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 복거일 칼럼 > 이단적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자유경제원 / 2015-04-14 / 조회: 2,933       업코리아
   
▲ 복거일

옛적에 경제적 어려움은 기근의 모습으로 찾아왔었다. 재앙이나 전쟁으로 어느 지역에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정부는 별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굶주려야 했다. 사회 전체에 식량이 넉넉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사회에 여분의 식량이 있더라도, 정보의 전파가 느리고 수송 수단이 시원치 못했으므로, 구호는 제때에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산업 혁명으로 대부분의 사회들이 이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기근은 차츰 드물어지고 덜 심해졌다. 지금도 굶주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한꺼번에 몇 십만 명이 굶어 죽는 참변은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경제엔 나름의 병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경기 변동이 바로 그것이니, 불황은 치료하기가 무척 어려운 병이어서, 거의 주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근년엔 세계화로 상황이 한층 복잡하게 됐다. 이번에 우리가 아프게 깨달은 것처럼, 한 나라의 경제는 국경 밖의 상황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먼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이 불황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까지 한다. 그래서 민족국가들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는 요인들과 씨름해야 한다. 게다가 세계화가 근년에 갑자기 뚜렷해진 현상이므로, 참고할 만한 선례들도 드물다.

경제적 위기에 대한 우리 정부의 처방들이 그리도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인 까닭들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바로 그런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곤혹스러운 것은 정부만이 아니다. 개인들의 전통적 미덕이 때로는 사회적 손실을 불러오는, 이상한 상황이 나왔기 때문이다. 불황에선 재화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재화들의 생산도 따라서 줄어든다. 물론 사람들의 소득도 줄어든다. 자연히, 사람들은 소비를 더욱 줄여서 저축을 늘리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런 절약은 재화들에 대한 수요를 한층 더 줄여서, 생산 활동은 더욱 위축된다. 그래서 악순환의 고리들이 만들어지고, 개인들의 전통적 미덕인 절약과 저축이 사회적 손실을 불러온다. 

개인의 차원에서 절약과 저축은 언제나 미덕이다. 불황으로 형편이 어려울 때는 특히 그렇다. 따라서 개인들에게 소비를 늘리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효과가 없다. 그 문제에 대한 반응은 사회적 차원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불황을 맞은 사회들에서 정부들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불황의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력함은 1920년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불황의 대책으로 공공 사업을 추천하면서 가시기 시작했다. 

공공사업을 불황의 대책으로 제안한 것은 물론 케인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공공사업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구급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영국 정부의 공식적 견해는 더욱 적대적이었으니, 재무부의 관리들은 공공사업이 민간 부문의 투자를 정부 부문으로 돌릴 뿐, 일자리를 전혀 늘리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이러 견해를 새로운 이론으로 반박했다. 만일 사람들의 저축액이 투자자들이 필요로 하는 금액보다 많으면, 소비와 투자로 이루어지는 총수요가 완전 고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준 아래로 떨어진다. 따라서 공공 사업을 통해 인위적으로 투자를 늘리면, 총수요가 늘어나고 생산 활동이 활발해진다. 그러한 이론은, 경제적 교란은 화폐와 금융 부문에서 시작되어 '실물 경제(Real economy)'로 파급되지, 먼저 실물 경제에서 나와 화폐와 금융 부문으로 파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바탕을 두었다. 

그의 새로운 이론은 1936년에 나온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st and Money)』에 종합적으로 기술됐다. 케인스의 주장은 너무 이단적이어서 처음엔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서 차츰 널리 받아들여지게 됐다. 마침내 1930년대의 대공황에서 그의 주장은 불황의 대책으로 채택되어 효험을 보였으니,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임 1933~1945)대통령이 내세운 '뉴딜(the New Deal)'은 그의 주장을 많이 받아들인 정책들이었다. 덕분에 경기 변동은 위협적 모습을 많이 잃었다. 케인스는 일반 사람들에겐 귀에 익은 이름이 아니지만, 20세기에 사람들의 고통을 그보다 많이 덜어준 사람을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지만, 케인스는 경제학 박사가 아니었다. 그는 실은 경제학이 아니라 수학을 전공했다. 비록 당시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들인 앨플레드 마셜(alfred Marshall, 1842~1924)과 피구(Arthur Cecil Pigou, 1877~1959)에게서 경제학을 배웠지만, 그는 뛰어난 통계학자였으니, 1921년에 나온 그의 『확률에 관한 논문(A Treatise on Probability)』은 훌륭한 저작으로 통계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수학을 공부하고 통계와 확률 분야를 전공했다는 사실은 개인들의 삶과 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그의 철학에서 결정적 형성 요인이 됐다.

케인스는 여러 지적 분야들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사회 활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그저 상아탑 속에서 글을 쓰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사상가였지만, 다른 편으로는 영국 정부에서 경제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맡았던 활동가였다. 자연히, 그의 경제학 이론엔 20세기 전반의 공적 사건들의 자취들이 깊게 남아 있다. 케인스는 충분한 자금이 경제의 원활한 움직임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국내 경제만이 아니라 국제 경제에서도 충분한 자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국제적으로 충분한 자금이 공급되도록 하는 장치에 늘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설립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그의 계획은 많이 수정됐고, IMF는 그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빈약한 기구가 됐다. 1946년 미국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열린 IMF의 첫 회의에서 케인스의 의견은 미국 재무부 장관 프레데릭 빈슨(Frederick Moore Vinson, 1890~1953)의 의견과 크게 엇갈렸다. 빈슨은 원래 법률가로 뒤에 대법관이 된 인물이다. 그 회의에서 미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 결정된 사항들은 IMF의 미래에 대해 케인스가 품었던 꿈을 깨뜨렸다. 

당시 케인스는 심장병으로 건강이 무척 나빴다. 그러나 그는 조국 영국과 세계의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 건강에 무리가 갈 정도로 일했다. 특히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금융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무척 애썼다. 1946년 4월 21일 그가 죽었을 때, 라이어늘 로빈스(Lionel Robbins)는 “그는 싸움터에서 쓰러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조국을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라고 썼다. 근년에 케인스의 이론은 빛이 많이 바랬다.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레이건(Ronald Reagan)정권과 대처(Margaret Thatcher)정권이 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정책을 추구해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하이에크(Friedrich A. von Hayek, 1899~1992)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과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압도적 권위와 영향력을 누렸다. 

반면에, 케인스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경제학자로 인식되어 권위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케인스를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삶과 사회를 통찰했던 위대한 사상가를 희화화(戱畵化)하는 것이다.케인스의 전기를 쓴 역사핮가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는 케인스의 철학과 경제 사상은 그의 위대한 저서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 담긴 것들보다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그 책에 담긴 정책들은 1920년대 말엽에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대공황(Great Depression)'시기의 특수한 상황에 맞춰진 것들이며, 케인스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경제철학을 '일반 이론'이라는 지적 구속(intellectual straightjacket)에서 풀어내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케인스의 경제 철학은 자유주의나 시장 중시 정책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의 경제 철학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사람들의 삶이 무척 불확실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모든 경제 주체들은 미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만을가졌고, 당연히, 그들은 그런 사정에서 대해 합리적으로 대응하려고 애쓰게 마련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경제 활동에서 그런 대응의 핵심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해서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화폐의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런 케인스의 견해는 하이에크의 기본적 사상과 동질적이다. 하이에크는 사회에 존재하는 지식이, 특히 미래에 관한 지식이, 아주 불완전하며 그나마 경제 주체들 사이에 널리 흩어져서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 아주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강조했다. 

놀랍지 않게도 그 두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서로 존경했다. 1940년에 케인스의 『전쟁 비용을 지불 하는 길(How to pay for the war)』이 나왔을 때, 하이에크는 그것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리고 1944년에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이 나왔을 때, 케인스는 완전한 공감을 표시했다. 경제학의 목적은 경제 문제들을 풀어서 인류가 현명하게, 사이좋게, 그리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케인스는 말했다. 그래서 그는 경제학을, 치과 의술과 마찬가지로, 목적의 과학(a science of ends)이 아니라 수단의 과학(a science of means)이라고 보았다. 자연히, 훌륭한 경제학자는 경제학 지식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피는 기술도 갖춰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 자신은 분명히 그런 기술을 잘 갖췄으니, 그가 가족에게서 빌린 몇 천 파운드를 밑천으로 외환과 증권 거래를 통해 50만 파운드의 거금을 모았다는 일화에서도 그 점이 잘 드러난다. 만일 경제에 대한 이론과 경험을 아울러 갖춘 케인스가 환생해서 현재의 국제 경제를 살핀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와의 대담은 아마도 아래와 같을 것이다. 

필자: 지금 IMF는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선 IMF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케인스: 워낙 빈약한 자원과 불충분한 권한을 갖고 출발한 터라, 나는 IMF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IMF가 그렇게 허술한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실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니,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IMF는 기대보다 훨씬 잘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때 미국 사람들이 좀 더 경제 현실을 잘 살폈더라면...

필자: 경제적 위기를 맞은 나라들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을 IMF는 경제 개혁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IMF가 내건 조건들은 무척 엄격해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IMF를 격하게 비난합니다. IMF를 '점령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케인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고통은 IMF가 강요하는 것처럼 비치겠지요. 그래서 IMF는 앞으로도 비난받겠지요. 마취 없이 수술하는 의사를 환자가 고맙게 여길까요? IMF에겐 마취제를 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IMF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얼마나 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필자: IMF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케인스: 세계가 점차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어감에 따라, 경제 문제들도 국제적 문제의 성격을 점점 짙게 띌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처음 나온 외환 위기가 빠르게 세계 모든 나라들에 크게든 적게든 영향을 미친 이번 위기가 그 점을 잘 보여주었잖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민족국가들의 정책들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IMF의 역할은 늘어날 것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그런 기구들이 제대로 움직이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자유경제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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