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독일서 꽃피운 ‘파독근로자의 희생·독립정신’을 기억하자

자유경제원 / 2015-05-06 / 조회: 3,067       미디어펜

   
▲ 김소미 용화여고 교사

대한민국은 6·25 남침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지옥 같았던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에 들어섰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벌어먹고 살 만한 일자리는 없었고 굶주림은 하루하루 더해갔다. 그 때 이 땅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국제적 동정에 연명해야 했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은 이런 모습이었다.

다행히 지구 반 바퀴를 돈 곳 독일에 일자리가 있었다. 이 곳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떠났다. 개인적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그들이 매일매일 땀과 눈물을 흘리며 벌어들였던 외화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킨 위대한 동력이었다.

학계 및 시민단체 인사로 구성된 21인의 원정대가 50여년 전 서독으로 간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 나섰다. 2015년 4월 19일 일요일 오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이륙했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독일의 현지 시간은 오후 4시. 공항 도착 후 곧바로 뒤셀도르프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봄 햇살에 반짝이는 서북부 독일로 가는 라인 강변은 이국의 정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6박 7일간 이어진 '한국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 떠난 자유경제원의 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루 빨리 그 분들의 발자취를 만나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원정대가 찾은 곳은 딘스라켄시에 위치한 로베르크(Lohberg) 광업소였다. 1963년 12월 낯선 땅 독일에 도착한 한국인 광부 1진이 처음으로 배치되었던 역사의 장소였다. 이미 폐광 단계에 들어선 허름한 광업소를 둘러본 뒤 광부들이 묵었던 독신자 기숙사를 찾아갔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밖에 없는 3평 남짓한 단칸방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던 광부들의 고달픈 나날을 품고 있는 듯했다.

   
▲ 6박 7일간 이어진 '한국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 떠난 자유경제원의 대장정. 학계 및 시민단체 인사로 구성된 21인의 원정대가 50여년 전 서독으로 간 한국인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 나섰다.


라인 강 하류에 위치한 루르-라인 공업지대는 루르 탄전이 있어 독일 광공업 산업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 파독 광부 1진 63명은 북부 함보른 탄광회사에, 그리고 60명은 남부 에슈바일러 탄광회사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일행이 찾은 곳은 옛 함보른 탄광의 대강당. 독일로 국민을 보낸 1년 뒤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방문해 광부와 간호사들과의 재회의 시간을 가진 장소다. 현재는 뒤스부르크시에서 공영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부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1964년 12월 10일 아침, 대통령 내외가 왔다는 소식에 인근 탄광과 병원에서 일하던 400여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는 흐느낌으로 박자를 놓쳤고 가사도 흐트러졌다. 대통령은 연설도 마무리하지 못했고 행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 방문 당시 촬영된 사진을 떠올리면 모두가 흐느껴 부른 애국가와 대통령의 연설이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곳은 먼지만 쌓인 초라한 모습으로 조용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은 채…. 이곳의 현판 설치는 최근 한 한국인이 뒤스부르크시에 공식적으로 설치 신청을 해놓은 상태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일은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안타까웠다.

   
▲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만났던 함보른 탄광의 대강당(왼쪽). 현재는 뒤스부르크시에서 공영 체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열이 30도를 웃도는 수천 미터 깜깜한 지하에서 광부들은 “Glueck auf!(살아서 땅에서 만나자)”를 외쳤다. 그들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유는 1m를 더 파들어 갈수록 4~5마르크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겐 단지 살기 위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독일은 그들이 ”독일 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그것을 기리고자 딘스라켄시의 경우 로베르크 광산에 한국인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낯선 환경과 언어의 장벽에 어려움을 겪고, 고향과 부모님 생각 등 향수병에 시달린 것은 유독 광부뿐만이 아니었다. 50여 년 전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 당시 하나같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던 파독 간호사들도 단 몇 주도 안 되는 독일어 교육을 받고 독일에 와야 했다. 몸으로 그리고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했다. 신입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야 해야 했다.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32만 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내고 나면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고통의 나날을 버텼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내일을 꿈꿨다. 자신의 삶, 가정, 나라를 위해 여기에 왔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몇몇 분들과 나눈 대화에서도 이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날 4월 22일 에센시에 위치한 파독광부기념회관에서 파독의 경제적 의미와 함의를 평가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를 통해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보내 온 돈이 1억153만 달러나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수출액의 2%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오늘 날 우리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가 이래서 나온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당시 독일로 간 60% 이상의 청년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을 해왔는데, 이것이 당시 외환보유고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였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한국 경제 발전의 뿌리'를 찾아 독일에 온 이유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합류해 세미나에 참석한 레이든 대학 한국학과 장진성 교수는 감격에 겨워 '정녕 그대들이 바꾼 것은’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직접 낭송했다.

“떠날 때 그대들은 / 젊음을 가져가지 않았다 / 소중함은 가족 옆에 남겨두고 / 그리움만 갖고 갔다 / 약속만을 지고 갔다” 그리고 “정녕 그대들이 바꾼 것은 / 자신과 가족의 운명만이 아니었다”는 대목에서 원정대는 눈시울을 붉혔다.

"Never be satisfied, and always push yourself!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말고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라"는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을 향한 말도 터져 나왔다. 앞이 깜깜할 정도의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과 가족을 위해 낯선 타지에서도 항상 더 배우고 성장하려고 노력했던 그들로부터 우리 학생들도 배워야 한다는 토론이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성공 방정식은 자유주의에서 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부터 비롯되는 개인의 성장이라는 메시지. 국가나 타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개인의 적극적인 삶, 즉 독립정신을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서 알려야겠다는 뜨거운 다짐을 가슴에 담았다.

50여년 전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누었던 것은 '가난을 우리 대에서 끊자'는 무언의 맹세였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 경제 발전을 이루는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이룬 풍요 속에 살면서도 우리들은 무슨 일이든 남 탓 또는 국가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한국 경제 발전의 뿌리'를 찾아 떠난 6박7일의 여정.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 자신 스스로가 이루어낸 성장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느꼈던, 또 그것이 나라의 성장에도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은 내가 책임진다는 결의로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의 그 희생정신은 다름 아닌 독립정신이었다.

"한국은 계속 이런 개인의 에너지가 넘쳐야 미래의 경제 도약이 가능하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파독광부기념회관 방명록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이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제는 '감사’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교육’이 나서야 할 때라고 느꼈다. 교사로서 커다란 책임감을 느낀 60년의 긴 시간 여행, 원정이었다. /김소미 용화여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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