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전태일, 귀족노조는 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다

자유경제원 / 2016-11-08 / 조회: 9,971       미디어펜

손가락 이야기


'손 무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중략)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1984년에 나온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손 무덤’이라는 시다. 처절하다. 분노가 치민다. 손 잘린 노동자를 그라나다도 로얄살롱도 심지어 스텔라까지 외면하고 지나간다. 태워주기 싫어서가 아니다. 시트에 피 묻는 게 싫어서 그런 거다. 자동차 시트보다도 못한 게 노동자 몸뚱이였다.


시詩는 은유나 상징이나 풍문이 아니었다. 부천 어느 공장에서는 한 달이면 잘린 손가락이 가마니로 한 포대씩 나온다고 했다. 그런 수기를 읽을 때마다 진저리가 처졌다. 그러나 공단 근처에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그게 100%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안다.


해가 바뀌면 공장의 중간급 관리자들은 자사 노동자들의 가계 변동사항을 체크하고 다녔다.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 자녀의 대학 진학 여부였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보통 그 노동자는 해고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목돈이 들어간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빠듯한 살림에 등록금과 입학금이 있을 리 없다. 해서 노동자들은 산재보상금을 받기 위해 기계에 스스로 손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산재가 발생하면 행정상 불이익도 있고 금전적인 손실도 있어 업체에는 사고 예방 차원(?)에서 해고를 단행했던 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다. 


   
▲ 전태일은 1965년 가을 평화시장 안의 삼일사의 견습공(시다)로 취직하여 월급 1,500원을 받았다. 사직・해고와 취업을 반복하여 1970년 그의 월급은 23,000원이 되었다. 5년 사이에 15배 이상 증가한 것이고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이 8배 상승한 것이다./사진=『전태일 평전』(조영래 著) 표지


산업 역군, 공돌이, 노동자


정부에서는 그들을 산업역군產業役軍이라고 불렀다. 전시 작전처럼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산업의 영역에서 그들은 군인 취급을 받았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공돌이, 공순이로 불렀다. 그들이 노동자라는 자기 이름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분신을 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불길이 기도를 타고 들어갔던지 그의 마지막 말을 잘 들리지 않았다. 1960년대의 빠른 성장에는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대규모 사업장은 좀 나았지만 영세 업체로 갈수록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이 강요되었다.


전태일이 몸 담았던 청계천 의류제조업체 밀집지역은 그런 영세사업장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농촌에서 올라온 스무 살 아래의 소녀들이 하루에 열 네 시간씩 일했다. 천장은 낮아 허리를 펼 수 가 없었고 실밥 먼지는 아무런 제한 없이 숨 쉴 때마다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다가 어려웠던 나머지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산업 현장으로 뛰어든다.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00명은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해 학생장으로 치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 상대생 400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새문안 교회 소속 대학생 40여 명은 스스로 참회하는 차원에서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여기까지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사실도 그럴까. 실은 여기에도 좀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일단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는 물론이고 대학생 멘토까지 있었다.


사울 알린스키(1909~1972)라는 인물이 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모두 존경하는 미국의 급진적 사회운동가로 1939년 시카고 빈민촌에서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등 실천적 조직과 이론을 정립했다. 그의 이론 중에 ‘지역사회이론’이란 게 있다.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전까지는 활동가가 지역에 침투해서 직접 조직을 꾸리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현장에서 발굴한 리더를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알린스키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옆에 앉아 조용한 말로 설득했다. “당신을 구할 사람은 당신 뿐”이라고 부추기고 그 선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개혁의 근간이라고 알린스키는 주장했다. 운동이 시작될 때 조직가는 그 바람을 타고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며 훈련된 조직가는 선택한 현장에서 3년 이내에 운동을 일으키고 운동이 일어나면 바로 그곳을 떠나라고 그는 가르쳤다.  


1966년 알린스키에게 교육을 받고 귀국한 오재식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사무총장은 1967년부터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꾸려 빈민촌에 학생을 투입했다. 훈련받은 학생들은 두세 명씩 한 팀을 이루어 현장에 투입됐다. 이들은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스며들어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인자(운동 인자)를 발굴했다.


당연히 조직을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70년대 열혈 운동권인 양국주씨의 증언에 의하면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속단하기에 이 사안은 매우 민감하다. 전태일과 관련된 부분은 사울 알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추천사를 쓴 오재식씨의 추천사에도 나온다. 이렇게 되어있다.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조직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위험한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최종 결정은 과연 누구의 몫이었을까. 분신의 현장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IS는 항상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를 한다. 모쪼록 노동운동의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운동 세력의 증명불가능한 회고담이기를 바랄 뿐이다. 추측대로라면 김지하가 말한 죽음의 굿판은 이미 70년대부터 펼쳐지기 시작한 셈이다.  


인간 전태일


80년대 초반 공장 활동 지침서를 보면 부록으로 활동 후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대부분은 공장에 적응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담고 있지만 또 하나 공통되는 부분이 자신들이 상상하고  있던 노동자의 모습과 실제 노동자들의 간극을 보면서 느끼는 당혹감이다.


노동자는 계급 모순을 몸으로 담보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투쟁에 떨쳐나설 수 있는 대자적 민중이어야 하는데(이는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에서 나오는 구분법으로 대자적 민중은 의식화 되지 않은 즉자적 민중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민중이다) 어딜 봐도 그럴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태하고 의지는 박약했으며 통제가 되지 않았고 끈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후 등장하는 노동문학에는 역시 머릿속에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식인의 병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평전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만으로 온도가 느껴지는 인간의 모습을 추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95년에 개봉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의 전태일은 속 깊고 예의바른 청년이다. 영화 속 이미지는 사실을 넘어 존재하고 나중에는 사실을 압도한다.


박광수 감독이 그린 전태일은 조영래가 그린 전태일의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70년대 선각(先覺)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조영래가 추상한 ‘각성된 노동자’ 전태일의 모습일 뿐이다. 


   
▲ 사진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다. 박광수가 감독을 맡았고 영어 제목이 A Single Spark인 이 영화에는 이창동이 시나리오에 참여했다./사진=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포스터


실제 전태일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으며 충동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따라 읽으면 평전의 몇몇 대사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한 두 목숨 없어져야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진다.” 평전에 나오는 김개남 등과 바보회를 결성할 당시의 발언이다. 이런 유의 발언은 평전의 후반부로 가면서 더욱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간간히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 개정판 평전 p.277 중에서 - 

  

이는 전태일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장기표는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고 깨달아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태일은 자신의 처지를 분개했다기보다는 여공들의 참담한 삶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원천은 사랑이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가면 모녀식당이란 음식점이 있다. 반계탕, 감자탕 등을 파는데 외져서 찾기 힘들다. 생전 전태일의 단골집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전태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일 끝나고 와서 감자탕 한 그릇 먹고, 참 맘이 좋았어요. 시다들 데리고 와서 자기는 안 먹고 애들 사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한 그릇 슬쩍 더 주니까 끝까지 배부르다고 안 먹어. 그래서 난 정말 밥 먹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도 저녁 먹은 게 아니었어요. 시다 애들한테는 자기는 밥 먹었다고 그랬는데 (내가) 준다고 덥석 받아먹으면 애들 무안해 할까봐 그랬다는 거야, 나중에....그래서 내가, 에이 바보야, 그랬거든.”


아주머니는 전태일이 분신하던 날도 뼈다귀를 다듬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걱정도 되고 그래서 태일이가 왔길래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지요. 야 이 바보야, 네 일이나 걱정해라, 하고 타일렀어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내일이면 결판이 난대요. 결판은 뭔 결판? 그러고 말았는데 다음날 점심 끝나고였나? 누가 와서 태일이가 죽었다고, 불타 죽었다고 엉엉 울더라고요. 난 그때 불타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공장에 불이 나서 죽었나 했지요.”


김형민씨가 쓴 ‘썸데이 서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태일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전태일을 선배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


1970년 전태일의 월급은 23,000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GDP는 87,000원으로 전태일의 연봉 276,000원은 이의 세 배 쯤 된다. 쉽게 말해 먹고 살만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도 그는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앞서 말한 대로 전태일은 자신의 처지를 분개했다기보다는 여공들의 참담한 삶에 분노를 느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월급이 높은 미싱사를 포기하고 그보다 월급이 낮은 재단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그것이 나만 잘 살 수 없다는, 평화시장 여공들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다(좀 과하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종종 있다).


여기 대비되는 것이 2016년 현재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귀족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상승분이 제품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청업체의 임금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른 척 외면한다. 이들이 전태일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래서 부당하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 프로세스에서 전태일의 이름은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    


   
▲ 전태일에 대비되는 자들이 대기업 공기업 귀족노조 노조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상승분이 제품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청업체 임금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 외면한다. 이들이 전태일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래서 부당하다./자료사진=연합뉴스


아쉬운 이야기 둘


전태일의 모습에서 또 하나 흥미 있는 부분은 그가 구상했던 모범적인 피복업체 프로젝트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해주는 그런 공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미싱사의 월급은 1만원에서 3만원으로, 시다는 1,000원에서 8천원으로 조정한 공장을 설계했다. 교사까지 고용해서 공부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다. 전태일의 계산은 어림짐작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장을 훤히 알았으니 이 정도로 배분 해주고도 공장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계획은 현실화 되지 못했다.


당시에는 ‘자본’에 비해 ‘노동’이 너무 많았다. 수익을 따져보았을 때 이런 공장에 들어오는 정신 나간 자본은 없다. 그 프로젝트는 전태일이 자본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전태일의 ‘기업가 정신’을 읽는 것은 너무 무리한 발상일까. ‘학습’을 통해 방법론이 싸우는 쪽으로 가지 않고 개선과 모험으로 현실을 바꿔 나갔다면, 물량을 수주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일을 성사시켜 나갔다면 어쩌면 우리는 살아있는 ‘기업가’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태일 분신 후 12일 뒤인 11월 25일에는 조선호텔 하급직 이상찬이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1971년에는 아시아 자동차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을 방해하면 집단자살을 하겠다고 나섰고 2월에는 식당 종업원 김차호가 가스통을 껴안고 소동을 피운다. 목숨을 담보로 발언권을 신청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열병처럼 번졌다. 이것이 전태일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다.


죽음의 행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4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끓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도 좋지만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세상에 없다. 자기가 있고서야 세상이 있는 것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태일이의 죽음을 따르지 말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 /남정욱 대문예인 공동대표



(이 글은 7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주최한 '전태일 생애 바로보기-누가 전태일을 이용하는가' 전태일 분신 46주기 세미나에서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대문예인) 공동대표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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