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란 폭력을 퇴치한 한강의 기적 원동력은?

자유경제원 / 2016-12-10 / 조회: 10,904       미디어펜
대한민국 국민 중 50년 전 한국과 비교해 볼 때 부자 아닌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 때는 누구나 내일을 걱정했다. 지금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서 순간순간을 헤쳐나가기에 바빴다. ‘오늘은 뭐하지, 내일은 뭐할까’란 질문은 사치스러웠다.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손에 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자각한 순간 한국인들은 세계 중심으로 힘차게 나가기 시작했다. 공수래공수거, 삶은 예나 지금이나 맨손으로 와서 맨손으로 돌아갈 뿐이지만 우리들은 손에 무엇이나 쥔 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전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이 경제적 부국으로 도약한 지금, 왜 많은 것을 가진 지금은 성장하기 어려운지 되돌아 봐야 한다. 

파독 : 세계 시장에서 신용을 얻다.

한국이란 나라는 6.25사변(Korea War)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 나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상품, 사람, 지식 등 만나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시장에서 거래를 할 때 신용을 보지 않고 물건을 거래하는 일은 없다. 좋든 나쁘든 서로에 관한 어떤 정보가 있어야 거래가 성립한다. 한 푼 벌려다 천 푼 잃는 일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막상 세계시장에 나왔을 때, 팔 것은 없고 노동력은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온 거리에 노숙자들과 실업자들은 넘쳐나는데 전쟁으로 자본이 모두 파괴 된 뒤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이런 나라를 믿고 국내외 자본을 댈 자본가도 없던 실정이었다. 그나마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로 미국의 원조를 통해 근근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으나, 주변국 중 한국에 투자해줄만한 나라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같은 자유진영에 속해 좋은 투자국이 될 수 있었으나 과거사 문제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거래의 기본은 내게 풍족한 것을 주고 내게 부족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품이란 자본과 노동이 결합 돼 만들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자본은 너무도 부족했고, 노동력은 넘쳐났다. 희소성의 원리에 의해 자본은 귀했고 노동력은 흔했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 수 가 없었다. 자본이 충분히 많아져야 노동력이 귀해지고 인간처럼 살 수 있다. 

심플하게 볼 때 우리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하나는 한국의 신용상승을 통해 자본이 들어 올만하다는 확신을 대외 투자국들에게 주는 것이고, 또 하나 한국 노동자들을 믿을만하다는 확신을 노동력이 부족한 국가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파독은 독일에 한국 노동자들이 믿을만한 존재라는 점을 어필 한 것이다.
 
파독은 당시 서동으로 찢어진 서독에 파견됐다는 점으로써, 한국이 516 이후에도 자유진영에 온전히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일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서독은 전쟁의 참화를 두 번이나 겪고도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였다. 기술이라는 무형의 자본 축적을 통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본으로 나라를 온전히 일으킨 곳이었다. 

한국이 이런 나라와 교류를 한다는 점은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에게 ‘[서독]이 신용한 나라’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신용이라는 무형자본을 확보하게 한다. 이 때의 한국은 신용이든, 기술이든, 돈이든 자본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노동력은 남아돌던 상황이라 노동력을 어떤 형태의 자본으로라도 바꿔야 했던 때다. 광부, 간호사로 대표되는 파독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는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된 파독 송금액 뿐 아니라 신용이라는 중요한 자본을 획득했다. 

신용을 통해 한국 인력들을 외국에서 수용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됐다. ‘서독의 신뢰’라는 점에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교류측면에서 각국의 노동자들을 서로 파견하고 기술연수, 어학연수들을 하는 일들이 있었다. 단순히 경제적 목적을 위함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연결 돼 있기 위함이었다. 이때 개발도상국을 돕는 목적으로도 이런 제도들이 활용 돼 왔는데, 이때도 파견되는 인력들은 자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이어야 했다. 

문화와 관습이 다르다보니 외국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한국에서 기술습득이나 상관습 이해를 목적으로 해외에 인력을 파견하고 싶어도 신용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은 파독이후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에 성공한다. 어렵사리 파독 된 이들이 잘 버텨줬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가 바로 신용이었다. 파독된 이들이 보낸 송금액도 자본을 늘려 경제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파독은 무엇보다 본격적 해외진출로의 첫 단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인도 나가면 된다는 인식을 한국인에게도, 외국인에게도 줬다. 그들의 가족들이 잘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도 ‘남들만큼만 살아보자, 빌어먹을 가난과 끝장을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외에서의 성공한 한국인들이 국내에 있는 이들을 고무시켰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 대한민국 국민 중 50년 전 한국과 비교해 볼 때 부자 아닌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 때는 누구나 내일을 걱정했다. 지금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서 순간순간을 헤쳐나가기에 바빴다. ‘오늘은 뭐하지, 내일은 뭐할까’란 질문은 사치스러웠다./사진=연합뉴스


베트남 파병 : 경제발전의 든든한 토양 제공

국가가 세금을 걷어 쓰는 비용 중에 가장 1순위로 쓰는 비용이 있다.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다. 이는 외부국가의 폭력으로부터 국가를 성립한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안전보장은 국가의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재정지출 1순위는 언제나 안보일 수 밖에 없다. 100년 아니라 1,000년에 한번 군대를 쓸 일이 있더라도 군에 대한 비용은 언제나 1순위 일수 밖에 없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처음 시작됐다. 이때만 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 국가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안보도 마찬가지였다. 해방될 쯤의 한국은 일제가 산업기반시설은 모두 북쪽에 두고, 남쪽에는 농사를 주로 지었기 때문에 경제력 차이가 많이 났다. 이 산업기반시설의 차이 때문에 초기 북한은 부유했고 한국은 가난했다. 그러다보니 무기를 비롯한 군대의 재정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해방이후부터 계속해서 남침을 꿈꿔왔고, 한국으로서는 이를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늘 역부족이었다. 돈도 없고, 무기도 없고, 맨손으로라도 국가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경제사정이 아무리 나빠도, 안보문제를 소홀히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보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다. 
 
6.25사변이 발발할때도 그랬지만 미군의 존재는 한반도에서 전쟁억제력을 갖는 가장 중요한 존재다. 만약 한국에서 미군이 빠진다면 지금도 우리는 안보비용으로 현재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야할 것이다. 625때도 미군들이 빠지면서 전쟁의 시발점이 됐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미군이 베트남으로 병력을 빼려고 했었다. 한국 입장으로서는 미군을 여기에 붙잡아두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했다. 어렵사리 경제발전 토양을 만들고 있는데 다시 전쟁의 참화가 발생해서는 안됐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한국군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거기 가야할 미군을 한국에 남기자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도 국내 여론에 민감했던터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위기가 기회란 말이 있듯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되돌아보면 참 좋은것들이 많았다. 한국은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625사변에 참전해 한국을 지켜준 자유우방에 빚도 어느 정도 갚게 됐고, 미군과의 작전수행으로 선진국의 군사작전을 배웠다. 

또 미군이 무기와 보급을 제공함으로써 월남에 있던 한국군 뿐아니라 한국에 있던 병사들의 무기도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월남에 참전한 이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군대는 보급이 형편없어서 군에가면 살이 빠지기 일수였다. 군에 보낸 가족들의 걱정은 늘 잘먹고 다니는지가 걱정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들은 배고픔 뿐 아니라 파병 수당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나. 하지만 당시 한국 사정상 참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봐도 자본은 희소했고 노동은 넘쳐났으므로 이 둘을 조화시킬 방안도 필요했다. 파병을 통해 국내 유입된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듯, 자유진영 동맹들은 한국 참전에 대해 화답을 해왔다. 무역수출조건을 한국에게만 특별히 개선시켜준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일반특혜관세를 인정해 경제성장으로 중진국 수준이 되고나서도 한동안 이 지위를 인정해 한국이 경제적 혜택을 많이 누렸다. 
 
결론적으로 베트남 파병은 단지 돈 때문에 목숨을 건게 아니다. 베트남전은 우리의 안보, 생명과 직결된 전쟁이었다.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수행한 것은 베트남 땅에서 수행한 또 다른 한국의 전쟁(Korea‘s  War)이었다. 우리는 베트남이라는 큰 고지는 빼앗겼지만 긴 전쟁에는 승리했다. 그때 우리 군인들의 희생으로 지금 베트남 경제를 한국인들이 좌우하고 있다.

  
▲ 한국이란 나라는 6.25사변(Korea War)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 나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상품, 사람, 지식 등 만나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그나마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로 미국의 원조를 통해 근근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으나, 주변국 중 한국에 투자해줄만한 나라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로공단 - 이에 대응해 마산자유무역지대(Free Trade Zone) 

구로공단은 한국 수출공단 제 1단지로 한국 경제사에 대단히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경남 마산에 있는 마산무역지대로 시선을 옮겨 공단이나 자유무역지대가 경제발전에 어떻게 뿌리가 됐는지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마산자유무역지대가 있기 전 마산은 그저 작은 항구도시로 농사짓고 물고기 잡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아실겁니다. 한일합섬이나 노키아와 같은 브랜드 말입니다. 마산에 자유무역지대가 지정되고나서 경남 일대의 노동자들은 전부 이곳에 모여살았습니다. 마산에 창동이란 곳이 있는데 마산이 80년대 후반 7대 대도시정도가 될 때는 지금 명동수준으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지방 상권인 창동 땅값이 전국 1,2위를 다툴정도였습니다.

6.25 전후만 해도 지금 젊은 분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국민들도 돌을 깨서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하천에서 큰 돌주워와서 손으로 돌 부수고, 돌 부수다가 손 찢어지고.. 티비나 인터넷에서만 보셨겠지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남들만큼 살아보겠다고, 밥 굶지는 말자고 공장이 들어서는 마산으로 속속 모입니다. 

이 자유무역지대가 생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길 통해서 먹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한일합섬 같은 곳은 대기업에 속했습니다. 애플이 나오기 전까지 전세계 휴대폰 시장을 석권하던 NOKIA도 여기 마산 자유무역지대에 속했습니다. 한국을 제외하고, 어느나라를 가든 노키아 휴대폰을 쓰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 때였습니다.

덕분에 마산은 얼마 전까지 거제정도의 경제수준을 누리던 곳이었습니다.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버니 주변 학교나 시설개선에 투자도 많이하고, 이 주변으로 사람도 문화도 발달하고 이 주변에 없는게 없습니다. 제가 아는 노인 한분은 자유무역지대가 주변에 있음으로 인해서 퇴직금을 7번이나 받았다고 하십니다. 

부정수급이 아니라 이 회사에서 일하다가 회사사정이 어려우면 다른 곳에가서 일하고, 또 다른 곳에가서 일하다가 사정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면 퇴직하고 또 입사하는 겁니다. 그게 그 분의 자랑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늙은 나이까지 사람 구실했다며, 쓸모가 있었다는 자랑입니다. 회사가 넘쳐나는데 무슨 실직걱정을 했겠습니까, 맘에 안들면 때려치던 판이었다는데 말이죠.

경제자유지대가 만들어질 때쯤 그 주변도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사글셋방 얻어서 하나둘 모여서 버티고, 그렇게 돈 모아서 집에 보내고 저축하고 그렇게들 살아갔습니다. 이 자유무역지대가 처음에는 이렇게 성공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하던 한국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온 덕입니다. 이게 구로공단, 마산 자유무역지대 뿐이겠습니까? 전국에 이런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노동자들의 치열한 노력이 경제발전의 뿌리가 됐습니다.

또 기업가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나는 당시 일하던 분을통해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마산에 홍수가 크게 나서, 한일합섬이 물에 잠길 위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말단부터 사장까지 됐던 사람이 참 부지런했는데, 홍수가 나던 날 아침에 소식을 듣고 출근을 했더니 부산에 사는 사람이 공장에 와서 이미 청소를 하고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비온다는 얘기는 전날 저녁에나 들었는데 알고보니 부산에 갔던 사장이 새벽부터 걸어서 걱정이 돼 마산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길이 나지도 않았고, 물론 차도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기살기로 기업을 지킨 이들 또한 경제발전의 중요한 뿌리가 됐습니다. 

  
▲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미군이 베트남으로 주한미군 병력을 빼려고 했었다. 한국 입장으로서는 미군을 여기에 붙잡아두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했다. 어렵사리 경제발전 토양을 만들고 있는데 다시 전쟁의 참화가 발생해서는 안됐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군을 베트남으로 보내자는 결단을 했다.

중동 근로자 : 위기의 한국을 구하다

1970년대 한국은 두차례 오일쇼크를 맞는다. 이는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20세기 후반, 돈이란 석유라해도 다름이 없는데, 당시 산유국들의 담합으로 전세계 석유의 가격이 4배 가까이 인상됐다. 산유국의 지대추구로 석유 값이 올라가자 전세계 경제가 얼면서 돈이 증발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경제개발 계획 후반기로 큰 사업은 많이 벌려뒀고 돈은 많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하는데 석유라는 돈이 나는 중동말고는 달리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당시 중동은 석유를 팔아 돈은 남아도는데, 이 석유가 언제까지 날지 알 수 없어 사회기반시설이 많이 필요했다. 석유로 번 돈으로 발주를 하는데도 전 세계 건설사들의 반응이 영시원치 않았다. 너무 더워 일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더 준데도 하겠다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날이 너무 더워 일하기 힘들고, 물먹기도 쉽지 않아 건설하기 좋지 않다’고 평가되던 곳을 한국인들이 가서 ‘날이 더우면 밤에 일하고, 물은 비행기로 날라서 먹고, 모래는 현지에서 조달해서 쓰면 되는 곳’으로 인식을 바꿨다. 

미국에서 사막위에 라스베가스를 쌓아올린 신화가 한국인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오일쇼크를 무사히 넘겼다. 이때는 큰 위기였다. 애써 만든 중화학 공업이 수포로 돌아갈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중동의 많은 건설사업에 한국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것도 앞에서 말했듯이 독일에서 한국인 노동자가 인정받았던 것이 나중에 영향을 줬던 것처럼, 중동에서의 건설 경험이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업에서도 한국인들에게 기회를 주게 한 것이다. 신뢰가 시장을 이렇게 형성한다. 별것 없는 길에서 누구하나가 국밥집을 하면서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팔면, 거길 지다나니는 사람들이 하나둘 믿고 또 오게 된다. 

그럼 거기 사람들이 모이는걸 보고 또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렇게 하나둘 모이다보니 길이 생기고 시장이 되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시장이란 것이 알고보면 장사를 하던 한두 사람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중동이나 세계시장에서 하는 사업들도 처음의 이 ‘신뢰’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알고 보면 그때 중동에서 횟불을 들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도로스 : 경제발전의 최고 주역

마도로스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한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다. 한국은 625이후로 완전한 섬나라가 됐다. 한국이 고립된 상태에서 죽지않고 살기위해서는 어떻게든 외국으로 연결되야 하는데 그 통로는 해로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한국은 그때까지 육로를 통한 중국밖에 몰라 바다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육지에서 일하는 것이 보편화된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1950년대만해도 캄보디아가 한국에 원조하는 나라였다. 당시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고, 바다로 나가서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어하던 이들이 배를 탔다. 배를 타는 일은 지금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육지에서는 예외적인 일이 바다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는 이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이들이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갔다. 그렇게 용기를 낸 이들이 한국과 세계를 연결해 냈다.

배를 탔던 이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의 문화들을 한국으로 다 가지고 왔다.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항구는 늘 부산했다. 고립된 한국에 새로운 문화와 동경이 배를 통해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은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다. 해외물을 먹은 이들이라면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마도로스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들이 가는 곳은 늘 호화로웠다. 목숨을 걸고 번 돈이었으니 가치가 큰 것은 당연했다.

당시 모험심에 배를 탔던 이들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선사에 많은 한국인들이 취직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세계 물류에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한국 물류회사들이 세계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에 해외로 나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당시의 신문물이 국내로 들어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것도 이들이다. 

이런 것은 그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입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그들이 번 돈이 150만 달러였고 국내 전체 양곡수입액이 2000만 달러였으니, 그들이 바다에서 국민들이 먹을 쌀을 수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이런 이들의 바다를 향한 모험정신이, 기업가정신이 한국 경제의 뿌리가 됐다.

  
▲ 아무것도 없이 경제적 부국으로 도약한 지금, 왜 많은 것을 가진 지금은 성장하기 어려운지 되돌아 봐야 한다./사진=연합뉴스

나가며

최악의 폭력이란 바로 가난이다. 나는 경제발전의 뿌리를 이룬 이들이 전쟁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폭력을 체험하고 나서 이것에 맞서 싸운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에 간 군인들이나 기술자들, 중동에서 힘들게 일한 이들, 구로공단, 평화시장, 자유무역지대, 광부들 등 한국인들은 하루하루를 최악의 폭력인 가난과 맞서 싸워왔다. 이 가난이라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 밖에 없다. 그렇게들 살아남기위해 발버둥쳐왔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전쟁과 평화를 불문하고 살아왔다. 

전쟁이후 당시에는 사회군인들과 장애인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그 누구도 남탓을 할 수 없었다. 사회를 둘러보면 누가봐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길거리만 나가도 내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고통과 가난은 도처에 널려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경제 발전의 뿌리를 찾는 노력들은 우리의 거리가 너무 아름답고 멋지게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거리를 지나다니다보면 자기보다 멋진 사람들, 물건들만 널려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세상에 살기에 때문에 사람들이 질투를 하고 살아간다. 

지금 뿌리를 찾으려는 이 노력들은 우리 경제발전의 동력이 외적인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찾자는 것에 있다. 그때를 되돌아보며 다시금 되새긴다. 경제발전의 뿌리는 ‘지금도 여전히 내손에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온전히 내 손에 있다.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


(이 글은 7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연속세미나에서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이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

[손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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