으로 떠맡은 데 대한 보상이며, 실패의 대가는 손실이다. 돈을 벌었다는 것은 기업가가 미래의 시장 조건들과 소비자들의 욕구를 옳게 예상하여 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윤에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윤 역시 주관적이다. 따라서 기업가 자신만이 얼마의 이윤을 벌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가가 이윤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과정에서 기업가는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한 서로 다른 예상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발견되어 널리 알려진 과학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다.

기업가의 기능은 시장에서 저평가(低評價)된 생산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한 후 팔아서 이윤을 남긴다. 어떤 생산요소가 저평가되었다는 사실은 시장의 일반적 예상이 그 생산요소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인 한계가치생산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동료보다 더 예리하게 발견하고 실천한 기업가는 성공할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윤을 얻는다. 즉 생산요소의 가격이 잠재적 한계가치생산보다 더 낮게 평가되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 요소들이 더 가치 있게 배치될 곳을 예견하여 소비자들에게 더 잘 봉사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 물론 더 높은 잠재적 한계가치생산은 오로지 소비자들의 더 많은 수요로부터 발생한다.

문제는 특정 생산요소가 저평가되었다는 기업가의 사전적(事前的)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서 팔아본 연후에 사후적(事後的)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가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런 예측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면 이윤을 얻지만,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손해를 본다.

연암이 포목과 화장품 유통에서 화장품 제조에까지 이르는 길도 모두 이윤의 인도에 의한 것이다. 물론 이런 물품은 연암이 처음으로 개발하여 이윤 기회를 창출한 것은 아니지만, 물자가 태부족했던 당시에는 이윤 기회가 열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포목이나 크림이 다가올 미래에 가질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뜻하고, 이를 예리하게 통찰한 연암이 이윤 기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연암은 1937년의 대홍수나 1938년의 중일전쟁을 계기로 물자가 덜 희소한 시점에서 사서 더 희소한 시점에 팖으로써 이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회를 포착하여 행동하는 사람

둘째, 기회를 포착하여 행동하는 불굴의 의지와 강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커즈너(Kirzner)는 기업가의 속성으로서 '깨어있는(alertness)’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로스바드(Rothbard)는 이에 더하여 실제의 행동(action)을 중시했다.

1936년 병자년의 대홍수 뒤에는 풍년이 들고, 그렇게 되면 혼수용 포목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연암의 예측이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옷감 등 생필품 수요가 급등할 것이라는 예상도 기회를 포착하는 기업가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것들이다.

많은 사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산업에 진입하면서 '사업은 기회고 선점’이다.”라는 점을 강조한 연암의 말도 기회 포착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또한 “몇 년 해서 안 된다고 문을 내릴 순 없다. 구름 뒤에 숨은 해를 생각해야 하는 기라.”는 말은 잘 안 되는 전자산업을 접고 화학 산업에 매진하자는 참모들의 주장에 전자산업을 포기하지 않고 결말을 맺는 불굴의 의지와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깨지지 않는 화장품통의 뚜껑 개발을 위해 진력을 기울였던 연암이 플라스틱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그 개발에 나선 것도 화학 산업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추진하는 기업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연암이 플라스틱 제조업에 진출하고자 했을 때 임원들은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에 5억 원이라는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은 무모하고 그 동안 럭키크림으로 벌어 놓았던 돈을 몽당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의 뜻을 밀고 나갔다. “다들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살이란 눈을 크게 뜨고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눈앞의 이익만 살피거나, 어려운 일을 피하고 요령 부리며 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매사 신념을 갖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업은 남이 손대기 전에 해야 빛이 나는 법이다. 화장크림 사업도 전란 속에 키운 게 아닌가? 생산업자가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이 만들어 공급하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다.

군인들이 일선에서 싸우듯이 우리도 새로운 사업을 착실히 추진해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플라스틱 사업을 해 볼 생각이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연암의 이 말에는 기업가란 미지의 이윤 기회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며, 그 보람은 기업가가 찾는 이윤으로서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인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기업이 생존 가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전적 이윤이 양(陽)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이윤 기회의 포착은 기존의 기회에서 생기는 이윤은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어떤 기업가가 시장에서 뭔가 저평가된 요소를 발견하여 이윤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이윤 기회는 줄어들고 궁극적으로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그 사업에 참여함에 따라 저평가된 생산요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그 가격이 오르는 반면, 그러한 생산요소를 이용하여 생산한 제품의 공급이 증가하여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화장품 유통업에서 화장품과 플라스틱 제조업, 전자산업, 정유 사업에 진출한 것도 기존의 사업에서 이윤 기회가 점차 소멸되거나 소멸될 것으로 예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화장품 사업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해져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어 더 이상 블루오션이 아님을 인식한 연암은 1954년 화장품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플라스틱 사업 비중을 높여 나갔다.

이는 물론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활용하고 인화(人和)를 갖춘 데다, 시대의 변천을 통찰하고 사업을 벌이는 연암의 지도력 덕분이었다.

낙관적 성향

셋째, 낙관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미지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안해하고 사업의 성공 확률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행동하는 것을 꺼린다.

반면에 기업가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그 불확실성에 도전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성격의 소유자다. 이러한 경향은 연암의 사업 팽창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연암이 화장품 사업으로 번 돈 3억 원과 차입금 2억 원을 투자하여 한국 최초의 플라스틱 공업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콜게이트 치약을 비롯한 외국산이 판을 치던 치약 제조 분야에서도 럭키치약의 판로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연암의 낙관성은 잘 드러난다. 처음 출시된 럭키치약의 판로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실무진에게 한 연암의 말이다.

“처음부터 잘 되는 사업이 있는가? 신제품이 인정을 받으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단다. 이런 푸대접은 후발업체가 치러야 할 당연한 통과의례의 하나다. 돈을 떼여도 책임은 사장인 내가 진다. 구멍가게든 시장좌판이든 일단 3개월 외상으로 깔아라. 바닥부터 치고 올라서는 거다.”

금성사가 위기에 처하자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연암은 “무슨 일에나 시련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오.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이라는 말이 있소.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향기를 뿜는다는 말이오.

고생 안 하고 얻어지는 보물이 어디 있겠소. 금성사가 지금 불황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망할 지경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소. 지금 우리는 전자공업이라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길 없는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개척자가 된 셈이오. 가까운 시일에 고생한 보람을 얻게 될 것이니, 그 때까지 모두들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일해 주소.”

전자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세계를 돌아본 연암은 망설이는 임원들에게 특유의 낙관적인 말로 설득했다. “언제까지 PX 물건에나 의존할건가. 먼저 사업에 손을 대는 사람이 고생을 하게 마련이니 한 번 해보자. 일본의 도시바나 내셔널도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질 않았겠나.”1954년 금성사(현 LG전자)의 출발을 계기로 한국의 전자산업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쟁 지향적

넷째, 경쟁적이다. 경쟁이란 거래 당사자에게 남보다 더 매력적인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남을 이기려는 대항적 행위를 말한다. 남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지 않고서는 미처 채워지지 않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업가는 경쟁적이다.

연암의 락희화학이 화장품 업계에서 다른 사업자를 앞지르게 된 것은 품질은 높이면서 생산비를 낮추는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당시 럭키크림의 경우에는 품질을 좌우하면서 생산비의 60-70%를 차지하는 것이 향료였다.

락희화학은 대리인을 통해 마카오에서 향료를 구입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시오노 향료’에서 향료를 직접 구매함으로써 생산비를 낮추어 소비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염가로 공급하는 것이 사업가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라는 연암의 소신이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일본산 반투명크림인 <메이쇼쿠(明色)> 에 대항하여 개발한 투명크림도 미래를 예측하고 경쟁력을 갖춰가는 기업가의 경쟁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연암은 정부 수립 이후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 품질 좋은 외국산 화장품이 밀려들 것으로 예상하고 수준 높은 화장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화장품 업계가 살아남으려면 품질 향상으로 외제와 싸우는 길밖에 없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해 나갈 것인가? 열악한 품질을 개선하려면 스스로 신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는데, 우리 스스로가 전력을 다하여 신제품을 개발해야 살아남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나?

해방 직후의 혼란기라 외국에서 기술을 들여올 수도 없으니, 우리 손으로라도 기술을 개발해서 외제와 싸워야 한다.”또 콜게이트 치약을 따라잡을 목표로 우역곡절 끝에 개발한 '럭키치약’도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박하에서 추출한 '스피아민트’ 향을 첨가해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경영자로서의 연암

연암은 누구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경영자였다. 사업의 초창기에는 혈연과 지연으로 인력이 구성되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공개채용제도를 활용하여 인재중용 시대를 열었다. 평소 기업의 성패는 인재육성에 있다는 연암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했더니 남형이군. 뜨거워도 몸을 진득하게 담가야 피로가 풀리지 물만 묻히고 나가면 되겠소? 목욕하면서 나하고 얘기나 합시다.” 구내 목욕탕은 사장이 먼저 목욕하고 난 다음에 사원들이 이용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사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나가는 신입사원을 잡아 앉히며 건넨 연암의 말이었다.

“오는 사람은 다 받아들여 각자 한 몫을 하게 해야 한다. 무수한 식구들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락희의 산 자산이다.”이러한 그의 인간존중과 인화정신은 1966년에 정한 금성사의 사시(社是)에 잘 나타나 있다. “인화단결(人和團結)로 상호협조(相互協助)”가 그것이다.

금성사 25년사의 해설에 따르면 “원활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삼아 조직구성원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인간중심의 경영철학을 단적으로 표방하였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총화단결과 협동정신 함양을 경영의 기조로 삼고 있다.”

다른 2 가지 사시는 상품(商品)에 의한 사회봉사(社會奉仕), 수출(輸出)을 통한 해외진출(海外進出)”이다. 이런 연암의 성품 덕에 인화정신이 LG그룹의 기업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LG그룹과 GS그룹의 분할도 아무런 잡음 없이 이뤄질 수 있었다.

연암은 그룹의 규모가 커지자 경영 조직을 개편하여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1967년에 조직을 제품 개발, 생산, 판매를 한 데 묶어 독립적인 사업부제(事業部制)로 개편하여 생산 중심에서 시장 중심으로 경영 방향을 바꿨고, 이후 수차례 경영 조직을 개선하면서 오늘의 계열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

즉 초창기의 M-형(Multidivisional form: 다사업부서형) 구조에서 계열기업형 구조로 그룹의 모습을 재편한 것이다. 생산만 하면 잘 팔리던 1950년대와는 달리 1960년대 후반 경쟁 시대의 개막에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또한 민간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사람, 돈, 물자의 과학적 관리를 위해 전산기를 도입하여 경영의 효율화를 기했다.

근검절약의 사업가

큰돈을 번 사업가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근검절약 정신이다. 연암도 그러한 사업가였다. 친구들과 고향 음식점에서 음식 값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락희화학이 번창하고 서울의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내고 있을 때, 연암이 미니 합승버스로 출퇴근했다는 일화 역시 그의 근검절약 정신의 실천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당시 미니 합승버스로 출퇴근하던 근무하던 모 상무가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미니 합승버스를 타십니까?”라는 질문에 연암은 이와 같이 답했다.

“나는 합승버스가 좋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노랭이니 구두쇠니 부르겠지만 나는 그 말이 나를 칭찬하는 말로 들립니다. 돈 몇 푼 벌었다고 거들먹거리며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을 보면 딱해서 못 보겠습니다. 돈이야 있을 때 아낄 수 있는 것이지 없는데 무엇을 아낀단 말이요. 그래서 옛말에도 돈이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했소.

부자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아니라 쓰지 않고 저축하면서 아끼는 것이 부자가 되는 법이요. 벌써 다 왔소, 합승버스를 타면 회사까지 오는데 무엇 때문에 휘발유 없애고 길바닥에 돈 뿌리며 택시 탄다는 말이요.”

그러나 연암은 때로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 사업의 자금을 전액 부담했고, 1969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연암문화재단을 설립·운영하는 등 큰돈을 쓰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은 사업가였다. 연암의 용전철학(用錢哲學)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관용과 포용의 사업가

연암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관용하며 양보하는 사업가였다. 이러한 성품은 “남이 안 하는 일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되, 어디까지나 국민경제에 유익하고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말에 잘 녹아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사업 영역에 들어오는 것에 불쾌한 감정을 가졌지만 양보하는 편이었다. 유독 사돈 간인 호암 이병철과는 몇 번의 마찰이 있었다. 전자산업은 연암이 선점한 분야지만 나중에 호암의 삼성이 진입했다. 연암의 사업 철학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사돈이 하겠다는 일이어서 수용하고 양보했다.

이후 연암과 호암이 방송 사업에 함께 참여했지만 결국 텔레비전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모두 호암에게 양보했다.

“상대방은 남이 아닌 사돈. 양쪽 가문 사이에 태어난 손자들을 생각하면 두 사람 중 누군가가 깨끗이 물러나는 수밖에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지. 만사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이 아니고 뭐겠나.”

인화를 중요시했던 연암의 성품이 잘 드러난 일이다. 연암은 남의 영역에 뛰어들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상도의(商道義) 철학을 견지했다. 물론 이러한 상도의 원칙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어쨌든 연암은 그런 철학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LG전자와 삼성전자 간의 경쟁으로 한국의 전자산업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점이다.

한국경제 도약을 위한 기업가 정신의 제고

연암을 비롯한 기업가들의 덕분에 한국경제는 비약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도약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모두 우리 곁을 떠났다. 새로운 도약이란 바로 새로운 기회의 발견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 세계 일류의 반열에 오른 오늘의 한국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후발 주자였던 한국의 기업들은 캐치업(catch up)을 통해 시장에 존재했던 이윤 기회를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우뚝 선 지금에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윤 기회를 발견해야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

연암이 살았던 시절과는 매우 다른 환경이지만, 새로운 도약을 꿈꾸기 위해서 한국의 사업가들이 넘어야 할 산이다. /김영용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기업가연구회에서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한 'LG그룹의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회장'에 대한 연구 발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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