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8·15특집] 튀틀린 광복절·건국사부터 바로잡자

자유경제원 / 2015-08-17 / 조회: 4,981       미디어펜
[8·15특집] 튀틀린 광복절·건국사부터 바로잡자광복절 독립기념일이 마땅…왜곡·은폐된 건국사 진실 찾아야
이영훈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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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5  08: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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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은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송복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복거일 작가의 기조강연에 이어 Session 1-‘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 Session 2-‘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로 나뉘어 진행됐다. 
세션 1은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의 사회로 ‘대한민국 역사’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의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이라는 주제 발표에 이어 강규형 명지대학교 기록대학원 교수, 류석춘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 이명희 공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세션 2는 박동운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사회로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는 주제 발표에 이어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토론을 펼쳤다.

자유경제원은 “해방 후 3년 만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은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세웠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광복 67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의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1. 광복절 주년의 어긋남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날 밤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북위 38도 이남 지역의 통치권을 인수하였다. 그해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48대 6의 압도적 다수로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유엔총회는 유엔이 선거를 감시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가 살고 있는 한국(한반도)의 그 부분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권과 관할권을 갖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한국(한반도)에서 그러한 합법적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하다고 결의하였다. 이 같은 유엔의 결의에 기초하여 1950년까지 자유진영의 26개 국가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정부는 1949년 6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회부하였다. 거기서 4대 국경일은 3·1절, 헌법공포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이었다. 동년 8월 15일 정부는 제1회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그런데 동년 9월 위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광복절의 ‘光復’은 무엇을 영광스럽게(光) 회복한다는(復) 뜻이다. 1910년대부터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광복조국’ 또는 ‘광복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 ‘광복’ 두 글자만으로도 조국을 또는 독립을 영광스럽게 회복하는 투쟁이란 뜻이 충분하였다. 국회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꾼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독립이나 광복이나 그 뜻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단순한 명칭변경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1950년 8월 15일을 제2회 광복절로 경축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제2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기념사를 행하였다. 마찬가지로 1951년은 제3회 광복절이었다. 

  
▲ 자유경제원은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 발제를 맡은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가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1951년 광복절부터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는 ‘광복절 6주년’의 기념식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렸다고 보도하였다. 광복절의 기점이 1945년 8월 15일로 바뀐 것이다. 이후 1953년까지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동아일보는 1953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 제5주년기념일”을 맞아 북진통일의 결의가 불변임을 천명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사설에서는 “오늘은 여덟 번째 맞는 해방절이다”라는 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혼란은 사라졌다. 광복절을 독립기념일이나 해방절로 부르는 일은 다시없었다. 광복절의 기점도 1945년 8월 15일로 완전히 굳어졌다. 정부나 민간의 기억에서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경축하는 국경일로 정착되었다.

이 같은 혼란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역사의 우연’이라 할 만한 것도 있었다. 만약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최초의 정치적 절차인 총선거가 1948년 5월이 아니라 3월에 실시되었더라면, 독립의 선포는 그해 6월 중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독립기념일이 8월 15일과 혼동될 리 없었다. 5월 10일에 총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에 5월 30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동 의회가 7월 17일까지 헌법을 제정하였고, 7월 24일 초대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하였고, 8월 4일까지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립이 완료되었다. 그래서 3년 전 해방의 기쁨도 함께 경축하는 의미에서 가까운 8월 15일로 날을 잡아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그 이전 3년간 남한은 미군정 하에 있었으며 독립국이 아니었다. 1946년 8월 15일은 ‘제1회 해방기념일’이었다. 동아일보는 해방 기념의 식전이 열렸다고 보도하면서 “독립의 날을 열망하며”라는 제목을 달았다. 1947년 8월 15일에는 해방2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당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한국의 ‘자유독립’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그에 관한 보도에서 동아일보는 “백만 인민 자주독립 절규”라는 제목을 굵게 달았다. 광복절이란 말은 있지도 않았고, 1945년 8월 15일에 독립했다는 의식도 없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자주독립을 절규하는 기간이었다. 당시의 실정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절(독립기념일)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경축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은 우연하게도 8월 15일이 그 날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방과 독립의 기쁨을 함께 경축하자 했는데, 어느 듯 해방의 기쁨이 독립의 기쁨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그와 더불어 ‘광복’의 두 글자는 캄캄한 암흑을 뚫고 광명한 빛이 찾아왔다는 식의 엉뚱한 뜻으로 바뀌었다. 빛이 오거나 돌아왔다고 하면, ‘光來’ 또는 ‘光還’으로 표기해야 마땅하다. 전술한대로 ‘광복’은 ‘광복조국’ 또는 ‘광복독립’의 줄인 말로서 무엇을 영광스럽게 회복한다는 뜻이다. 목적어가 생략된 불완전한 造語가 오래 쓰이다보니 빛이 돌아왔다 식의 환상의 이미지가 본래의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나아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과 동시에 독립을 성취했다는 허구의 기억이 형성되었다. 나는 얼마 전 중견 관료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그들이 1945∼1948년 한국인이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는데, 따지고 보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부가 그런 식의 기억에 입각하여 광복절을 경축한 지가 이미 60년을 넘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복67년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복절의 주년이 3년 어긋남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였다. 청와대에 광복절의 주년이 어긋나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한 보고서도 올렸다. 그렇지만 정부는 하등의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는 여전히 광복70년이다. 정부는 특별사면을 포함하여 다양한 경축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무엇을 경축하는가.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사건, 곧 해방과 독립이라고 한다. 그런데 해방은 과연 우리 힘으로 쟁취된 것인가. 해방 후 3년은 독립을 절규하는 기간이 아니었던가. 해방과 독립의 기념일이 같은 것은 역사의 우연이 아닌가. 이 같은 반론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답할 수 없다. 

이하 제2장에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세워진 사건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제3장에서는 그 역사적 사건이 망각되고 왜곡된 지난 60년의 경과를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그 역사적 의의를 올바로 회복하기 위해 국가의례의 수준에서 어떠한 개혁이 있어야 하는지를 건의하겠다.

  
▲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태극기 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 건국의 역사적 의의

1) 자유인의 나라가 성립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식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국가는 民主政體로서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선 우리가 40년 동안 왜적에 맞서 싸운 것은 개인의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과로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로 보호하는 나라로 건립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신체의 자유와 재산의 자유를 양대 축으로 한다. 세계의 변방이던 서유럽이 16세기 이후 아시아를 추월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문명으로 올라선 것은 이 같은 자유의 이념을 먼저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시대는 개인의 자유라는 정치철학의 범주를 알지 못하였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나라였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실천하는 도덕능력의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위계가 결정된 신분적 존재이다. 각인은 그가 처한 자리에 충실해야 하는 도덕적 존재이다. 신하는 임금에 충성을 바쳐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해야 하고, 아이는 어른에게 공순해야 하고, 어른은 아이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노비는 주인을 충직하게 섬겨야 했다. 

조선성리학은 이 같은 사회윤리를 선하고 귀한 公의 위치로 승격시켰다. 그에 반하는 개인의 욕망은 악하고 천한 私로 단죄되었다. 조선성리학은 私를 마음을 갉아먹는 해충으로 간주하였다. 私가 극단적으로 억압된 결과, 사회는 활기를 잃고 경제는 정체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1인당 소득수준은 그것이 알려진 세계의 39개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아프리카 대륙의 평균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런 본성으로 승인하는 정신사의 전환은 서유럽 자유이념의 영향을 받은 구한말의 개화파 정치세력에 의해서였다. 서재필의 제자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은 그의 정신세계가 이미 근대적 자유와 독립의 이념으로 훌륭하게 순치된 상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가 패망한 후 이승만을 위시한 해외의 독립운동세력은 앞서 소개한대로 개인의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 투쟁하였다. 해내에서는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무릅쓰면서 실업, 언론, 교육의 방면에서 근대문명의 실력을 양성하는 세력이 솟아났다. 

이들 해내·외의 양대 세력은 해방 후 미국이 남한을 점령한 천우신조의 기회를 맞아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민주정체의 나라를 세움에 성공하였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자유이념의 나라로 한국의 문명사가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이래 지금까지 정부의 형태를 둘러싼 몇 차례 심각한 갈등이나 정변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가 그 원리에서 부정되거나 훼손된 적은 없었다. 자유이념은 이 나라의 사회와 경제를 융성시킨 근본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2) 독립 국가가 성립하였다

1392년에 문을 연 조선왕조는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중화세계라는 국제정치의 질서에 순응하였다. 조선왕조가 스스로를 중화세계의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국가체제를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재편하는 것은 세종조에서이다. 세종은 그가 제정한 五禮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전의 고려왕조는 군사·외교의 수준에서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함으로써 하늘 아래 자존하는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조선왕조는 하늘과의 직접적 교섭을 포기하였다. 세종이 제정한 오례는 1474년 國朝五禮儀로 완성되어 19세기 말까지 관철하였다. 페어뱅크가 지적했듯이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그에 조공하는 제후국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이루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국례의 형식에 머물렀다. 조선의 국왕은 명 황제의 칙사를 鞠躬의 예로 맞이하였다. 칙사가 거듭 요구한 5拜3叩頭를 禮典에 없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중종조 이후 조선의 국왕은 명의 칙사에게 5배3고두를 거행함에 주저하지 않았다. 명과 조선은 군신관계를 넘어 부자관계로 의식되었으며, 조선의 사대주의는 의례를 넘어 내면적 도덕으로 규범화하였다.

16세기 말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명의 구원으로 국체를 보존하였다. 조선왕조를 이를 再造之恩으로 칭송하였다. 17세기 전반 여진족의 청이 명을 구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對明義理에 충실한 조선왕조는 이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청의 군사적 침입을 맞아 조선의 국왕은 3배9고두의 예로써 굴복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道統論과 華夷論의 세계관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조선왕조는 명을 대신하여 성인의 도를 계승한 小中華로 스스로를 격상하였다. 18세기 초 조선왕조는 명의 始祖와 마지막 황제를 위한 大報壇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년이나 지속된 대보단의 제사는 조선왕조를 ‘정지된 시간’으로 몰아넣었다. 고도로 관념화한 국제질서는 19세기에 들어 洋夷의 시대가 도래할 때 조선왕조가 어떠한 수준의 주체적 대응도 하지 못하게 만든 굴레로 작용하였다. 조선왕조는 중화세계의 붕괴할 때 그 일환으로서 함께 해체되었다.

이 같은 이전의 역사를 전제할 때 1948년의 대한민국 성립을 두고 단순히 “동양의 한 古代國이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건국의 주체 세력은 그런 식으로 건국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한국인은 그들의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았다고 기뻐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현실을 정당화하기 명분을 가까운 역사에서 구하는 상투적 수사에 불과하였다. 대한민국은 결코 구래의 국제질서나 그것을 뒷받침한 세계관을 계승하여 복구된 나라가 아니었다. 자유인의 나라가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독립 국가가 생겨났다.

  
▲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 전경.

3) 자유시장경제가 성립하였다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자연경제, 낮은 수준의 시장경제, 국가적 재분배경제가 결합된 구조였다. 잦은 흉년의 충격을 맞아 자연경제와 시장경제가 교란될 때 균형을 달성한 것은 국가적 재분배경제였다. 18세기 조선왕조는 전국 340여 군현에 걸쳐 도합 1,000만 석의 還穀을 저장하였다. 18세기의 세계에서 조선왕조는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의 재분배경제를 영위하였다. 19세기에 들어 환곡제가 해체되었다. 그와 더불어 경제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위기가 심화되자 양반·관료의 농민 수탈이 심해졌다. 조선왕조의 양반·관료는 면허받은 흡혈귀와 같았다. 조선왕조가 패망한 것은 경제적 위기와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일제는 조선을 영구 병합할 목적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이식하였다. 시장경제는 조선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인은 일제가 부식한 시장경제체제를 자기개발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1940년이 되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공장을 경영하는 1만 명 이상의 기업가들이 생겨났다.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끈 정치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대한민국은 자유시장경제를 그의 경제체제로 선택하였는데, 그 과정은 단계적이었다. 건국헌법은 중요 자원과 산업을 국·공유로 하며, 필요에 따라 사기업을 국·공영으로 돌릴 수 있으며,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고 하였다. 나아가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이익의 분배에 均霑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인에게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이나 원리는 아직 익숙지 않았다. 제헌의회의 상당수 의원은 누구나 골고루 잘 사는 ‘민족사회주의’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재분배경제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시설이 국유화해 있는 현실도 ‘민족사회주의’의 당위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제체제로는 우방의 원조와 투자를 기대할 수 없었다. 세계시장에서 능동적으로 무역활동을 벌일 수도 없었다. 중요 산업과 기업을 국·공영으로 한다는 헌법의 규정은 비현실적이었다. 대부분의 귀속사업체는 적자이거나 가동중단 상태였다. 그들을 지원할 정부의 재정능력은 터무니없이 빈약하였다. 6·25전쟁의 파괴와 뒤따른 혼란은 정부의 관리능력을 더욱 제약하였다. 

1952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중요 자원과 산업을 국·공유로 하며, 필요에 따라 사기업을 국·공영으로 돌릴 수 있다는 규정을 폐기하거나 개정하는 제2차 헌법개정을 단행하였다. 그와 더불어 금융을 위시한 중요 산업의 귀속사업체를 민간기업으로 불하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경제체제는 사기업을 주체로 하는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였다. 이후 한국경제는 도약의 길로 들어섰다. 제조업의 공장 수는 1955년에 8,600여 개에 불과했는데, 1963년까지 18,310개로 증가하였다. 때맞추어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에서 수출시장이 열리자 한국경제는 급하게 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4) 자유통일의 기지가 성립하였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최초의 국제적 선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 1945년 12월 모스코바에서 전승 3국의 외상회담이 열렸다. 거기서 한국의 각 계층이 참가하는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미·소·영·중 4국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행하며, 이를 추진하기 위해 미·소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그에 부응한 공산세력은 이 국제적 협의에 따라 민주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1946년 2월 사실상의 정부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자 김일성은 ‘북조선민주기지론’을 내세웠다. 통일적 임시정부가 민주개혁을 뒤집지 못하도록 먼저 북조선이 혁명적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민주개혁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의 명의로 ‘임시정부20개조정강’을 발표하였다. 뒤이어 3월에는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급진적 토지개혁을 행하였다. 토지개혁은 장차 수립될 국가를 공산주의체제로 만들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서 인민민주주의개혁이었다.

이처럼 분단을 향해 먼저 달린 쪽은 북한의 공산세력이었다. 그들은 국제적 협약에 따른 임시정부가 건설되기도 전에 그들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들은 남한의 동포와 하등의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회와 경제를 전복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행하였다. 1948년까지 약 100만 명의 지주, 자본가, 부농, 지식인 출신의 북한 동포가 남쪽으로 내려왔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소련군 대표는 남한의 반탁·반공세력을 임시정부에서 배제하자고 주장했으며, 그로 인해 공동위원회는 결렬하였다. 무슨 이유에서 소련은 통일전선의 원칙을 저버리고 계급노선을 고집함으로써 공동위원회를 고의적으로 파탄시켰을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해 나는 남한의 자유민주세력이 통일전선으로 흡수, 소거될 만큼 약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남한 민중의 이승만을 구심으로 한 자유민주세력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의외로 강력하였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그 유명한 井邑발언에서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 북한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고 주장하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군정의 견제를 피해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를 유엔에 가입시켜 주권을 인정하고, 그 정부로 하여금 미·소와 통일을 교섭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체제는, 공산주의로의 길을 여는 좌우합작은, 이 민족이 다시 한 번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의 임시정부를 세운 다음, 북한에서 소련군과 공산세력을 몰아내는 것 이외의 통일의 다른 길은 없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성립은 ‘자유통일의 기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함으로써 이승만의 임시정부론은 현실화하였다. 1948년 12월 유엔이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승인함으로써 이 나라는 더 이상 그 존립이 국제적 협의의 대상이 되는 임시정부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을 위시한 건국의 주체세력은 대한민국을 미완의 임시정부로, 곧 북한 동포에게도 자유의 은택을 부여할 ‘자유통일의 기지’로 감각하였다. 집권기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에게 북진통일의 역사적 과제가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해 마지않았다. 

6·25전쟁은 다시 한 번 한국의 통일을 국제적 아젠다로 제기하였다.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4월 제네바회담이 열렸다. 거기서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14원칙’을 제시하였다. 유엔의 감시 하에 그동안 실시가 불가능했던 북한 지역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그에 대해 북한과 중국은 이승만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일관하였다. 그들에게 세계가 수용할 보편타당한 통일의 원칙은 있지 않았다. 이후 한국의 통일은 다시 국제적 협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남·북한은 사실상 독립국가로서 더 이상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자유통일의 기지’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적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 참석자 모습.

3. 건국사의 망각과 왜곡

1) 망각의 세월

1950년대 후반에 들어 광복절에 대한 공식 기억이 해방절도 변질되었지만, 1948년의 건국 사건이나 그 역사적 의의가 망각된 것은 아니었다. 1958년의 광복절은 특별히 건국10주년의 기념을 위한 각종 행사로 떠들썩하게 경축되었다. 1948년의 건국 사건이 정부 차원에서 망각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 걸쳐서이다. 집권 18년간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은 해마다 맞는 광복절의 치사에서 단 한번도 1948년의 건국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1961년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그는 “민족적 대동단결로 16년 전 8·15감격의 열매를 거두자”고 했다. 다음해 광복절을 맞아 그는 해방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박정희 개인은 광복절을 해방절로 기억하였으며, 그 해방을 조국근대화를 통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1948년의 건국 사건에 대한 박정희의 평가는 은연중에 부정적이었다. 1968년의 광복절 기념사에서 그는 “지난 23년간의 우리 역사는 거듭된 좌절과 시련의 역사”였으며, “우리 국민이 그 역량을 경제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쏟기 시작한 것은 지난 3∼4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 해의 광복절은 건국20주년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건국20주년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냈다. 도하 신문도 건국20주년을 맞아 건국사를 회고하는 특집을 연일 게재하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그에 관해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건국사는 그가 주도한 5·16혁명과 이후의 경제건설을 통해 비로소 쓰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정신세계는 한 마디로 강렬한 민족주의였다. 그에게 민족은 개인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박정희에게서 근면, 자조, 협동하는 개인은 결국 민족적 개인이었다. 그는 1968년에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에서 “우리는 民族中興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선언하였다. ‘개인의 근본적 자유’라는 이승만의 가치는 그가 이수한 고급의 학력과 굴곡에 찬 인생행로에서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민족의 고난, 가난, 무지, 부패에 분노하였다. 역사에 대한 그의 강렬한 비판과 소명 의식 가운데 대한민국의 건국이 지니는 획기적인 문명사적 의의는 자리를 잡을 여지가 없었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은 순전히 그의 작품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대 이전에 이미 시장경제체제의 법, 제도, 기구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기업가 집단이 성립해 있었으며, 수출시장이 열리자 그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면방직, 철강, 합판 등의 공업이 성장해 있었다. 잘 닦여진 기초가 있었기에 도약이 가능하였다. 역사가가 그 같은 인과의 연쇄에 주목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시대의 시선은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누구의 책임이든 박정희 시대에 걸쳐 대한민국의 건국사와 그 역사적 의의는 망각되었다. 물질적 성취가 대단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공백의 시대였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2) 건국 원류의 왜곡

1988년 민주화시대가 열린 이후 그 정신적 공백을 채운 것은 반일·반미의 민족주의였다. 박정희 시대 역시 민족주의를 육성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조국근대화의 국민정신을 고양하는 일환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구축하였으며, 일본과의 경제협력은 고도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렇지만 민주화시대에 정부와 민간이 육성한 민족주의의 정치적 역할은 그와 달랐다. 새로운 민족주의는 반일본의 인종적 민족주의, 반미국의 좌파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국민을 통합하기보다 분열시켰으며, 국제적 협력보다 갈등을 유발하였다. 

1987년 10월 제9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때 대한민국의 역사적 원류를 규정한 헌법 전문의 해당 부분에 중대한 왜곡이 발생하였다. 이전까지 헌법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였다. 그 부분이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임시정부 출신의 모 인사가 벌인 개인적 로비가 건국사에 무지한 정치세력을 설득하여 이루어낸 이 같은 개정은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인은 근대적 인간과 민족으로 바뀌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자유와 독립의 정신으로 거듭났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그것을 가리켜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이라 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장차 이루어질 독립에 대비하여 실업, 언론, 교육 등에서 근대문명의 실력을 양성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에 따른 실력의 축적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성립은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했던 민족 소생을 위한 물질적, 정신적 운동을 1987년의 개정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왜소화하였다. 이로써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무릅쓰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 온, 대한민국 성립의 가장 소중한 문명적 기초가 소거되었다. 아! 이런 일을 차마할진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리(是可忍也 孰不可忍也, 論語).

해외의 독립운동은 중국 화중, 화북, 만주, 그리고 미주 대륙의 네 갈래로 전개되었다. 임시정부는 화중에서의 독립운동을 대표할 뿐이었다.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정부가 아니었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의 존속과 활동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재정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가 거둔 독립운동의 실적은 빈약하였다. 화중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중국공산당에 속한 조선인들의 공산당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계열의 독립운동은 북한의 성립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성립에는 적대적이었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미국정부의 지원은커녕 무시와 냉대를 받았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만 오로지 동포들의 自力誠意로 이루어졌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이 홀로 자유이념에 투철하였다. 

1943년의 카이로선언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은 미주 독립운동의 값진 성과였다.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은 미주에서의 독립운동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이루었다. 제헌의회에 포진한 임시정부 출신의 인사 20여 명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신생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1987년 개정헌법은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전체 역사를 당파의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3) 김구의 현창과 임시정부 건국설

1995년의 광복절에는 그 때까지 중앙청과 국립박물관으로 활용되어 온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돔을 철거하는 민족주의 의식이 극히 상징적으로 연출되었다. 당일 김대중 야당대표는 ‘절세의 애국자’ 김구를 기리면서 “미군정, 이승만박사 통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결국 친일파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역사”에 대한 ‘올바른 청산’을 요구하였다. 반일 민족주의의 고양이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친일파의 역사로 매도하는 최초의 정치적 공세였다. 1998년 3·1절 기념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정부”이며 자신의 정부로 인해 “임시정부의 국시가 실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김대중 정부는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를 현창하였다. 2002년 정부는 백범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였다. 그는 “통일이 없는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남북협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세력이라고 도덕적으로 매도하였다. 1948년 7월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라는 장개석 총통의 권유를 거절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북한 인민군의 압도적 군사력에 조만간 해체되어 버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토로하였다.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이 선포되는 날,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선언하고 대한민국의 성립을 부정한 김구를 현창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이제 도덕적 매도의 대상이 되었다. 2003년의 3·1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근·현대사는 선열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하였다”고 하였다. 그 해에 역사교실에 보급된 검인정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는 출판사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금성사판 교과서는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면서 미국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해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의 반대 속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노무현정부가 지원한 잡지 『민족21』은 대한민국은 소수 반민족세력의 사단법인으로 출발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교과서만이 아니다. 사회과를 비롯한 모든 교과서에 동일한 논조가 관철되었다. 두산 출판사의 사회과 교과서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 교과서는 뒤이은 정치사의 서술에서 1948년의 건국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자신의 건국사를 부정하는 교과서를 자신의 손으로 검인정하여 교육하는 넋이 나간 나라가 되고 말았다.

4) ‘우리민족끼리’의 위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진 뒤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동 선언의 제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이다. 김정일은 김대중이 오랫동안 정치적 야망으로 추구한 한반도의 냉전 종식과 화해·협력 체제의 구축을 전제한 3단계 통일론에 형식적으로 부응하면서 그 대가로 ‘우리민족끼리’라는 고도의 전략적 의도를 공동선언에 포함시킴에 성공하였다. ‘우리민족끼리’는 통일한국의 국가체제가 어떠한 원리인지를 불문에 붙임으로써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함을 규정한 현행 헌법을 사실상 무력화하였다. 나아가 ‘자유통일의 기지’로 출발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였다. 김정일은 ‘우리민족끼리’로써 한국인의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김으로써 남남갈등과 한미갈등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이는 한동안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공동선언의 제3항은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고 하였다. 1992년에 개정된 북한의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경제체제를 통일한국의 경제체제로 승인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 역시 김정일이 구사한 고도의 전략적 의도였다. 김대중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유시장경제’에 토대를 둔 대한민국의 건국과 그 지향을 부정하였다. 김정일을 만난 대한민국의 수뇌부는 대화와 협력으로 이념을 달리하는 두 국가체제가 하나로 화합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러한 환상에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적지 않은 원조를 행하였는데, 주지하듯이 그 원조는 남한을 겨누는 핵무기의 개발로 이어졌다.

4. 새로운 출발

오랜 세월의 망각과 왜곡의 나머지,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의 마땅한 건국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그의 공화국 창건을 기념하지 않은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이다. 어느 외국인 교수의 씁쓸한 지적이다. 정신이 빠진, 육체만 흐늘거리는 이런 나라가 오래 존속할 수 있을까. 아마도 30년 뒤 이 나라는 패망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손은 자유 이념을 알지 못하는, 私를 마음을 좀먹는 해충으로 억압했던 조선왕조의 도덕정치와 유사한 체제 속에서 신음할 지 모른다. 나는 이 글을 나의 사랑하는 딸과 손녀를 위해 쓰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전통 문명과 생소한 외래 이념이 도입되어 정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 그 과정이 얼마나 순탄하지 않은지, 매번의 위기를 돌파함에 있어서 지성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근원의 적수는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는 한국인에게 호흡과 같은 것이다. 민족주의는 온 한국인을 그의 교도로 지배하는 유사종교와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사종교의 교단이다. 민족주의의 권위와 위력은 너무나 두렵고 강력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 맞서질 못한다. 민족주의가 군림하는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지성은 없다. 대학은 껍데기로만 있다. 역사는 왜곡되었고, 진실은 은폐되어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의례의 수준에서 두 가지만 건의한다. 결국 이 나라의 정치 엘리트들에게 올리는 충언이다. 첫째 광복절의 주년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 일은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1949년 8월 제1회 독립기념일이 경축되었고, 1949년 9월 독립기념일을 명칭 변경하여 광복절로 하였고, 1950년 8월 제2회 광복절을 경축하였음이 정부가 보유하는 제반 기록에서 더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대국민성명을 통해 그 동안 건국사의 이해에 중대한 착오가 있었는데 이제 바로 잡아서 올해는 제67회 광복절이라고 선언하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국민도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고 나라의 생일을 올바로 되찾았다고 기뻐하면서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대통령은 백 가지 정사를 물리친 다음, 며칠이고 조용히 그가 책임진 나라의 건국사를 공부해야 한다. 

둘째, 광복절의 주년을 바로 잡은 뒤, 몇 년의 공론을 거친 다음, 광복절을 당초의 원안대로 독립기념일로 돌려야 한다. 앞서 지적한대로 ‘광복’은 ‘광복독립’의 줄인 말이다. 1949년 당시에는 그렇게 줄여서 무방했지만, 목적어가 빠진 불완전한 말이어서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찾아왔느니 식의 엉뚱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원안의 독립기념일은 그 뜻이 심대하다. 독립은 일제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었다. 15세기 이래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구한말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웠다. 그것도 함께 경축했을 터이다. 

따지고 보면 550년 만의 독립이었다. 국가의 독립만이 아니다. 개개 인간이 낡은 윤리와 가치관으로부터, 나아가 오도된 정치이념으로부터 해방되는 더욱 깊은 뜻도 있다. 건국헌법이 천명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 바로 그것이다. ‘광복’의 두 글자에는 이러한 역사적 반성, 교훈, 다짐을 담을 수 없다. 국회가 광복절을 독립기념일로 복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해마다 독립의 소중한 뜻을 기리는 국경일이 국민적 축제로 벌어진다면, 한국인의 정신문화 역시 크게 고양될 터이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명칭 변경하자는 운동이 있다. 건국사를 바로 잡자는 취지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그런 주장을 먼저 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당시에는 광복절이 원래 독립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건국절보다 독립기념일이 더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건국절의 제정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크다. 개천절이 사실상 건국절로 경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나라당의 몇몇 의원이 제출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법률안에 대해 국회의 입법자문관은 개천절과 충돌한다는 의견을 냈다. 건국절의 제정은 개천절의 존폐를 둘러싼 비생산적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원안대로 독립기념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근거가 명확하여 추진하기가 쉽다. 뿐만 아니라 국가나 개인이나 독립의 깊은 뜻을 새길 때 우리의 정치·사회·경제를 선진화시키는 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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