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인천상륙작전…전쟁 판도 바꾼 지략의 승리

자유경제원 / 2016-09-15 / 조회: 10,162       미디어펜

인천상륙작전, 군사적 의미를 조명한다
전쟁의 판도를 바꾼 지략

6.25 전쟁 발발 이후 우리는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잃었으며, 7월 3일에는 인천까지 점령당한다. 미군의 최초 선발대로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5일 오산에서 최초의 전투를 했지만 허무하게 패배했다. 패배한 한국군은 계속 밀려나면서 결국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에까지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북한군 14개 사단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9월까지 낙동강전선은 붕괴직전의 한국군 사단 5개와 미8군에 의해서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보일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북한군의 준비는 철저했다. 북한군은 3단계 작전계획을 세워놓고 차분히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다. 우선 1단계는 개전 및 국군의 주력격파 그리고 수도 서울의 점령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서울을 개전 2일차까지 점령하고, 수원-원주-삼척까지 38도선 이하 90km까지 5일 내에 점령하기로 했다.
 
2단계는 증원병력의 격파 및 전과확대였다. 이에 따라 군산-대구-포항 전선으로 180km까지 14일 내에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3단계는 잔적소탕 및 한반도 장악이었다. 부산-여수-목포 전선까지 작전종심 80km를 10여일 내에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단 1개월도 안 되는 시간 내에 한반도를 점령하겠단 계획을 북한은 오래전부터 준비했고 계획대로 수행해나갔다. 낙동강 전선이 고착되기 전까진 북한군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듯 했다.

   
▲ 표 1. 북한군 3단계 작전계획

그러나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국가가 나섰다. 바로 미국이었다. 비록 스미스 특임대의 허탈한 패배나 허약해보이기만 하는 미 극동군 병력의 한계는 역력했다. 하지만 미 극동군 사령관은 다름 아닌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였다.

우발계획 SL-17
 
우리 국방부는 북한의 남침을 대비한 우발계획 SL-17을 구상하고 있었다. 최초 기안이 1948년이 이뤄졌던 이 문건에는 북한이 침공할 경우 한국군은 조직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을 거점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후에 적의 측면을 우회하는 상륙작전으로 반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작성 기안자는 도널드 맥비 커티스(Donald McB. Curtis) 대령이었다. 이 계획은 우리 육군에서 이어 받게 되었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북한이 1950년 춘계에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를 작성했다. 국방부는 방어계획 수립을 서둘러 1950년 3월 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를 확정하고 예하부대에 시행토록 지시했다. 이러한 작전명령 38호는 북한의 주공을 38도선에서 막는 것으로 비교적 완벽한 계획이었으나 실현가능성은 낮았다.
 
한편 작전명령 38호에 대한 보완 대책으로 커티스 대령의 아이디어가 다시 떠오르면서 6.25 발발 직전인 6월 19일 우발계획 ‘SL-17’이 확정되었다.1) 
 SL-17에 따르면 북한의 침공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선이 강화된 후에는 적의 측면을 강타하는 상륙작전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한국이 침공 당하자마자 맥아더 총사령부는 이 계획의 사본을 입수하여 전쟁의 국면을 뒤짚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최초의 작계는 블루하트(Blueheart) 작전으로 명명되어 7월 4일에 준비되었다. 이에 따르면 제24보병사단을 일본에서 부산으로 이동시킨 후에, 부산에서 북진하여 수원에서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 제25보병사단을 증원하여 중부전선을 보강한 후에, 7월20일 경 해병 연대전투단과 제1기병사단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계획자체는 좋았지만, 당시 미군의 사단들은 병력과 훈련이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7월5일 스미스 TF가 처참히 패배하자 작전은 대대적으로 수정되어, 포항상륙작전으로 바뀌었다.

   
▲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의 지연전이라는 지독한 열세 속에서 단 한 번의 군사작전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 지략의 승리였다. 맥아더의 지휘철학이 적용되면서 최대의 전과를 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목표는 인천 

애초 블루하트 작전부터 맥아더의 목표는 인천이었다. 즉 인천을 통해 수도를 탈환했을 때의 정치적 승리, 적의 보급선을 차단함으로써 보급을 끊을 뿐만 아니라 2개의 전선을 강요하게 되는 이점 등을 감안할 때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것이 가능한 작전이냐는 점이었다. 

우선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서 최소 7m에서 최대 9m에 이르러 아산만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위였다. 즉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수백 미터의 개펄을 엄폐물도 없이 전진해야만 한다. 개펄에서는 전차나 차량은 당연히 이동할 수 없고, 도보도 사실상 어렵다. 결국 정해진 시간 내에 상륙해야만 했다. 상륙할 장소는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방파제와 축대였다. 즉 상륙함을 정박시킨 후에 사다리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썰물 때 이동할 수 있는 비어수로 한 곳으로 한정이 되어 손쉬운 차단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륙작전으로서는 재앙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측면공격을 위한 상륙작전의 장소는 물론 인천이외에도 있었다. 인천의 공격계획은 작계 100-B, 군산은 작계100-C, 그리고 주문진이 작계 100-D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인천 이외의 장소는 전략적 가치가 떨어졌다. 군산은 적의 허리를 끊을 만큼 후방이 아니었고, 주문진은 서울을 통과하는 보급선을 끊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2일 인천을 상륙목표로 최종 결심하고 작계 100-B의 실행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100-B의 사본을 합참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National Defense Act에서 합참과 전구사령관의 관계정립이 명확히 되어있지 않음을 이용한 것이다.
 
합참의 반발이 있었고, 육군 참모총장도 크게 우려를 했지만,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의 선택에 반대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판단을 신뢰하고 위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누군가 작전 성공확률이 1/5000도 되지 않는다며 격하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이 작전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기에 되려 적절하다. 기습의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라며 낙관했다.

   
▲ 인천상륙작전의 상륙유도를 위해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만 했다. 이에 따라 트루디잭슨 부대는 KLO부대의 도움 하에 영흥도에서 팔미도로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했고, 해군첩보부대는 영흥도에서 후퇴해야만 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X레이 작전 

실제 상륙작전에서 가장 어려운 요소는 바로 정보획득이었다. 인천의 방어부대는 일종의 후방부대로, 이러한 부대의 전투서열이나 작계, 전력 등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지도였다. 미군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제작한 지도와 해도에 의존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지도나 해도가 모두 부정확하고, 일부 지형은 아예 누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의 실측이었다. 비록 항공사진을 통하여 지도를 보완할 수 있다고는 해도, 예를 들어서 만조때 수면에서 방파제까지의 높이와 같은 정확한 실측정보가 필요했다. 또한 접근 수로 상에 함정의 접근의 막기 위한 인공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는지, 설치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 문제는 결국 실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했다.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한미 합동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인 8월부터 한국해군은 얼마 안되는 포함으로 영흥도와 덕적도를 탈환했다. 우선 8월 24일 국군의 해군정보국(함명수 소령 지휘) 요원 17명이 영흥도에 투입되어 사전정보획득에 나섰다.2)

이후 미군·CIA의 트루디 잭슨(Trudy Jackson) 팀(미 해군 유진 클라크 대위와 그의 통역역할을 맡은 국군 계인주 대령, 연정 소령 등 총 6명)이 9월 1일 영흥도에 상륙했다. 영흥도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협조를 바탕으로 이들은 방어진지나 방파제 및 부도의 상세정보, 유속이나 수심 등 다양한 정보를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차량과 장비가 지나갈 정도로 단단한 갯벌의 지형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팔미도 등대가 건재함까지 확인했다.
 
특히 상륙작전을 앞두고서는 이들의 활약은 더욱 중요해졌다. 9월10일부터 사전공습이 시작된 와중에 국군 초계함들이 인민군의 기뢰부설사실을 감지했다. 이에 따라 9월 13일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영흥수로 안으로 진입했다. 해안포대들과 교전이 있었으나 대부분 제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기뢰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러는 사이 상륙부대 본진은 일본의 사세보항에서 9월 12일 출발했다.
 
이제 문제는 상륙유도였다. 이를 위해서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만 했다. 이에 따라 트루디잭슨 부대는 KLO부대의 도움 하에 영흥도에서 팔미도로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했고, 해군첩보부대는 영흥도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퇴출을 지키기 위하여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가 끝까지 퇴로를 지키다가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했다. 이런 희생하에 팔미도 등대가 켜지면서 미 해군·해병대의 상륙전력들이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림 1. 인천상륙 상황도 (1950년 9월 15일)

L아워, 상륙돌격의 시작

9월 15일 03시경 팔미도 등대의 유도에 따라 순양함 4척과 구축함 7척이 수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함대는 단종진으로 이동하면서 월미도에 포격을 가했고, 06시가 되자 항공모함들로부터 콜세어 전폭기가 출격하여 포탄과 로켓을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상륙로켓함 3척이 해안에 접근하여 4.5인치 로켓을 수백 발 퍼부으면서 제압을 마쳤다. 

마운트 매킨리 함에 위치한 지휘부는 L아워(L-hour, 상륙시각)를 06시30분으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제1파로 파견된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 해병들은 06시에 상륙정에 탑승하여 비치 그린(Beach Green), 즉 월미도를 향하여 진격했다. 제1파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06시33분이었다. 제2파와 합류한 상륙대원들은 약 20분의 교전을 통하여 인민군을 제압했고, 06시55분 무선전신국 언덕에 성조기를 꽂으면서 상륙의 성공을 알렸다. 이후 후속병력들이 상륙하면서 전차와 공병까지 동원되어 8시경에는 월미도를, 11시경에는 소월미도까지 점령을 마쳤다. 

월미도는 인천항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감제고지였으므로 미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월미도가 미군의 손에 들어온 이상 상륙작전을 방해할 결정적 요소는 제거되었다. 비치 그린의 전투에서 인민군은 108명 사망, 150여명 실종, 136명 포로를 기록했던데 반하여 미 해병대는 부상자 17명이 전부였다. 12시까지 해병대는 비치 그린에서 완전히 잔적소탕까지 마쳤지만 13시부터 간조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제 다음목표는 비치 레드(Beach Red)와 비치 블루(Beach Blue)였다. 그러나 물이 다시 찰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공격을 위한 H아워는 17시30분으로 정해졌다. H아워를 앞두고 병력들은 16시45분 육군 수륙양용전차의 출발을 기점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포함들은 인천 시내를 사격했고, 상륙로켓함들이 다시 동원되어 20분간 로켓 6천여 발을 인천 시내로 날렸다.

H아워의 분전 

비치 레드로 앞장 선 것은 역시 제5해병연대였다. 그 뒤를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국군 제17연대와 해병 제1연대가 함께 했다. 17시33분 제5해병연대 제1대대 A중대가 비치 레드 왼편에 상륙했다. 예하 돌격소대3)
들은 상륙함에서 곧바로 사다리를 올려 별다른 문제없이 제방을 넘어 공동묘지 고지로 진격했다. 진격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적 토치카에 발이 묶여 피해가 속출하자, 2파를 이끌던 로페즈 중위는 적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앞장서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곧 공동묘지 고지가 장악되면서 인민군의 저항은 잦아들었다.
 
비치 레드의 오른편에 상륙한 제2대대는 더욱 운이 좋았다. 영국 영사관 고지로 향하여 상륙한 이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철도를 확보했고, 이어서 대한제분 건물까지 확보했다. 부대를 재정비한 이후에 적의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로 이동하여 점령했다. 오히려 점령이 예상보다 너무 빠른 나머지 비치 레드는 병력이 뒤엉켜 대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문제는 응봉산이었는데 부대 간의 위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여 어둠이 깔리면서 인민군이 물러난 이후에야 점령이 완료되었다.
 
한편 인천항 외항과 염전의 동남쪽에 걸친 비치 블루에서도 17시30분에 맞추어 상륙작전이 벌어졌다. 이곳은 제1해병연대가 선봉에 나섰다. 이들은 전차상륙함으로 접근하여 다시 상륙장갑차로 상륙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바람과 안개가 깔리고 조류가 빨라지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상륙 제1파는 향도함의 도움없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조직적인 상륙을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돌격로를 찾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부 상륙장갑차들은 길을 잘못 찾아 인천항 외항까지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대혼란으로 인하여 이미 어둠이 깔리고 병력의 집결이 한 시간 이상 지연되는 사이에 병력은 피해가 없었으며, 대부분의 목표지점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반대로 말하면 맥아더의 예상처럼 인천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D데이 사상자는 사망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대대적으로 반대했던 이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 그림 2. 서울탈환전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다음날이 되자, 이미 인천은 해방되었다. 미 해병 1사단은 제5연대가 경인국도의 북쪽 루트를 통해 서울로, 제1연대가 남쪽 루트를 통해 서울로 진격하는 사이, 제7연대는 인천수비에 집중하도록 했다. 17일부터 진격을 시작한 미 해병들은 이틀간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며 18일에는 영등포까지 진격했다. 

그제서야 북한은 정말로 인천에 상륙작전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 9사단 87연대 등을 영등포 방어선에 투입하는등 2선부대를 총동원하여 서울 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인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북한군 수뇌부는 여전히 주력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묶어두었다. 

미 해병은 9월 21일 제1연대가 영등포 시가전에서 승리하면서 여의도를 거쳐 한강 도강에 성공했다. 북쪽 루트를 타고 온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는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확보했고, 9월 20일에는 행주산성까지 점령한 후에 9월21일에는 모래내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무악산 일대에 온갖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한군 독립 25여단과 78연대의 강력한 저항에 엄청난 고전을 겪는다. 그러나 9월 25일 미 제7사단의 병력과 셔먼전차 들이 보강되어 국군 17연대와 함께 서빙고, 남산, 장충단을 점령하면서 북한군의 저항도 무너진다. 

 
그러나 이후에도 치열한 시가전에 전개되어 9월 27일에서야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다시 꼽을 수 있었다. 9월 27일 인민군이 서울에서 전원 후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이었지만, 적은 1만5천여 명을 사살하고 6천여 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다.

   
▲ 9월 27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에서 전원 후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종료되었다./사진=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군사사(軍事史) 속의 의미 

인천상륙작전이 갖는 군사적 의미는 유럽을 탈환시켰던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도 더욱 의미가 깊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날 때를 즈음해서 독일은 더 이상 공세를 지양할 수 없을 정도로 양면전쟁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즉 자연스럽게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던 시기에 벌어진 작전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의 지연전이라는 지독한 열세 속에서 단 한 번의 군사작전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 지략의 승리였다. 

특히 현대에서도 이루기 어려울 정도로 해군-해병대-육군이 하모니를 이끌어내면서 ‘합동성’을 달성하여, 복잡한 작전이 매우 매끄럽게 수행될 수 있었다. ‘중앙집중적 기획에 현장분산적 실행(Effectively balancing centralized planning and decentralized execution)’이라는 맥아더의 지휘철학이 그대로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최대의 성과가 등장했다. 실제로 미 극동사령부야말로 오히려 합참보다도 더 합참스러운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천의 성공이 전쟁의 성공을 의미하진 않았다. 맥아더는 이후 인천상륙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원산상륙을 통해 일거에 전쟁일 이기겠다는 맹신에 빠져 기어이 원산상륙을 실행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진격한 우리 국군의 3사단이 상륙병력보다 먼저 도착함으로써 중요한 전력을 낭비한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쟁의 핵심인 적 병력 섬멸보다는 적 영토 획득에 집착하는 현명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이란 절대로 한 가지 면으로 평가할 수 없다. 몇몇 과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맥아더 장군의 결단과 실행력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과정이자 결과가 인천상륙작전인 것이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1) 일부 서적들에는 SL-17이 미 국방성의 계획으로 명시되고 있으나, 다른 원전들에서는 이를 한국군의 계획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부 세력들은 SL-17의 존재를 근거로 남한의 침공음모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SL-17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2) 해군정보요원들은 현지 포섭된 공작원의 도움으로 월미도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등에 위장 취업해 상륙에 필요한 핵심정보들을 성공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으며, 이는 결정적인 정보가 되었다.

3)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를 구성했다. 

(이 글은 지난 12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인천상륙작전의 세계전쟁사적 의미’ 세미나에서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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