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좌파수단인 괴담, 거짓,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적`이다

자유경제원 / 2015-03-25 / 조회: 2,239       미디어펜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인구가 많은 나라도, 영토가 넓은 나라도 아니다. 이런 조건들은 생존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21세기 국가의 생존은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전적으로 그 나라의 민도(民度)에 달려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민주주의로 번역되고 있는 'democracy’는 그리스적 어원을 살펴보면, 한 지역의 모든 '시민(demos)’의 '지배(kratos)’를 의미하므로 '민주정(民主政)’으로 부르는 것이 원래 옳다.

그런데 유가(儒家)의 성인통치체제의 취약점이 통치의 주체인 군주가 성군(聖君)이 아니라 폭군(暴君)이나 우군(愚君)일 가능성에 있듯이, 민주주의의 취약점은 통치의 주체인 국민이 공민(公民)이 아니라 폭민(暴民)이거나 우민(愚民)일 가능성에 있다.

  
▲ 'democracy’는 '민주정(民主政)’으로 부르는 것이 원래 옳다. /사진=연합뉴스

보편민주주의 자체는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범위(보편)와 방식(다수결)을 규정할 뿐이므로, 히틀러와 같은 선동가의 회유와 협박에 의해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는 헌법의 가치를 명문화하였다.

그것이 바로 통진당 해산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개념이다. 즉 민주주의는 시민적 자유의 핵심인 자유주의와 결합되어야 하며, 이 결합은 다수의 국민이 원한다고 해서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우중이나 폭민의, 한 마디로 천민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하자마자 보편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군주정이었던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끝나고 곧바로 도입된 보편민주주의는 인프라의 부족으로 인해 그 온전한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특히 건국 2년째에 일어난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대략 자유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인프라를 요구한다:

1)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도입과 그 정당성에 대한 이해
2) 주권과 정체성을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체제전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보능력
3) 극단적 주장과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높은 국민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
4) 도덕적 규범과 법에 대한 국민과 정치인의 존중
5) 정치를 사적 이해의 추구가 아니라 공적 영역(res publica)으로 인식하는 공화정신
6)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과 전문 영역에서 권위 있는 지식의 존재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 지나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건국초기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중에서 온전히 갖춘 것은 제헌헌법의 도입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소련과 중국의 사주에 의해 김일성이 도발한 6・25전쟁은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을 경우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국민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적인 통치수단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명백하게 민주적 원칙과 부합할 수 없지만, 6・25전쟁과 북한의 체제위협이라는 시대상황은 반공주의를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일정부분 권위주의 통치를 요구하였다.

다른 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이 토지개혁을 통해 자영농의 기초를 마련하고, 부족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교육투자는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 구축에 기여한 그의 공적이다. 4・19 학생혁명의 주체는 이승만의 교육투자로 인해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배운 신세대였다.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의 집중을 통한 압축 성장정책을 국가발전 방향으로 선택하면서, 당연히 불거질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만을 권위주의 통치와 헌법 개정을 통해 억누르고, 산업화와 중산층 육성을 통해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기를 잡게 되었다.

당시 권위주의 통치가 가능했던 배경은 남북 간에 계속되었던 체제경쟁과 함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통치자와 국민의 의지’가 시대의 아젠다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그가 육성했던 중산층의 저항이었던 부마(釜馬)사태의 후과로 시해(弑害)됨으로써 권력으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늦어도 1980년대 초에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은 잘 먹고 사는 것과 함께 자유롭게 말하며 살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라는 권위주의 통치 기간 중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를 마련하였다. 대한민국은 건국 후 불과 40년 만에 자유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하여 보편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그것은 군주정으로부터 수백 년에 걸쳐 산업혁명과 보편민주주의로 이동한 서양의 근대역사의 압축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피기를 기원하고 노력하고 희생한 세력의 공헌이 컸음을 인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단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한국의 압축적 발전 역사는 그 이중성에 대한 직시(直視) 없이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권력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의 온전한 실현을 자유민주주의의 척도라고 본다면, 한국은 이제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아직도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고 주장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권력’이라고 하면 우선 청와대의 실력자, 장관, 국회의원, 공무원 그리고 '공권력’이라고 부르던 검찰, 경찰, 정보부, 보안사 등의 기관과 여기에 근무하는 개인들을 의미하였다.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기관들과 개인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는 한국인의 뇌리에 동의어로 깊이 각인되었다.

  
▲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한국 좌파의 사실 왜곡과 선동 그리고 포퓰리즘 뿐 아니라, 좌우를 막론하고 관찰되는 언론 전반의 권력화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부터 위협받게 되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민주화가 된 이후 한국에서 권력도 민주화 되었다. 경찰, 군민정보기관이 시민적 자유를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경우는 사실상 사라졌다. 몇몇 철딱서니 없는 검사와 판사의 막말이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그것은 대부분 개인의 부족한 자질이 그들의 권한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일탈이다.

차라리 취한이 경찰 지구대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시위대가 죽창과 새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기동대를 공격하는 것이 더 일반화된 상황이다. 권력기관 내의 일사불란한 네트워크와 상명하복도 합리화되었다.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경우처럼 사실을 날조하여 상관의 옷을 벗기고 야당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청와대의 실력자와 장관들, 그리고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은 그들이 부여 받은 권한으로 인해 '권력’을 갖고 있고 또 '김영란 법’의 제정이 말해주듯 부패 역시 척결되어야 할 문제임이 틀림없지만, 이들이 개인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시민적 자유를 훼손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럴 경우 여론과 언론의 집중적 질타를 받게 되어 이들의 정치적・사회적 생존은 크게 훼손된다. 여성 아나운서를 모욕하였다고 하여, 나중에 무죄로 판단되었지만, 국회의원직을 물러나야만 했던 강용석 전의원의 경우와, 대리기사에게 폭언을 하고 세월호 유가족의 폭행을 방조한 김현 의원의 경우가 이점을 말해준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권력은 대중의 집중 혹은 집단화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민주화와 정보화 이후, 정치와 경제, 문화와 언론에서 힘의 향방은 투표와 클릭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정당, 매스미디어와 광고회사에 의한 세뇌 대상으로서 객체이기도 하지만, 1인1표를 통한 권력창출의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민도가 충분히 높지 않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세뇌와 조작대상으로서 정치・경제의 주체라는 이중적 존재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1920년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제트는 대중사회 비판서인 『대중의 반역』을 썼다. 대공황이 오기 직전에 쓴 이 책은 대중사회의 타락한 형태로서 히틀러 파시즘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중의 반역’이라는 제목은 적절하지 않다.

과거 권력층은 개인으로서 권력을 남용하였지만, 이제 대중들은 집중과 집단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대중은 권력을 지향하는 개인과 기관의 조작과 선동의 대상이다. 그 결과는 선동과 괴담, 음모론과 거짓의 난무이며, 대중은 집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권력을 일부 '특권층’, '권력층’이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대중선동 집단: 한국의 좌파

민주화 이후 조작의 대상이자 권력창출의 주체인 대중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 권력추구 개인과 집단이 움직이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른바 표심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중을 '권력으로부터 탄압받고 착취 받는 약자집단’이라고 가정하는 한국의 좌파는 각종 괴담과 거짓을 마구 뿌려대고 있다. 혹자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의 각종 북풍을 예를 들면서 우파 역시 거짓을 여론조작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전국적인 규모에서 괴담비지니스를 줄기차게 시도해 온 것은 명백하게 한국의 좌파였다. 김대업, 천안함, 광우병, 의료민영화, 희망버스 등등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의 좌파 정당과 시민단체는 광우병 촛불시위를 통해 대중선동으로 정권을 약화시키고 사회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이 약자이자 선이며, 권력과 특권, 지배층에 의해 이 약자가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스토리텔링을 전파한다.

그리고 대중이 이런 선동 스토리를 믿고 궐기하는 것을 이른바 '집단지성’의 발로라고 부추긴다. 실제로 이 선동의 대상인 대중은 개별적으로는 권력이나 돈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동자들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중사회에서 이런 선동은 히틀러 시대와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 대공황이 유럽과 독일을 강타하자 고통 받는 실업자, 제대군인 등을 배타적 민족주의와 특정집단에 대한 증오로 선동하였다. 이때 공격의 대상은 국제금융을 장악하여 독일인에게 고통을 가져왔다고 주장된 유태인이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의 의미가 '민족사회주의당’이고 히틀러가 집권 후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보다는 독일민족주의와 전쟁에 몰두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파보다 좌파가 대중을 권력창출의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대중사회에서 대중이 권력창출의 소스이자 동시에 조작의 대상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서 '교양사회’로 나아가야 하며 그 핵심은 민도의 고양에 있다. /사진=연합뉴스

현대 한국에서도 상황은 매우 흡사하다. 한국의 좌파는 정권을 잡거나 사회의 분위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몇몇 공격목표를 선정한다. 이후 대중이 바로 이 공격목표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사실을 왜곡하면서 선동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마치 대통령이 이 참사의 직접적 책임자인 것처럼 여론을 몰고 갔다. 그리고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은 수많은 거짓을 유포하였다. 다이빙 벨 보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현재 툭하면 성행하는 괴담비지니스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선동이 모두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로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사상의 자유에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기에, 형식적으로 이런 괴담을 '표현의 자유’라고 포장하는 데에 반론을 제기할 방법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들은 사상의 자유가 원래 평등한 대화상황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즉 괴담과 거짓, 선동과 왜곡에 의해 피해 받는 자가 언론의 횡포에 대항할 길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 즉 현대사회에서 언론과 시민 간의 관계가 결코 대등하지 않다는 점을 보려하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언론들과 정부 간의 관계도 대등하지 않다. 언론이 훨씬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남용하는 자들은 이런 자유를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당연시 한다.

천민민주주의의 새로운 양상

괴담과 거짓 그리고 포퓰리즘은 한국의 좌파가 집단화된 대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회의 주도권과 정권쟁취를 하려는 '기본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과거에 권력층에게 줄을 대고 뇌물을 주어 목적을 쟁취하려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다만 그 뇌물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이거나 국민이 갚아야 할 빚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국회의원 선거만 되면 나오는 대형건설공약은 사실상 세금으로 표를 사는 매표(買票)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돈을 주거나 밥을 사는 것이 엄격히 통제되지만, 이처럼 대통령・국회의원 후보자들이 뿌리는 대형건설공약과 복지공약은 훨씬 후유증이 심한 뇌물임에도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매표행위가 상대후보와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실상 도박장의 베팅처럼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새만금 간척사업이나 세종시 모두 극심한 부작용을 갖고 왔지만, 정치가나 해당 지역의 유권자는 이런 사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대중선동과 기만의 무도장에 또 다른 선수가 등장하였다. 바로 주류 언론이다. 얼마 전, 한국의 언론 '전부’가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보도행태이다.

2013년 5월에 이 사건이 일어나자 한국의 전 언론은 확인된 사실이건 확인되지 않았건 어마어마한 양의 기사를 쏟아냈다. 심지어 윤 전 대변인의 집 문에 고성능 마이크를 장착하여 집안 내부의 소리를 녹음하는 일까지도 일어났다. 그러나 사건 발생 거의 2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검찰은 아직도 이 사건을 기소하지 않았으며,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기사를 쓴 기자들의 그 놀라운 '도덕적 위세’이다. 좌파 언론의 그 도덕적 위세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자아도취보다 그래도 사실보도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주류언론이 윤창중 사건에서 보인 태도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그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왜곡과 과장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풀어놓듯 행동하였다.

  
▲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정치의 주체인 국민의 수준에 달려있으며, 이 길은 아직 전인미답(前人未踏)이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정부에 들어 언론의 행태는 점점 더 과격해져 갔다. 윤진숙 전 해수부 장관을 YTN의 한 사진기자가 캡션조작으로 해고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문창극 전 총리후보에 대하여 KBS는 영상발췌와 캡션을 이용하여 친일파 뒤집어씌우기를 했다.

세월호 참사에 이르러는 언론의 보도 태도와 내용은 그 자체가 폭력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른바 청와대 십상시(十常侍) 의혹 보도에서는 드디어 언론이 '사실과 거짓’의 대결에서 공개적으로 거짓의 편을 들기 시작하였다.

즉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것이 주류언론의 보도태도였다. 그 결과 현재 한국에서 언론은 '언론의 자유’라는 깃발을 달고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권력기관이나 다름없다. 언론의 이런 행태에 깔린 정서 역시 도덕적 위세이다: 정의로운 사실 왜곡과 선동!

이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한국 좌파의 사실 왜곡과 선동 그리고 포퓰리즘 뿐 아니라, 좌우를 막론하고 관찰되는 언론 전반의 권력화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부터 위협받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선동, 왜곡이라는 변태가 되어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를 침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거짓과 정치(독일 쥐트도이췌차이퉁 3.14일 기사제목)’의 결합, 음모론과 괴담의 난무와 일치하지만, 한국의 경우 그 정도가 극히 심해졌다. 독일에서는 이런 언론을 '거짓말언론(Lügenpresse)’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그런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부른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인이 가야할 길은 결코 권위주의의 귀환이 아니다. 권위주의의 그림자라도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으로 기다리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있다. 바로 선동 전문가들이다.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서 '교양사회’로 나아가야 하며 그 핵심은 민도의 고양에 있다.

개과천선이 가능한 언론들이라면 MBC처럼 사실 보도에 충실하도록 유도하고, 지식인은 좌우의 이념을 넘어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광우병 촛불시위에 참가했지만 자신들이 정당-언론-시민단체-일부 지식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대중들과 함께 선동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을 갖추어야 한다.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정치의 주체인 국민의 수준에 달려있으며, 이 길은 아직 전인미답(前人未踏)이다. /홍성기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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