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이건희회장 경영DNA, 스피드경영, 위기경영

자유경제원 / 2015-04-06 / 조회: 2,643       미디어펜

삼성은 과거 '패스트 팔로워'였다. 세계1등기업을 따라가는 데 전력투구했다. 반도체와 TV 냉장고 세탁기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은 미국과 일본기업을 추격하는데 분투했다. 그리고 정상에 올랐다. 이병철회장과 이건희회장 이재용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오너경영이 빛을 발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혁신과 공격경영, 차별화전략 등으로 세계IT기업 정상에 우뚝 섰다. 이제 삼성은 퍼스트 무버가 됐다. 삼성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을 중국 등 후발국기업들이 추격중이다. 삼성은 이제 이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더 멀리 가야 한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창조적 파괴를 해야 한다. 세계 전자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세계최고의 IT기업을 일군 이건희회장의 경영DNA는 무엇인가? 이회장은 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독일과 일본 등지를 순회하면 임원들을 불러놓고 양떼기경영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제 질경영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양경영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수빈 비서실장의 주장에 격노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직도 내말을 못알아듣는다"고 했다. 한국기업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 혁명적인 연설이었다.

세계최고의 천재경영자의 사자후는 삼성을 바꿨다. 싸구려 양떼기경영이 지양됐다. 최고의 품질을 갖춘 삼성으로 거듭났다. 일본 소니 파나소닉 등 난공불락의 일본전자업체를 차례로 제쳤다. 이젠 글로벌 전자업체1위를 달리고 있다. 미국 애플과 스마트폰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건희회장은 지금 와병중이다.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있다. 이회장이 이룩한 경영업적은 경이롭다. 세계경영학계에서 가장 연구될만한 성과를 거뒀다. 그가 이룩한 스피드경영과 위기경영은 한국기업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한국경제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됐다.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지난해부터 기업가연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데 기여한 기업가들을 연구하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교수가 이건희 회장을 연구, 분석하는 몫을 맡았다. 자유경제원은 기업가연구를 마무리한 후 책을 낼 예정이다. 전국 대학을 순회하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관점에서 기업가들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한국경제를 도약시킨 기업가들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원류를 찾는 행사다. 한국의 경제도약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원칙에 투철했던 기업가들이 일군 것이라는 점을 널리 알릴 예정이다.

조동근 교수가 분석한 삼성 이건희회장론을 전재한다. (편집자주) 

   
▲ 조동근 명지대 교수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6월 7일 “처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는 화두로 승부수를 띄었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1987년 그룹회장에 올라 '제 2의 창업’을 선언한지 6년만의 변신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을 '말기 암환자’에 비유했다. '신(新)경영’은 기존 경영관행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 '양 중심의 경영’을 버리고 '질 중심의 신경영’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경영혁신을 단행했다.

2003년 '신경영 10주년’ 기념 모임석상에서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안 했으면 삼성이 이류, 삼류로 전락했거나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고 말했다.

1993년은 김영삼 정부 1년차로 경기부진에 시달렸다. 당시 박재윤 경제수석은 '신경제 100일’을 수립했다. 초단기 경기 부양에 나선 것이다. 문제의식의 시상(time horizon)은 그만큼 짧았다. 누구도 5년 후 IMF외환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 IMF위기는 삼성전자에도 찾아왔다. 삼성전자가 IMF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신경영’ 덕분이었다. 삼성전자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2000년대 들어서는 스스로를 초일류 기업 반열에 위치(positioning)시킬 수 있었다.

신경영이 선언된 1993년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이자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세계화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그는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초일류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고, 환골탈태하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질(質) 경영’이라는 실천적 메시지를 던졌다. “3만 명이 제품을 만들고 6천명이 사후관리(After service)를 해서 무슨 경쟁력이 있겠냐”고 삼성전자를 질타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왜 프랑크푸프트에서 신경영을 선포했을 가. 프랑크푸르트는 '라인강 기적’의 진원지이다. 그리고 1993년은 EU출범을 앞둔 시기였다. '기적’과 유럽시장 공략을 위한 '전초지’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일본을 굳이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은 벤치마크(benchmark) 대상이자 경쟁대상자이면서 종국적으로는 극복 대상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일류기업으로서의 내공을 쌓을 때 까진 최대한 숨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경영 선언은 시기적으로도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건희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는 삼성의 신경영 전략은 1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삼성은 D램·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모니터 등 19개 제품을 세계 1등으로 만들었고 휴대전화 애니콜을 세계 '톱3’로 끌어올리는 등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아울러 세계 34위 브랜드 기업(83억 달러)으로 성장해 국가 이미지 제고에 일조했다. 삼성이 수출·생산·상장주식 시가총액 등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육박했다. 매출액은 경상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기록했다.

그룹 재무구조도 크게 개선됐다. 부채비율은 93년 291%에서 2002년 68%로 낮아졌다. 신경영 10년의 성과는 <표-1>에 요약되어 있다.

신경영은 그룹 내 '삼각편대식’ 역할분담을 통해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어젠더(agenda 비전) 제시와 기획 그리고 실행”의 삼각 역할분담 구조가 그것이다. 아젠다 제시는 이건희 회장이, 그룹차원의 실행계획 마련은 구조조정본부가, 현장에서의 실천은 계열사가 담당함으로써 실행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신경영에 대한 논리개발과 이론화 작업을, 삼성인력개발원은 교육프로그램을 통한 신경영의 기업문화 확산을 담당했다. 이로써 “비전-전략-실행”이 정열 되었으며 신경영에 대한 기업문화가 구성원 간에 '공유’될 수 있었다.

시장선도전략(MDS, market driven strategy)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꾀한 것도 주효했다. 1998년 당시 구조본이 진단한 삼성브랜드의 이미지는 “저가, 저품질, 모방” 등으로 브랜드 파워는 진공상태였다. 삼성전자는 후발주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견(先見), 선수(先手), 선제(先制), 선점(先占)’으로 요약되는 사업전략을 펼쳤다.

한마디로 “시장변화를 먼저 보고, 경쟁사보다 한발 먼저 움직여, 경쟁사를 제압해 시장을 먼저 차지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실제, 휴대전화, 디지털 TV, DVD 플레이어 등 시장이 원하는 기능과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경쟁사보다 빨리 시장에 출시해 '제값 받기’에 나섰다. '고품질·고가전략’을 통해 물량떼기 기업의 이미지를 벗고 '디지털기업’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삼성전자의 다각화 전략도 일조했다. 1997년~1998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의 전문가와 정책당국은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의거, 주력산업인 메모리반도체 이외의 사업을 정리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기업의 무분별한 문어발 경영이 IMF외환위기를 가져온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반도체, 휴대전화, 디지털미디어, 가전 등 각 사업을 고루 갖추는 '수직계열 및 다각화 전략’을 선택했다.

다양한 사업부문으로 이익구조를 분산시킨 다각화 전략은 불황기에 진가를 발휘했다. 디지털·가전과 휴대전화가 반도체 경기침체(2001년) 때 완충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2001년에 D램 업계 2위인 미국의 마이크론은 5분기 연속적자를 기록했으며, 마쓰시다, 도시바, NEC등 일본의 종합전기, 전자회사들도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이 같은 사업다각화는 완충을 넘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반도체, 통신, 가전, 컴퓨터, 디스플레이를 모두 구비한 기업은 삼성전자 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디지털 제품들이 융합하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이 같은 관련 다각화 전략의 초석은 1988년 이건희 회장이 주도한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통신의 합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성전자 경영의 DNA는 '속도경영’과 '위기경영’이다

삼성전자의 별칭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다. 이미 형성된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선두주자를 따라잡는 방식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다. 후발자가 추격할 때, 선두주자는 놀고 있지 않는다. 후발주자의 추격이 그 만큼 쉽지 않은 이유다. 수많은 기업들도 추격에 나섰지만 삼성전자만큼 성공한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추격의 비밀은 당연히 '속도’다. 이병철과 이건희 회장은 모두 속도의 광신도들이었다. 속도경영은 삼성의 DNA였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속도경영의 신화는 1983년에 시작됐다.

   
▲ 이건희 삼성회장의 경영DNA는 스피드경영과 위기경영이다. 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양떼기경영을 질경영 품질경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삼성은 이제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무버가 됐다. 애플과 샤오미 등 세계IT기업과의 전쟁에서 경쟁력우위를 확보하기위한 삼성의 혁신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제2의 혁신은 이제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속도경영의 진수

1983년 어느 날. 이병철 선대회장은 삼성석유화학 한 임원을 호출했다. “자네가 기흥반도체 건설본부장을 맡아주게, 6개월 시간을 줄 테니 반도체 공장을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무리한 지시였다.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는 선진국에서도 1년6개월은 족히 걸린다. 더군다나 삼성은 반도체공장을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무모한 지시를 내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83년은 64K D램이 없어서 못 팔 때였다. 이왕 반도체시장에 진출하기로 한 만큼 “호황이 끝나기 전에 진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무자들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병철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모든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의 용어를 빌리면 일종의 '동기화(同期化) 전략’인 것이다. 지금은 스마트 기기의 보급으로 '동기화’란 개념이 쉽게 와 닿지만 당시는 1983년이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었다.

통상적으로 건설공사는 릴레이처럼 진행된다. 한 공정이 끝나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삼성의 선택은 '모든 공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었다. 손발을 맞추면 공사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기공식 직후 전쟁이 시작됐다. 라인과 골조공사가 시작됐다. 전기와 물 공급을 위한 공사도 동시에 들어갔다. 이는 하드웨어 건설과 관련된 공기단축이다. 이병철 회장의 또 다른 승부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엔지니어를 미리 추렸다. 그리고 설비를 담당할 사람을 차출해 이들을 설비 발주처로 파견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설비업체 현장에서 제작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들은 이미 훌륭한 설비 엔지니어로 변해 있었다. 장비 설치부터 테스트, 응급처치까지 이들에게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 없었다. 최소한 수개월은 단축했다. 한편 안정된 전기를 공급받기 위해 기흥공장만을 위한 철탑이 세워졌다. 용수문제는 수원공장의 물을 파이프로 끌어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포장된 도로를 통과할 수 없는 특수장비를 들여오기 위해 하루 만에 4km의 포장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포장된 도로가 빨리 마르도록 거대한 선풍기를 동원했다. 감히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본의 거함들을 침몰시킨 삼성 반도체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속도의 승리였다.

지도자는 직관에 기초한 선견지명을 가져야 한다. 선견지명은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1997)>의 저자인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클레이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행하게도 신(神)은 데이터를 오로지 과거를 분석하는 데만 유효하게 창조했다. 미래를 보는 데이터는 없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분석을 끝내고 의사 결정을 내릴 때쯤이면 이미 세상은 변했다. 데이터 없이 의사결정을 하려면 완벽한 직관력을 가진 리더를 가지고 있든지,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최고 경영자는 '데이터 중독’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이다. 데이터는 아무리 분석을 잘해도 그저 과거의 지표일 뿐이다. 직관력을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1987년 2월 기흥에 반도체 3라인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임원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임원들이 3라인 건설을 반대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985년부터 진행된 일본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반도체 가격이 급락했고 1986년에는 불황까지 닥쳤다. 이 여파로 반도체 시장을 지배해온 미국 업체들의 D램 생산 중단이 속출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1, 2라인 투자 회수는 엄두도 못 냈고 누적 적자는 2000억원에 달했다. 삼성그룹 전체 계열사의 모든 이익을 쏟아 부어야 겨우 반도체 손실을 메꿀 수 있었다, 반도체 때문에 삼성그룹이 위험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선대 회장은 “최고의 기회가 오고 있다”고 재촉했다. 결국 지시를 내린 지 6개월이 지난 8월에야 착공에 들어갔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1987년 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반도체 경기가 상승세로 급반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황으로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투자를 중단했고 미국 D램 업체들이 이미 사업에서 손을 떼 공백이 생긴 탓이다. 삼성전자는 1, 2라인을 완전 가동해도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반도체 호황을 보지 못한 채 1987년 12월 별세했다. 그리고 제 3라인은 1988년 10월에 완공됐다. 그렇다면 불황기에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얘기는 1986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장은 어느 날 반도체 3라인 투자를 검토하던 팀과 만나 "돈 걱정 말고 서둘러라. 미국의 보복이 생각보다 빨라질 것 같아"라고 말했다.

당시 팀원들은 '미국의 보복’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이 회장은 3라인 팀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오늘 신문 봤습니까.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일본에 대한 무역제재가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보복은 '무역제재’였던 것이다. 선대회장은 미국과 일본의 무역마찰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1988년에 예견은 적중됐다. 1987년 2달러에 미치지 못했던 256K D램 가격은 4달러를 넘어섰다. 미국의 압력으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을 25% 감축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반도체를 들고 시장을 떠돌던 삼성전자 영업맨들에게 브로커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삼성에 "얼마면 됩니까. 가격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대신 원하는 수량만큼 팔아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삼성은 1988년 그동안 투자한 비용과 설비에 대한 감가상각을 처리하고도 32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3라인은 삼성을 도약시켰고 세계 반도체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만약 3라인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삼성전자는 누적손실로 재기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삼성전자 부실은 삼성그룹 전체의 부실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계열사 부당 지원이라는 '배임’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제3라인은 삼성그룹 전체의 명운을 가른 기적 같은 경영판단이었던 것이다.

반도체 사업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작품으로 인식된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회장 생존시 조력자였다. 하지만 선대회장 사후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더 속도를 냈다. 반도체는 전형적인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시장을 선점하는 쪽이 이기게 돼있다. 일종의 치킨게임이다.

통상적으로 일본 업체들은 경기침체기에 투자를 줄였다. '고용된 사장’이었기에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반대로 움직였다. 경기회복기를 대비해 오히려 공격적 투자에 나섰다. 설비가격이 싸지는 경기 침체기를 투자 확대 기회로 적극 활용한 것이다. 경기회복기에 투자를 늘린 일본 업체들은 제품이 생산될 쯤에는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떨어져 채산성이 악화되었다. '오너(ower)’의 결단이 진수를 발휘한 것이다. 오너는 '직관에 기초한 선경지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의 고수익 구조는 이렇게 창출됐다.

삼성이 소니를 압도한 '분기점’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진이 남아 있던 2009년이다. 2009년 3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4조2300억원)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주요 9개 업체의 같은 기간 영업이익을 모두 합한 것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일본기업의 패배는 '기술력’이 아닌 '경영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성의 성공은 장치산업의 특성을 꿰뚫은 '기업가정신’의 승리였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위기 경영’

이건희 회장은 '위기론’을 제기해 경영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2003년 신경영 10주년 기념식에서 “지금 잘나가기 때문에 과거와 단절하기 어렵고 자만해 변신의 기회를 놓칠까 두렵다”고 말한다. 2004년 삼성이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리자 이 회장은 2005년 신년사를 통해 "우리는 오르기는 어려우나 떨어지기는 쉬운 정상의 발치에 있다. 이 순간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하고 힘을 모으면 정상을 밟을 수 있지만, 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산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며 늘 예의 경고를 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40년 주년(2009. 10. 30) 기념 발간사를 통해서 같은 위기경영론을 펴고 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40년 역사에 대해 "국가 전략산업의 역사이자 세계 전자산업의 판도를 바꾼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우리의 꿈은 원대했으며 이는 도전과 창조의 역사였다"는 말을 덧붙여, 창립 40년 만에 글로벌 톱 기업의 반열에 오른 것에 대한 감회를 피력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길은 더욱 험난할 것이라는 경계도 잊지 않았다. "산업의 주도권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미국에서 시작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머지않아 다른 나라로 가게 될 것이다. 삼성전자의 도전은 멈춰서는 안 된다. 자만과 안일에 빠지면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회장 시절부터의 경영현안으로 기소(起訴)된다. 그는 2010년 3월 24일 회장직에 복귀한다. 복귀의 일성은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10년 안에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삼성전자는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선두에 서 있다”며 “이 험난한 여정을 극복하고 초일류 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신수종 사업을 만들고 세계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로 고객과 사회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을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말을 쓴 것은 삼성이 아직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높은 윤리의식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염두에 둔 발언이기도 하다. 삼성의 위기극복 현장엔 늘 이건희 회장의 위기경영론이 있었다.

 '구매의 예술화’로 승화된 상생경영

'구매의 예술화’는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어낸 말이다. 조립산업은 원가의 80%가 구매원가이기 때문에, 협력업체를 잘 육성해 질을 높여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달만 하는 단순한 구매가 아니라, 협력업체에게 베풀면서 도움 받는 관계 구축을 통해 양질의 부품을 싸게 신속히 구매하는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에는 협력업체 모임인 '협성회’가 조직되어 있다. 일종의 '자생적 조직’이다. 이건희 회장의 일화이다. 그는 “우리 회사에 오시면 어디에 주차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회장의 생각은, 협력회사 사장이 들어오면 삼성전자 사장 옆에 주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협력업체에 대한 파트너십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협력회사 대표에게 삼성전자의 상시 출입이 가능한 '프리 패스’제를 도입했다. “부품의 품질이 확보되지 않으면 100년이 가도 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회장이 강조한 납품업체와의 공존체제는 2000년대 들어 협력포털(Collaboration Portal), 공급망관리(SCM) 등으로 시스템화 됐다. 2000년 들어 시작된 협력포탈은 삼성전자가 어떤 물건을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만들지 등의 정보를 3개월 전에 협력회사와 연결된 인터넷 사이트에 띄워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협력 포탈은 구매-제조-물류-판매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결, 재고를 없애는 SCM과 연계해 협력회사가 모회사의 실질적인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구축된 것이다.

마케팅 정보 등 핵심정보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보안이 필수적이고 서로를 믿지 못하면 협력 포탈은 기능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이렇게 협력업체에게 '성장의 사다리’를 제공했다. 삼성전자 협력업체 중에서 이미 십여개의 기업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정치적 냄새가 풍기는 상생협력이 아닌 진정한 '기업생태계에서 구축된 상생협력 시스템’인 것이다.

삼성전자의 성공을 가져온 전략적 요인은 무엇인 가

혼을 담아라: 품질경영

삼성전자 성공의 근저에는 '품질경영’이라는 철학이 있다. 삼성전자는 2009. 10. 29일 양문형 냉장고 SRT·SRS·SRN 계열 모델 냉장고 21만대를 리콜(recall)한다고 발표했다. 어느 한 가정집에서 발생한 냉장고 폭발 사고에 따른 조치다. 리콜은 그 발표시점이 삼성전자 창립 40주년 행사(2009. 10. 30)를 하루 앞둔 시점이어서 이례적이었다. 창립기념 행사는 40주년이기도 하지만 2008년 리만브러더즈 파산으로 인한 '미국 발(發)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글로벌 경쟁사보다 월등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행사였기에 더욱 이례적이었다.

어찌 보면 40주년 행사를 치르고 리콜을 선언해도 된다. 하지만 삼성전자에겐 40주년 행사보다 리콜발표가 더욱 중요했다. 이 같은 리콜 배경에는 '품질경영'의 상징인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있었다. 이 회장은 냉장고 폭발 사고를 언론보도를 통해 보고 크게 화를 냈다. 품질경영을 20여년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 데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삼성은 '업의 본질’을 중요시하는 기업이다. 제조업체의 업의 본질은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물건을 잘 만드는 것이다. 리콜은 소비자 신뢰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 회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불량은 암’이라며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삼성 도약의 기반이 됐던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선언도 불량문제가 도화선이 됐다. 당시 세탁기 제조과정에서 금형 불량으로 접촉면이 맞지 않자 삼성전자 직원들이 플라스틱을 칼로 긁어내 이를 맞추는 장면이 사내방송에 잡힌 것이다.

이 회장은 이를 전 사원들이 보도록 지시했다. “삼성전자의 수준이 어떤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에는 무선전화기 출시 후 통화품질에 문제가 발생하자 전화기 15만대를 수거해 구미 공장에서 '화형식'을 가졌다. 순식간에 150억원을 연기로 날려 보낸 것이다. '품질의 삼성’은 이렇게 소비자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차별화 전략: 달라야 살아남는다

삼성전자는 선발주자를 추격해야 하는 후발주자이다. 하지만 단순히 추격만해서는 부족하다. 경쟁상대방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는 차별화가 필요하다. 품질은 위치재(positioning goods)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많은 세계 1위 제품은 경쟁사의 기존 제품에 대한 차별화 전략의 산물이다.

1995년 어느 날 미국 PC업체인 D사 구매담당 사무실에서 고성이 일었다. 순간 삼성전자 LCD 임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삼성이 제출한 12.1인치 도면이 면전(面前)에서 찢겨졌기 때문이다. 세계 대부분 업체도 그렇고 미국의 D사도 11.3인치인데 삼성이 12.1인치 도면을 고집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삼성은 늦게 디스플레이 시장에 뛰어든 만큼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판독이 용이한 12.1인치 노트북용 LCD를 제작한 것이다. 크기를 키운 손쉬운 차별화 전략이었지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세계 노트북 1위인 도시바가 "11.3인치는 작으니 12.1인치 노트북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도시바가 삼성 패널을 사용해 12.1인치 노트북을 시장에 내놓은 지 얼마 뒤 미국 D사의 구매담당 최고책임자로부터 직접 만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삼성전자는 D사에 12.1인치 LCD를 납품하며 1998년 세계 LCD 시장 1위에 올랐다.

'보르도 TV’는 세계 TV 시장을 석권한 명품 TV였다. 보드도 TV는 '보르도 와인’에서 영감을 얻어 제조되었다. 개발 실무자들은 “왜 TV를 거실이나 안방에만 두나, 가전제품을 넘어 샤갈의 작품처럼 꿈을 전해주는 도구일 순 없을 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가전제품을 넘어 '명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실무자들은 수도 없이 디자인을 고민하다, 지쳐 와인을 마셨다. 순간 와인 잔 밑에 깔린 남은 와인의 '부드러운 곡선’이 뇌리에 꽂혔다. 그 영감을 구체화한 것이 '보르드 TV’였다.

디자인은 완성됐지만 금형이 문제였다. 개발자들은 피아노 '고광택 블랙'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일본의 한 TV 금형 업체가 삼성전자를 찾아와 "해법이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곧바로 해당 업체에 금형기계를 발주했지만 해당 업체는 기술 유출을 우려해 발주에 응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일본을 샅샅이 뒤져 비슷한 기술을 갖고 있는 후지정공을 찾아냈고, 공동 제품 개발을 제안했다.

수천 번의 플라스틱 배합 실험 끝에 기술개발에 성공했고 '스팀몰드'란 이름으로 시장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금형에 고압의 증기가 쓰여 졌기 때문이다. 2006년 3월에 시장에 첫 선을 보인 보르도TV는 그해 세계 고급 TV 시장을 석권했다. 영감과 열정이 명품을 만든 것이다.

삼성전자가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상업실험’이 사내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지켜졌다. 성공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성전자는 진화 한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해진다. 소프트웨어 인력 1만명을 모아라." 지금 이야기가 아니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했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한 말이다. 항상 앞날을 내다보며 준비경영을 강조했던 그는 미래경쟁력이 소프트웨어 (SW)에 달려 있다는 것을 예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삼성전자가 휴대폰 디스플레이 등과 같은 하드웨어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면서다. 그 결과 현재 삼성의 소프트 경쟁력은 삼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고 봐야 한다.

 성공기업은 시장 상황이 바뀌면 스스로 진로를 모색한다. 성공기업의 관건은 '진화’(evolution)이다. 삼성전자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갖췄지만 그것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시장에선 고급 제품은 미국 애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고 중·저가폰은 중국 업체에 추격당하고 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인 사이아노젠의 커트 맥마스터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삼성이 5년 안에 노키아처럼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이 소프트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에 종속된 여러 '하청업체’ 중 하나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기적으로 '구글에의 종속’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경쟁력 강화와 미래 먹거리를 위해 인수합병(M&A)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삼성 내부 기술만으로는 이들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고 보고 과감히 '외부 수혈’에 나선 것이다.

삼성전자는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생태계(플랫폼), 기업간 거래(B2B), 소프트웨어” 3대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 중심의 비즈니스 생태계를 구축하고, 일반 소비자 거래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B2B 시장을 공략하고, 하드웨어에 편중된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소프트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포석이다.

“이제 스마트폰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범용품’이다. 디자인 못지않게 플랫폼(비즈니스 생태계의 중심)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판매량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삼성전자가 올해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6(엣지 포함)를 공개하기 직전, 갤럭시S6 개발 과정에 관여한 삼성의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이어 그는 “갤럭시S6의 최대 승부처 중 하나는 플랫폼”이라고 단언했다.

갤럭시S6가 성공하려면 단순히 멋진 제품이 아니라 갤럭시S6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가 수많은 스마트폰 중에서 삼성 폰을 고를 이유가 없다. 플랫폼을 장악해야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의미다.

갤럭시S6는 디자인과 부품 성능이 개선됐을 뿐 아니라 스마트폰의 사용자환경(UX)이 확 달라졌다. 핸드폰 자체가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삼성페이’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같은 혁신은 삼성전자의 '루프페이’ 인수(2015.2)에서 비롯됐다. 루프페이는 마그네틱 보안전송 기술을 가진 미국의 신생기업이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유통매장에 설치된 '기존의’ 결제 단말기를 활용해 손쉽게 모바일 결제를 할 수 있다. '애플페이’는 기존 유통매장의 결제 단말기를 바꿔야만 쓸 수 있지만 삼성페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 훨씬 편리한 무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삼성은 카드사로부터 결제 수수료를 전혀 받지 않기로 했다. 애플페이의 결제 수수료가 0.15%(결제액 기준)인 것과 대조적이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카드사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삼성 주도의 모바일 결제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삼성은 독자 개발한 운영체제(OS)인 타이젠을 키우기 위해 내부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사물인터넷(IoT) 시대에 대비해 삼성TV에 타이젠 OS를 깔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미국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전문업체 스마트싱스를 인수(2014.8)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은 자사 제품뿐 아니라 경쟁사 제품까지 집안의 모든 가전기기와 조명을 제어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삼성이 'B2B’(기업-기업 간 거래) 시장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일단 거래를 트면 큰 부침 없이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린터의 경우 가정용 소비자 시장은 축소되고 있지만 기업 시장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기존 거래 관계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지만 한번 뚫기만 하면 큰 경쟁 없이 지속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다. IBM은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에서 B2B 기업으로 변신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삼성전자는 미국 상업용 디스플레이(디지털 사이니지) 전문기업인 '예스코일렉트로닉스’를 인수(2015.3) 했다. 예스코는 1988년 설립된 회사로 세계 최대 번화가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피커딜리 광장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내 주요 호텔의 옥외 LED(발광다이오드) 광고판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인수로 삼성전자는 디지털 사이니지 분야에서 기존의 소형 LCD 광고판뿐 아니라 옥외 LED 광고판까지 B2B 영업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는 앞서 2014년 하반기 미국 시스템 에어컨 유통업체 '콰이어트사이드’를 비롯해 프린팅 솔루션 업체인 캐나다 '프린터온’과 브라질 '심프레스’를 잇따라 인수했다. 모두 현지 유통망을 장악하거나 서비스 노하우를 흡수해 B2B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이다.

소프트 경쟁력 강화도 핵심 화두다. 삼성전자는 작년에 미국 비디오 애플리케이션(앱·응용프로그램) 서비스 업체인 '셀비’(2014.5)와 빅데이터 관련 기업인 '프록시멀데이터’(2014.11)를 잇따라 인수했다. 이 중 '프록시멀데이터’는 기업용 서버 성능을 개선하는 소프트웨어에 특화된 기업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전으로 데이터 양이 폭증하면서 부각되고 있는 기업용 서버 시장 공략의 첨병이다.

삼성전자의 진화 방향은 소프트파워를 강화이다. 그러면 삼성전자는 애플을 닮아가는 가. 하지만 삼성전자는 애플 그 이상의 기업이다. 애플은 삼성전자를 따라올 수 없다. 삼성은 제조업으로서의 하드파워(hard power)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1997)>의 저자 크리스텐슨(Christensen)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인텔 인사이드’가 돼야 한다. 부품을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처음 산업이 시작될 때 가장 좋은 전략은 전쟁에 나가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이 개방형 시스템으로 바뀐 후에는 다르다. 전쟁에 참여하기보다 총알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다. 중국에서 완제품을 조립하는 회사들이 삼성으로부터 메모리반도체와 회로기판을 사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업은 판로가 안정되어야 한다. 소프트와 하드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목계(木鷄)에 담긴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

이건희 회장은 나무로 만든 닭 '목계’(木鷄)의 교훈을 소중히 여긴다. 목계는 '장자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싸움닭 이야기다. 목계에 그의 경영철학이 담겨져 있다. 나무 닭처럼 권위와 위용을 갖추면 어떤 싸움닭도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칼은 들고 있되 휘두르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라는 손자병법의 '상지상(上之上)’의 교훈을 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영화 '벤허’ 매니아로 알려졌다. 보는 관점을 달리해 벤허를 여러 차례 봤다고 한다. 영화 '벤허’에서 얻은 경영철학은 무엇인가. 그는 전차경기에서 '벤허’와 '메셀라’의 말을 비교한다. 메셀라는 말에 채찍을 휘둘렀지만 벤허는 채찍 없이 말을 달리게 했다. 채찍을 맞은 말은 빨리 달렸지만 끝에 가서는 주인에 순종하지 않는다. 채찍의 고통 없이 자발적으로 달리는 말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인센티브(incentive)란 인간이 만든 위대한 고안 중의 하나며,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기게 한 요인”이라는 점을 사장단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경제학자가 아니지만 그는 경제학자 이상으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 고유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인간의 동기와 유인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인생관과 경제관은 '자율경영’으로 귀착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정통하다. 자기가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의 문제’와도 연결이 돼있다.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가장 잘 아는 본인 자신이다. 지도자는 그 구성원이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삼성조직 문화의 정수인 신상필벌(信賞必罰)도 자율경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낸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줌으로써 스스로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율경영이다. 삼성은 또 '업의 본질’을 강조한다. 업의 본질을 알아야 스스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품질경영도 '업의 본질’을 구성원이 공유할 때, 비로소 자율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경영 일선에 있으면서도 경영 전면에는 그리 잘 나서지 않는다. 한남동 자택이나 승지원에 머무르면서 사업을 구상하거나 주요 인사를 접견하는 것이 그의 주요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그는 신비에 싸여있지만은 않다. 위기감을 고취시키고 비전을 제시할 때 그는 신들린 사람 같다. 1993년 3월 LA로부터 프랑크푸르트, 오사카, 도쿄, 런던으로 이어지는 장장 4개월에 걸친 1,800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열변과 질타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그는 결코 은둔의 경영자는 아니다. 그는 선대로부터의 목계의 교훈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가(史家)는 역사는 “창조적 소수의 창조적 생각에 의해” 쓰여 진다고 말한다. 이때 역사는 굳이 일국의 역사일 필요는 없다. 개인사, 가정사, 그리고 기업사도 마찬가지다. 삼성의 기업사는 창조적 소수의 창조적 생각에 의해 쓰여 졌다. 여기에 자율경영에 기초한 구성원의 헌신이 더해져 초일류기업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면 삼성전자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것은 삼성전자만이 알 수 있다. 미래라는 그릇을 빚는 도공(陶工)은 바로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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