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자유경제원 / 2017-02-04 / 조회: 15,061       조선펍
▲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기념식에 참석한 여공들. 박정희 시대의 ‘산업전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경제발전에 따라 임금 인상 등으로 보답을 받으면서 계층이동에 성공했다.
  1. 박정희 백년 대 공산주의 백년
  
  2017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1917년으로부터 딱 100주년이 되는 해다.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 즉 반공을 기치로 1961년 44세의 나이에 집권에 성공한 그는 1979년 62세의 나이로 서거하기까지 18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2017년, 그가 서거한 지 이미 38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그가 남긴 유산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한편에서는 그를 근대화의 아버지라 추앙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친일파 혹은 독재자라 부르며 폄훼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1917년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잡은 해였다. 박정희 백년 그리고 볼셰비키 백년은 공간을 달리했지만, 시간을 공유하며 한반도에서 격렬히 대결했다. 
  
  그 백년 동안 박정희는 단지 18년간 권력을 잡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박정희 이후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집권 기간을 박정희 시대의 연장이라 간주한다면 그가 만든 체제는 1993년 김영삼이 집권할 때까지 32년간 유지되었다. 만약 1987년 민주화를 기점으로 박정희 체제가 정리된 것이라면 그의 체제는 26년간 유지된 셈이다. 
  
  백년의 세월을 기준으로 봤을 때 분명 박정희 체제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만 존재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박정희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며 최빈국 대한민국을 선진국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박정희의 산업화에 기초해 대규모 중산층이 출현하면서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 문화나 복지의 영역까지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되기까지 무려 74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전 세계를 공산화시켰다. 그 과정의 일환으로 북한에서도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 2017년 현재까지 장장 72년간 김일성과 그 아들 그리고 그 손자로 권력이 이어지며 집권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공산권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정권은 2017년 현재 여전히 건재하다.
  
  오늘날 북한은 한편으로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넘보며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북한은 주민의 기본적인 생계도 책임지지 못하여 탈북자를 양산하고 있다. 중국 국경을 배회하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의 앙상한 ‘꽃제비’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라 건설된 ‘노동자 천국’ 주민이 왜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고 있는가? 
  
  박정희 백년과 공산주의 백년은 바로 이 대목에서 결정적 차이를 드러낸다. 이 글은 이 차이에 주목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과연 노동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글이다. 만약 박정희 시대의 노동자들이 정말 ‘착취’를 당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광범한 중산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분석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는 박정희 시대의 전반부 즉 경공업이 발전하던 1960년대의 노동자 사례를 평화시장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둘째는 박정희 시대의 후반부 즉 중화학공업이 발전하던 1970년대의 노동자 사례를 현대중공업 경우를 중심으로 확인한다. 마지막으로는 이 두 시기를 연결하면서 박정희 집권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한 시기까지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과연 어떤 대접을 받아 왔는지를 시계열적 통계자료로 검토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박정희가 이끈 자본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은 노동자를 착취하기는커녕 그들을 중산층으로 육성시키며 국가발전의 핵심 역량으로 키워냈다. 물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은 빈익빈·부익부 양극화를 겪으며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1979년 서거한 박정희와는 무관한 일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발생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오늘날의 양극화 책임을 38년 전 세상을 떠난 박정희에게 떠넘기고 있다.
  
  
  2. ‘착취’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 연구
  
  ‘착취’ (expoitation)라는 용어는 널리 쓰이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정의하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또한 ‘착취’는 공산주의 이론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착취는 생산수단 즉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만 하는 사람 즉 노동자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의 성과를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일한 만큼 보상을 안 해 주면 ‘착취’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은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자원의 상대적 희소성 문제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만 계급을 구분한 다음 계급 간의 영합적(zero-sum) 갈등관계 즉 양극화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라 마침내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투쟁이 등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혁명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이론에 연연하며 착취를 정의하는 시도는 불필요하다. 
  
  대신 여기서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착취’에 접근하고자 한다. 만약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다시 말해 일한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그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열악한 상황으로 치달아야 한다. 이를 계층적 기준에서 말하면 착취당하는 사람은 시간이 가면서 계층의 사다리를 내려갈 수밖에 없다. 만약 시간이 가면서 삶의 조건이 현상을 유지하든가 혹은 상대적으로 개선된다면 그는 착취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나 혹은 사다리를 올라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노동자 특히 ‘착취’에 관한 분석은 지금까지 계급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선입견을 따라 노동자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접근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는 전혀 괴리된 분석 결과를 내놓는다. 이들은, 기업은 성장했지만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유례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자본의 ‘착취’ 대상이 되어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는 계급주의적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집권한 초기의 절대빈곤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국민 대부분이 ‘마이 카’ 그리고 ‘마이 홈’을 누리는 시대를 거쳐, 이제는 휴가철이 되면 해외여행을 가느라 국제공항이 북새통이 되는 국가로 변신했다. 만약 사회의 상위 계층만이 해외여행과 같은 특전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런 모습이 나타날 까닭이 없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허리를 차지하는 절대 다수의 중산층이 참여하지 않고는 이런 현상이 가시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산층을 구성하는 집단에 화이트칼라로 대표되는 사무직과 관리직만 포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블루칼라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급여와 혜택을 누리며 중산층에 편입되어 있다. 그 결과 일부에서는 이들을 심지어 ‘노동귀족’이라고까지 부르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산업화의 주역인 노동자 집단이 어떻게 ‘착취’를 당하지 않고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는지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3. 박정희 시대의 경공업 노동자 : 봉제산업의 전태일 그리고 평화시장의 경우
  
1976년 한국수출공단 안에 있는 나염공장에 들러 기능공들의 염색도안과정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기능공 양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박정희 시대의 초반 즉 1960년대의 산업화는 경공업에 의해 주도되었다. 경공업 가운데서도 재봉틀로 원단을 가공해 의복을 만드는 봉제산업이 당시를 대표하는 산업이다. 박정희 정부는 봉제품 수출을 위해 1964년 통칭 ‘구로공단’이라 불린 한국수출산업공단을 새로이 조성하고 수많은 여성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한편, 내수를 위한 봉제품 생산은 6・25 피란민이 모여 살던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역시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여성 노동자들을 당시에는 ‘여공’이라 불렀다.
  
  봉제산업 여공의 삶에 관한 기록은 많다. 신순애가 2014년 저술한 《열세 살 여공의 삶》 (한겨레) 및 김원이 2005년 저술한 《그녀들의 반역사》 (이매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모두 노동운동 특히 노동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전제로 주관적으로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기록은 당시의 객관적 노동시장의 상황 즉 일자리는 없는데 일할 사람이 넘쳐나는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 (2009 신판) 또한 마찬가지다. 조영래의 평전을 읽으면 전태일 그리고 당시 평화시장 근로자들이 겪은 삶의 조건에 독자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전태일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데 반해 그를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전태일 그리고 여공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경공업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는 인식을 가슴속 깊이 심어준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의 내용을 기초로 전태일의 경력이동 및 임금상승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 류석춘은 《월간조선》 2016년 12월호에 발표한 글 〈전태일 평전의 3가지 함정〉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따졌다. 다음은 《전태일 평전》을 꼼꼼히 분석한 류석춘의 결론이다. 
  
  “16살이라는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열 배나 받게 해 주었다. …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6살이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살이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3000원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해 분신자살했지만, 《전태일 평전》은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제학자 박기성 교수가 전태일 분신 46주기를 맞아 자유경제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에 제시된 다음 인용문이 착취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뒷받침한다. 〈전태일의 월급 2만3천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6천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7천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6천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대한민국 평균 소득의 3배를 넘게 받던 사람이 착취를 당했다고? 
  
  물론 전태일의 임금상승과 경력이동은 《평전》이 기술하고 있는 당시 평화시장의 일반적 경력이동 패턴과 비교해 매우 빠른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5년에서 2년, 그리고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에서 ‘시다’로부터 ‘미싱사’까지 올라가는 데 최소 4.5년 최대 6년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승진의 사다리를 전태일은 불과 2년 만에 모두 올라갔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아닌 평화시장의 평범한 다른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앞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는 아무리 늦어도 최대 6년이면 ‘시다’에서 ‘미싱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최대 2년 그리고 다시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최대 4년이 걸린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전》은 전태일이 시다로 처음 받은 월급이 1500원, ‘미싱보조’가 되어 처음 받은 월급이 3000원, 그리고 ‘미싱사’가 처음 되어 받은 월급이 7000원이라고 각각 밝히고 있다. 물론 《평전》이 제시하는 전태일의 보수는 각각의 직책에 따른 월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이 아닌 다른 노동자 누구라도 그러한 직책에 따른 보수를 동일하게 받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여성 노동자 누구라도 ‘시다’로 일을 시작해 ‘미싱보조’를 거쳐 마침내 ‘미싱사’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최대 6년이고, 그 기간에 월급은 1500원부터 3000원을 거쳐 7000원으로 즉 6년 만에 임금이 4.7배 상승함을 알 수 있다. 평화시장의 노동자는 누구라도 6년 만에 임금이 5배 가까이 상승했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누구에게도 ‘착취’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없다. 
  
  《전태일 평전》 내용을 꼼꼼히 따져 본 결과는 1960년대 봉제산업 노동자의 상황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착취’라는 단어가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청계천 평화시장 여공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상황을 구로공단 여공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농촌의 과잉인구로 존재하던 젊은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마침내 구로공단 혹은 평화시장에 어렵사리 취직해 힘들게 노동했지만, 경력의 상승에 동반한 임금의 상승을 통해 그들은 시골에 있는 부모의 생활비 그리고 형제들의 학비를 대며 계층의 사다리를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착취’라고?
  
  
  4.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공업 노동자 : 조선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 경우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급속히 상승했다. 사진은 1987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모습.
  박정희 시대의 후반부 즉 1970년대의 산업화는 중화학공업에 의해 주도되었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박정희는 철강, 석유화학, 조선, 전자, 기계(자동차 포함), 비철금속이라는 6개 업종의 산업을 일으켰다. 나아가 그는 이 새로운 중화학공업에 종사할 노동자들을 ‘산업전사’ 혹은 ‘기능공’이라 부르며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이들은 1960년대 경공업 분야의 여성 노동자 즉 ‘여공’들과는 전혀 질이 다른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들이었다. 1960년대 여공들은 특별한 기술훈련을 거치지 않고 생산현장에 OJT(On the Job Training) 방식으로 바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능공들은 ‘공업고등학교’ 혹은 ‘직업훈련원’을 거치며 일정한 수준의 기술을 습득해야만 생산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1973년 12월 ‘국가기술자격법’을 제정하고 엄격한 기능·기술 자격제도를 도입했다. 기능공 자격에 대한 제도의 정비와 함께 당시 양성된 기능공의 규모는 엄청났다. 서울대 사회학과 김진균 교수가 1978년 《한국 사회 인구와 발전》 제2권에 발표한 논문 〈인력개발〉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 추가로 필요한 기능공 인력은 도합 134만명이었다. 이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통로가 두 가지로 마련되었다. 하나는 ‘학교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훈련’이다. 
  
  ‘학교교육’은 실업계 고등학교 가운데 공업고등학교 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을 기준으로 방위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교육하는 ‘기계공고’가 시도별로 19개, 중동진출에 필요한 기술을 교육하는 ‘시범공고’가 시도별로 11개, 그리고 금오공고·구미전자공고·진주건설공고·금파화학공고 등과 같은 ‘특성화 공고’가 전국적으로 12개 만들어졌다. 여기에 더해 전국에 분포한 일반 공고 55개교의 교육이 강화됐다. 그렇게 배출된 공고생이 1979년 한 해에만 5만 명가량이었다.
  
  다른 한편 ‘직업훈련’ 또한 강화되었다. 군이나 정부기관 그리고 지자체 등이 운영하는 ‘공공직업훈련’ 및 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정부가 정한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 교육하면 공공직업훈련을 마친 것처럼 ‘인정’해 주는 ‘사업내직업훈련’ 방식이 선택되었다. 공공직업훈련을 위해서는 국제원조 자금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중앙직업훈련원(1968), 독일은 한독부산직업공공훈련원(1971), 미국은 용산의 정수직업훈련원(1973), 일본은 대전직업훈련원(1976), 벨기에는 한백창원직업훈련원(1976) 등의 설립을 지원했다. 이에 더해 아시아개발은행(ADB) 및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지원으로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전국에 모두 20개의 공공직업훈련원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정택수가 2008년 출판한 《직업능력개발제도의 변천과 과제》는 직업훈련을 통해 배출된 기능공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준다. 그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즉 3차 및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10년 동안 ‘직업훈련’은 약 81만명의 기능공을 배출하는 실적을 쌓았다. 같은 기간 ‘공고’ 교육을 통해 충원된 기능공의 규모 또한 약 50만명에 달했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기능공 양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울산, 마산, 창원 등과 같은 지역의 중화학공업단지에 당시 신설되고 있던 오늘날의 대기업 공장에 모두 취업했다. 또한 이들은 1987년을 전후로 학생운동과 연대해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했다. 당시 지속된 한국경제의 호황과 함께 전개된 노동운동 덕택에 이들에 대한 처우는 전반적으로 급상승했다. 그러나 한편 이들은 1997년에 들이닥친 외환위기의 후폭풍으로 구조조정 즉 해고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노동자 집단의 양극화 과정에서 잘나가는 대기업 부문의 정규직 숙련 노동자를 대표하는 집단이 바로 이들 기능공 출신들이다. 오늘날 양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이들은 심지어 ‘노동귀족’이라는 호칭까지 얻을 정도로 임금은 물론 복지수준도 높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착취’는커녕 안정된 직장과 고임금을 누리는 중산층 노동자로 성장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유광호·류석춘은 2015년 《동서연구》 27권 3호에 〈정주영의 기능공 양성과 중산층 사회의 등장 : 현대중공업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기능공을 대규모로 고용하는 대표적 장치산업인 조선업에서 지난 40년간 진행된 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소속 계층의 변화를 분석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1973년부터 1983년까지 현대중공업에 생산직으로 입사하여 2015년 현재까지 근속하고 있는 기능공 20명을 찾아, 이들을 대상으로 1) 입사 당시의 소속 계층 2) 임금 소득을 비롯한 제반 처우의 변화 3) 2015년 현재의 소속계층을 추적했다.
  
  이들 20명의 소속 계층에 대한 분석 결과는 〈표 1〉에 제시되어 있다. 입사할 당시 이들의 소속 계층은 ‘중상’ 1명, ‘중중’ 4명, ‘중하’ 9명, 그리고 ‘하’ 6명이었다. 그러나 2015년 현재 이들은 모두 ‘중중’ 계층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입사 당시 ‘중중’ 계층보다 아래 계층에 속해 있던 ‘중하’ 9명 및 ‘하’ 6명이 오늘날에는 ‘중중’ 계층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전체 조사대상 20명 가운데 이들 15명 즉 75%가 계층의 상승이동을 경험한 셈이다. 
 

  유광호·류석춘은 또한 현대중공업 인력개발팀의 협조로 1973년 입사하여 2015년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는 기능공 출신 생산직 직원 한 사람의 연도별 시계열 ‘기본급’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림 1〉은 이렇게 얻은 자료로부터 현대중공업 기능공의 월평균임금을 도시근로자가구 월평균경상소득과 비교한 결과다. 이 그림이 제공하는 정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우선, 입사초기부터 현대중공업 기능공은 도시근로자가구의 평균소득을 상회하는 보수를 받았다. 다음,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면서부터 그 차이가 조금씩 커졌음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조가 회사와 쟁의를 하지 않고 협조적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1995년부터 2013년까지 그 차이는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넓어지며 기능공의 소득이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착취’라는 말을 전혀 끄집어낼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 논문이 사례로 분석한 현대중공업 기능공의 임금상승 상황은 박정희가 혹은 대한민국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절대 말할 수 없게 한다. 박정희는 1970년대 중하층 출신의 젊은이들이 숙련을 가질 수 있도록 기술·기능 교육을 제공했고 또한 일자리를 제공해 결국에는 이들을 중산층으로 편입시키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아나가서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현대중공업이라는 특정한 회사에 소속된 특정한 기능공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당시 새로 시작한 중화학공업 분야의 공장에 취직한 모든 기능공들이 공유한 경험이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40년이 지난 지금 엄청난 임금과 복지를 누리며 해외여행을 즐기는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계층의 상승이동을 경험한 노동자들의 규모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로만 국한해서 따져도 최소 1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5. 한계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 : 시계열 통계자료 (1963-1999)
  
중국 베이징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 이제 한국 노동자들은 값싸고 거대한 중국·인도의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앞의 현대중공업 노동자에 대한 분석 결과를 두고 여전히 일부 독자는 매우 제한적인 분야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따라 탄생하여 오늘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 기업에 속한다. 비록 조선업의 국제적 여건 변화 그리고 노사관계의 악화 때문에 2017년 현재 심각한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고는 있지만 분명 현대중공업은 당시 출발한 기업 가운데 가장 성공한 기업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경우는 어떤가? 하나하나의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앞에서와 같은 분석을 일일이 반복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그들이 일한 만큼의 보상을 적절히 받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거시적인 통계자료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시한 〈그림 2〉는 성신여대 경제학부 박기성 (Park Ki Seung) 교수가 2007년 영문학술지 《Pacific Economic Review》 12권 5호에 〈한국의 노사관계와 경제성장(Industrial Relation and Economic Growth in Korea)〉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 등장하는 도표다. 이 도표는 1963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나라에서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임금이 동반해서 상승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노동의 한계생산성은 노동을 한 단위 더 투입할 때 생산이 얼마나 증가하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따라서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하면 그만큼 기업의 생산이 증가한다. 물론, 생산이 증가하면 기업의 수익도 늘어난다. 이때 노동에 대한 보수가 늘어나면 노동은 적절한 보상을 받는 셈이다. 만약 이때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노동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이 기여한 몫 즉 노동의 한계생산성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노동에 대한 ‘착취’가 발생한 경우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도표는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 1999년까지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었음을 확인해 주는 객관적 자료다. 
  
  오히려 이 도표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던 해부터 1997년 외환위기가 오는 해까지 약 10년간 임금의 상승이 노동의 한계생산성 상승을 상당한 수준으로 앞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기간에는 노동이 생산에 기여한 몫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아갔다. 이와 같은 상황이 약 10년간 누적되면서 결국에는 1997년의 경제위기가 발생하였음을 이 도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표는 위기 이후 다시 두 지표의 상승이 수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따라서 위기를 매개로 노동이 기여한 만큼의 임금을 받아가도록 조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도표는 대한민국이 노동자를 ‘착취’하기는커녕 임금의 상승이 노동의 한계생산성 상승을 웃도는 기간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이나 지속되면서 경제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표다. 이 상황을 두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말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6. 맺는말 : 노동조합은 고용세습 버리고 노동보국(勞動報國) 나서야
  
  오늘날 고임금과 복지, 그리고 고용의 안정까지 보장받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뿌리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정책에 따른 기능공 양성이었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동자’ 하면 경공업 분야에서 특별한 기술 없이 고강도·장시간 노동을 버텨낸 여공과 같은 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으레 ‘착취’당하는 대상으로 치부돼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 그려진다. 
  
  동시에 오늘날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 파업을 무기로 임금 인상과 복지를 요구하며 정리해고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는 대기업의 강성 노조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인식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2017년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국내외의 어려운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업이야 망하든 말든, 비정규직이야 죽든 말든 기득권을 위해 파업도 마다 않는 노조를 대상으로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노조 권력에 밀려 기업이 불황에 해고를 못하면 호황에 고용을 늘릴 생각도 할 수 없다. 한 번 채용하면 은퇴할 때까지 고용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임금과 복지도 매년 꼬박꼬박 올라가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경제는 생물(生物)이다. 매 순간 상황이 변하고 매 순간 경쟁자가 나타난다. 
  
  중국과 인도라는 값싸고 거대한 인력을 가진 경쟁국의 등장에 한국은 지금 턱밑까지 물이 찬 상황이다. 그럼에도 노조가 쳐놓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발목이 잡혀 우리 경제는 지금 익사(溺死) 직전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노조의 역할이 없더라도 우리나라 노동자는 처음부터 ‘착취’의 대상이 아니었다. 
  
  요즘의 대기업 노조는 조합원 자녀가 입사를 지원하면 가산점을 주어 고용을 세습하는 악습을 관행으로 만들고 있다. 이른바 ‘착취’당했다는 노동자 부모가 자식이 대(代)를 이어 또 다시 ‘착취’당하도록 같은 회사에 취직시키자는 제도를 노조가 물밑에서 요구하여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기업 노동자는 더 이상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세습’의 대상이 되었다.
  
  고용 세습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경공업과 달리 1970년대 중화학공업은 기술을 가진 기능 인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당시 인력은 넘쳤지만 노동시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인력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규모 자금을 투자한 중화학 공장에서 일할 기능 인력의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공업고등학교와 직업훈련원을 통한 기술 인력의 공급이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렇게 ‘공고’와 ‘직훈(職訓)’을 통해 양성된 기능 인력의 규모는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약 100만명 규모였다. 그 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기까지 또 다른 100만명이 양성되었다. 이들 200만명의 기능 인력은 당시 정부의 정책에 따라 집중적으로 중화학 산업공단이 조성된 마산·창원·울산 지역에 대부분 채용되었다.
  
  당시는 기술을 가진 일손이 모자랐지 그들이 일할 일자리가 모자라지 않았다. 이들은 농촌의 어려운 가정 출신으로 교육과정에서 장학금이나 보조금 등의 혜택은 물론, 군복무를 대신해 산업체에서 5년간 일하는 특혜도 받았다. 국가적 지원으로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기도 했고, 중동 붐을 타고 외화를 벌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들과 이들의 후예가 오늘날 고용을 세습하는 노조를 만들고, 막무가내의 강성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노조 설립을 위해 1987년 ‘대투쟁’을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고, 노조가 제도화하자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들의 고용을 보장받은 것도 이들이었다. 
  
  대기업 노조에 당부한다. 제발 ‘형님들, 삼촌들’ 하며 일자리 달라는 청년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말라. 국가의 지원으로 오늘날의 자리까지 왔으니 이제는 국가를 위해 보답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임금피크제 등의 노동개혁 도입에 동의해 기업만 보국(報國)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도 보국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오늘날 등장한 ‘노동귀족’의 배후에는 노동자를 ‘착취’하기는커녕 중산층으로 키워낸 박정희가 존재한다. 그마저도 박정희는 이를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어 냈다. 공산주의 북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박정희 백년이 공산주의 백년을 압도하는 대목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박정희는 노동자를 결코 ‘착취’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들을 ‘마이 홈’ ‘마이 카’ 그리고 휴가철에 해외여행을 누리는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지도자로 평가받아야 한다.⊙
 
[월간조선 2017년 2월호 / 글=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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