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이영훈의 조선 바로읽기②]-주권보다 종묘사직 매달린 황실

자유경제원 / 2016-09-05 / 조회: 8,557       미디어펜
1910년 8월 29일은 조선이 망한 ‘경술국치일’이다. 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몇 백 년에 한 번 있었던 희귀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망국의 역사를 바로 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공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어디에서도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이제라도 반성해야 한다. 근대화를 준비하지 않고, 스스로 지킬 사상과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던 조선왕조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지난 8월 29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조선 망국, 교훈을 얻자’ 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이 중심이 된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선의 독립자주는 허울에 불과했다”며 “국가 주권을 입헌제 형태로 재배치하려는 정치세력의 모든 개혁시도를 탄압했다”고 지적했다. 1863년에 등극하여 44년을 치세한 고종은 조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미디어펜은 이영훈 교수의 발제문을 상, 하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아래 글은 발제문 하편이다. [편집자주]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조선왕조의 해체 [하]


3. 황혼의 대한제국


갑신정변,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개항 이후,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국가체제의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문벌가문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개화당으로 불린 이들은 1884년 궁정 쿠데타의 방식으로 집권을 시도하지만, 한성에 주둔 중인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갑신정변). 그들이 정변을 일으킨 제1의 대의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들은 입헌군주제 하의 내각제와 같은 정부형태를 모색하였다. 그들이 개혁의 모델로 삼은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이었다.


일본정부는 갑신정변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이 패배하자 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비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한반도가 일본의 안위, 곧 주권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양보할 수 없는 이익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두려워한 궁극의 적은 러시아였다. 조선은 스스로를 방위할 수 없는, 그냥 두면 조만간 러시아에 포섭될, 나라로 간주되었다. 조선을 일본과 우호적인 근대국가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장은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일본의 정계와 세론이 공유한 한반도정책이었다. 


1894년 4월 동학을 신봉하는 농민군이 보국안민의 기치를 걸고 봉기하였다. 자력으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는 조선왕조는 종주국 청에 군대의 파송을 요청하였으며, 6월 2000명의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였다. 청과 개전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개 여단을 파견하였다. 한성으로 진입한 일본군은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요구했으며,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고 민비를 중추로 하는 집권세력을 축출하였다. 뒤이어 친일 개화파 인사가 중심이 된 갑오내각이 성립하여 개혁 신정을 선포하였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은 곧바로 청일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 전쟁에서 일본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94년 4월에 체결된 시모노세키(하관) 강화조약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일본이 중심이 된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선의 독립자주는 허울에 불과하였다. 후발제국주의로 부상한 일본은 조선을 그의 보호국으로 삼고자 하였다. 


갑오경장의 좌절 


1894년 7월 일본의 지원으로 집권한 개화파 정치세력은 개혁의 중심 기구로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동년 12월까지 약 210건의 개혁안을 의결하였다. 개혁은 입헌군주제, 근대적 행정·사법체제, 근대적 재정·화폐제도 등의 수립, 신분제의 개혁, 식산흥업 등 실로 광범한 범위에 걸쳤다. 개혁은 기간도 짧았거니와 준비와 여건이 불비하여 대부분 좌절했으며, 신구 제도의 혼란만 초래하는 중도반단의 경우가 많았다.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청일전쟁과 농민군의 봉기로 고작 한성과 경기 일원에 미칠 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경장의 주체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일본과 협조한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를 이루었다. 보통의 조선인에게 일본은 바다 가운데에 놓인 흑치 오랑캐로서 조선과는 역사와 함께 오랜 원수였다. 갑오경장의 진정한 비극은 주권자인 국왕의 동의를 결여하였다는 점이다. 갑오경장은 국왕에게 입헌군주제의 정부형태를 강요하여 그의 주권을 크게 제약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반도와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할양 받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요동반도만큼은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3국간섭). 주권의 회복을 노리던 국왕 부처는 10년 전에 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새로운 보호자로 초청하였다. 그러자 한성에 주재한 일본의 낭인 20여 명이 대원군을 앞세워 미명의 궁중을 급습하여 민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접한 일반 조선인의 가없는 분노 앞에서 친일 갑오내각은 더 이상 존속할 여지가 없었다. 1896년 2월 러시아의 유인으로 고종은 권속들을 데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왕궁에서 국왕의 접견을 청하던 내각의 수반 김홍집은 고종이 보낸 근위대에 끌려가 머리가 잘렸으며, 그의 벌거벗긴 시체는 청계천변에서 사흘이나 방치되었다. 근대를 향한 개혁의 꿈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종 어진./사진=국립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성립


지나친 기대일지 몰라도, 3국간섭 이후 러일전쟁까지의 9년간은 조선왕조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1897년 8월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한 것은 그 마지막 기회가 안겨준 선물이었다. 대한은 주권자가 황제이기 때문에 대한제국으로도 불렸다. 이 새로운 나라가 국가체제의 원리를 명확히 하는 것은 1899년 8월에 반포된 대한국국제에서였다. 그 사이, 대한국이 선포된 이래의 2년간, 황제세력과 독립협회 간에 정치적 공방과 타협이 있었다.


한 동안 두 정치세력은 구래의 중추원이 일종의 의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입헌군주제의 정부형태에 동의하였다. 1898년 10∼11월 관민공동회에서 결의된 헌의 6조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은 중추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외에 황제가 칙임관을 임명할 때는 의정부의 자문을 구하여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탁지부가 국가의 모든 재정을 관장하고, 재판에 있어서 피고가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가지며, 범죄에 대한 승복을 판결의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것 등이 결의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같은 입헌군주제로의 모색은 전제군주제를 옹호한 근황파의 모함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됨에 따라 좌절하였다. 그와 더불어 조선왕조가 그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최선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사라지고 말았다. 결과론적 해석일지 몰라도 헌의 6조 가운데 외국과의 조약 체결은 중추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1개 조만이라도 관철되었더라면, 이 나라가 그토록 허망하게 망할 리는 없었을 터이다. 


1899년 8월에 반포된 대한국국제는 대한국을 만세불변의 전제정치로 규정하였다.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며, 그 가운데는 외국과의 제반 조약을 체결할 권리가 포함되었다. 국제의 반포에 뒤이어 국가체제가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황제 직속의 원수부가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나아가 정부 8개 부부 산하의 중요 기구가 황제 직속의 기구로 분리되었다. 특히 전환국이 탁지부 산하에서 황제 직속으로 옮겨진 것의 의미는 컸다. 그것은 전환국이 주조한 화폐는 정부의 재산이 아니라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 귀속되고 처분됨을 의미하였다.   


정부재정의 운영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나타났다. 탁지부와 농상공부가 관리해 온 공적 재원이 궁내부 산하의 내장원이 관리하는 황실의 재원으로 이관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인삼의 전매권과 삼세의 징수권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나아가 구래의 아문둔토, 목장토, 역토가 농상공부와 탁지부의 관하에서 내장원의 재산으로 편입되었다. 요컨대 1899년 이후 대한제국은 숨길 것 없이 황제 개인의 가산제 국가로 변모해 갔다. 


초라한 정부재정


대한제국의 정부재정 규모는 1896년의 480만여 원에서 1904년의 1,421만여 원으로 2.9배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 한성의 물가지수는 대략 2.7배 상승하였다. 이를 감안하면 동기간 예산 재정의 실질규모에는 변함이 없었다. 1911년의 국내총생산은 5억 1,890만 엔이다. 1904년의 예산 1,421만 원은 그것의 1∼2%에 불과하다.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왕조의 재정은 쌀로 도합 400만 석의 규모로서 국내총생산(GDP)의 5% 정도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추계로부터 대한제국기 정부재정의 실질규모는 19세기 전반에 비해 거의 2분지 1 이하로 축소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경제적 위기의 연속과 민란으로 표출된 농민들의 저항을 받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조선왕조는 비록 제국을 표방하였으나 천하의 가난한 정부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정부재정의 세출 구성에서 꾸준하게 증가하면서 가장 큰 비중을 점한 것은 군부의 예산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국방비가 증액되었다기보다 황제의 무한한 군권을 내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수도 일원의 친위부대를 증강한 결과였다.


학부의 비중은 2%대에서 정체하였으며 1902년 이후 감소하였다. 식산흥업의 주무 부서라 할 농상공부의 비중은 1896∼1898년 2∼4%에 머물다가 1900년의 6.9%를 정점으로 한 뒤 1904년 0.4%까지 급감하였다. 농상공부 산하의 통신국이 황제 직속의 통신원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신원의 예산을 합하더라도 1900년 이후 농상공부의 세출 비중은 감소하는 추세였다. 


   
▲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말기에서 민란의 물결이 이어진 것은 군현의 수령에 의한 학정과 수탈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1880년대 이후 본격화한 국왕의 매관매직이 있었다. 수령에 임명된 자들은 그의 짧은 임기 내에 서둘러 투자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사진=문화재청 경복궁(www.royalpalace.go.kr) 홈페이지 제공


황실재정


대한제국기의 황실재정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범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정부재정의 일환으로 편성되어 지급된 궁내부재정이다. 궁내부재정의 주요 용도는 왕릉이나 궁실의 신축과 보수였다. 둘째는 내장원재정이다. 내장원은 1895년 황실의 보물과 재산을 관리할 목적으로 궁내부 산하에 설치된 기구이다. 당초 내장원의 수입은 1899년까지 연간 10만 량 전후에 불과하였다. 1899년 황제의 전제권력이 성립한 이후 정부에 속한 여러 공적 재원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그에 따라 내장원의 연간 수입은 1900년에 30만 냥, 1901년에 158만 냥, 1902년에 247만 냥, 1903년에 590만 냥으로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내장원재정의 지출로서 가장 큰 것은 황제에 대한 상납으로서 30∼50%를 차지하였다. 내장원의 회계기록으로부터 내장원이 둔토·역토 관리와 인삼 전매를 제외한 특정 사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거나 생산적 목적으로 예산을 편성하는 모습을 읽기는 어렵다.


셋째는 궁방재정이다. 궁방은 왕실이 각종 생활자료를 조달하기 위해 시중에 설치한 사설 재정기구이다. 1903∼1904년 명례궁의 연평균 수입은 151만여 원이었다. 그것의 96%는 황제가 내려 준 자금인데 그 출처는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화로 밝혀진다. 지출 내역을 보면 식재료가 78%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으며, 내인과 주방에서 일하는 숙수 등에 대한 인건비가 17%로서 그 다음이었다. 궁중으로 엄청난 양의 식재료가 조달되었음은 죽은 민비의 혼전에 올리는 상식과 다례가 빈번했을 뿐 아니라, 황제에 올리는 진어상과 그에 부수하는 사찬이 번다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궁방이 명례궁 이외에 14개나 더 있었다. 


넷째는 황제의 별고이다. 별고는 황제의 비자금을 관리한 창고이다. 별고의 주요 수입원은 매관매직과 백동화 주조의 수익이었다. 황제가 매관매직을 통해 얼마나 벌었는지는 짐작할 방도가 없다. 1894∼1904년에 걸쳐 전환국은 총 1,875만 원의 신식화폐를 주조하였다. 주조가 대량으로 행해지는 것은 황제의 전제권력이 성립하는 1899년부터이다.


 1901∼1904년에는 해마다 300만 원 이상이 주조되었으며, 그에 따라 격심한 통화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루어진 통화의 남발은 거대한 주조 수익을 황제에게 안겨주었다. 예컨대 2전 5분 백동화 1매를 주조하는 비용은 1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로부터 총 1,875만 원의 주조로부터 1,000만 원 이상의 수익이 발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전환국이 주조한 화폐는 황제의 의지에 따라 처분되었다. 황제는 그 중의 상당량을 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으로 실어 보냈으며, 그 나머지를 자신의 별고로 옮겼다. 황제의 별고는 내장원경이며 전환국장인 심복 리용익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는 별고의 자금을 인삼의 전매, 마포과 미곡의 매입과 저장, 고리대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황제는 전환국을 자금원으로 한 대한제국 최대의 상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궁내부, 내장원, 궁방, 별고를 합한 황실재정의 실질규모는 거의 정부재정에 필적했다고 짐작된다. 그 막대한 재원을 황제는 황실의 낭비적 생활, 제사, 연회, 전각 신축 등에 대부분 소진하였다. 조선왕조가 전통적으로 체현한 성리학적 공공국가의 모습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대신 본연의 가산제적 특질만이 앙상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개명군주로서 그에게 부여된 전제권력을 활용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추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일부 역사가의 평가는 그 시대가 남긴 방대한 기록에서 근거를 찾기 힘든 황설에 불과하다. 


보호에서 병합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1904∼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가까스로 실현을 보게 되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임박한 1905년 7월 일본은 미국과의 교섭에서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야심을 드러내지 않은 조건으로 한국에서 지도적 지위를 지님을 인정받았다(가쓰라-태프트협정).


동년 8월 영국은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할 권리를 승인하였다(제2차영일동맹). 동년 10월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 간의 강화조약이 성립하였다. 거기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짐을 승인하며,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포츠머스강화조약). 


드디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그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간에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외세의 각축장으로 만듦으로써 두 차례나 전쟁을 유발했다는 것이 일본의 논리였다. 황제는 내용이야 어떻든 외교권의 형식만은 보존해 주길 애처롭게 요청했으나 무참히 거절당하였다.


황제는 일본이 제시한 조약안을 협상, 타결하도록 그의 대신들에게 명하였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며, 부임할 통감의 권한은 외교권에 한하며, 한국이 부강의 실력을 회복하면 외교권을 반환한다는 취지의 문안이나 조항이 추가되었다.


이로써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양국 간의 조약이 성립하였다(제2차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1906년 2월 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내정을 감독할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서 이토가 자청하여 부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한성에 주둔한 각국의 외교사절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영사관만 남기고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일본이 처음부터 1910년에 이루어진 병합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나친 결과론적 해석이다. 일본 정계의 여론은 한국을 부속 영토로 병합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부터 종속국, 자치식민지, 위임통치로 지배해야 한다는 점진적 주장까지 여러 가지 구상으로 착종하였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무시하는 외교적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으며, 무언가 상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서는 한국 병합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태세를 보였다. 이토는 한국 병합에 따른 일본의 경제적 부담을 걱정했으며, 천년 이상 독자의 국가를 꾸려온 이민족이 일본에 동화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실질적인 병합과 다를 바 없는 종속국으로 포섭된 가운데 국가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하여 자치 능력을 높이는 길이야말로 일본의 득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이토는 통감으로 재임한 3년여 기간에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은행을 창설하고, 공립보통학교를 세우고,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자치육성정책을 펼쳤다. 그렇지만 그의 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황제는 그의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07년 7월의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이어졌다.


근왕주의에 충실한 그의 신민들은 전국 도처에서 의병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중앙 정계는 이토의 자치육성정책에 협력하는 것이 형식적이나마 주권을 보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일파와 학정을 일삼는 황제권력 자체를 부정하고 일본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다른 일파로 분열하여 심하게 대립하였다.


무엇보다 더 이상의 실험과 주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급박하게 돌아간 만주 대륙의 정세였다. 1906년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을 근거로 간도에 거주하는 10만여 한국인도 자신의 관할 하에 있다고 하면서 경찰을 파견하고 영토권을 주장하였다. 청국은 일본의 주장을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미제로 남아 있는 한국과의 국경 문제 해결을 요구하였다.


북경에 주재한 미국의 외교관은 미국을 끌어들여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에 맞서는 청국, 미국, 독일의 동맹 체결을 추구하였다. 이 같은 만주의 정세는 열강이 한국 문제에 다시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1909년 7월 일본은 부랴부랴 한국 병합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동년 9월 일본은 청국과의 협정을 성사시켜 간도에 대한 영토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만주의 철도와 탄광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였다(청일협정, 간도협약).


동년 10월 한국 병합에 소극적이던 이토가 만주 하얼빈에서 동양평화의 대의를 저버린 죄를 묻는 안중근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토의 사망은 일본에서 한국 병합을 촉구하는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였다. 동년 12월 미국이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러시아, 영국, 일본에 제안하였다.


만주에 직접적 이해를 가진 러시아와 일본은 미국의 진출을 원치 않았다. 두 나라는 서둘러 만주의 이권을 분할하는 협상에 착수하였다(제2차러일협약). 그 과정에서 1910년 4월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최종 승인하였다. 동년 5월에는 영국이 이를 승인하였다. 이제 일본의 한국 병합을 가로막는 내외의 장애는 아무 것도 없었다.  


1910년 7월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가 새로운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하라는 일본정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1907년의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황제는 태황제로 물러나고 심신이 병약한 순종 황제가 등극해 있었다. 황제의 충실한 신하들은 데라우치에게 국호를 보존해 주고 황실이 왕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함을 병합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일본은 이 두 조건을 수락하였다. 국호는 조선으로, 왕호는 리왕으로 정해졌다. 이후 병합의 과정은 빠른 물살로 진행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순종 황제는 그의 한국 통치를 일본 황제에게 양여하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같은 날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은 한국의 총리는 일본을 대표하는 통감과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동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황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한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양여”하며, 제2조에서 일본 황제는 이를 수락하여 한국을 일본에 병합한다고 선언하였다.


뒤이은 6개 조는 일본 황제가 한국의 황제, 황실, 황족 및 그 후예의 지위와 명예를 보장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세비와 자금을 지급하며, 훈공이 있는 한국 관리에게 작위와 은김을 내리며, 한국인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며, 능력 있는 한국인을 관리로 등용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일본 황제는 순종을 창경궁 이왕,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 고종의 형 이희와 고종의 아들 이강을 공으로 책립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조선의 왕공족은 일본의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방침이었으며, 이는 왕세자 이은이 일본 황실의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현실화하였다. 왕공족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에 이왕직이 설치되었으며, 이왕직에는 연간 150만 원에 달하는 세비가 지급되었다.


일본 황제는 병합에 협조한 고위 관리 76명을 조선귀족으로 봉하였다. 나아가 일본 황제는 3,00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은사금을 조선귀족, 구한국관리(3,638명), 덕망과 연치가 있는 양반·유생(3,150명), 향당의 모범이 되는 효자·절부(3,209명), 빈궁한 홀아비·과부·고아·독신(7만 902명)에게 뿌렸다. 은사금은 연리 5% 공채로 주어졌으며, 기명식을 원칙으로 하고 양도와 질입은 금지되었다.


이로써 1392년에 개창한 뒤 518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이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05년의 보호조약이나 1910년의 병합조약은 대한제국의 국제에 충실하게 규정되었다. 두 조약은 황제가 그의 개인적 권리를 처분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조약을 비준하는 어떠한 대의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1863년에 등극하여 44년을 치세한 고종은 열국쟁패의 제국주의시대에 그의 왕국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체제를 근대적 입헌국가로 개편해야 했으며, 그를 위해 근대적 사권의 주체로서 국민을 흠정해내야 했으며, 대외적으로 또 하나의 주권기관인 의회를 설치해야 했으며, 징병제를 실시하여 국방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고종은 이 같은 역사적 책무를 감당할 만한 개명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주권을 입헌제 형태로 재배치하려는 개명된 정치세력의 모든 시도를 탄압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왕업은 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에 지나지 않았다. 가산을 고수하기 위한 그의 처절한 노력이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왕공족은 일본의 황실에 충실히 편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종묘사직의 향화는 일본의 황실이 해체되는 1945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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