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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는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늘 시들시들한 모습인데요. 성장을 거의 못합니다. 하지만 위기 때만 되면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고 엔화를 사들입니다. 일본의 엔화는 가장 안전한 자산이면서 일본은 가장 안전한 투자의 도피처가 되곤 합니다. 경제가 시들하면 그 나라 통화도 신뢰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반대입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약한 모습부터 살펴볼까요? IMF는 6월 발표된 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2020년 올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5.8%로 전망했습니다. 소득이 6%나 줄어든다는 말이죠. 블룸버그의 예측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2분기, 즉 4월부터 6월까지의 성장률을 -21.5%로 내다봤습니다. 20% 넘게 소득이 줄어든다는 거죠. 여러 해 동안 저성장이 계속되어 온 뒤 끝이라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래프는 2000년 이후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의 경제성장률을 보여줍니다. 척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성장률은 최하입니다. 대부분 2% 아래이고 마이너스일 때도 제법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던 경제규모가 중국에게 따라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중국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입니다.
성장률이 이런데도 일본 돈 엔화의 위상은 튼튼합니다. 세계의 주가가 급락했을 때 엔화 가치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6월 8일부터 11일까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미국 주식가격을 보여주는 다우존스지수가 27,572에서 25,128로 8.9% 떨어졌습니다. 코로나의 2차 유행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미 달러에 대한 환율로 측정한 엔화의 가치는 1.5% 올랐습니다. 세상의 위험이 커진 만큼 엔화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가치도 오른 겁니다. 또 다른 안전자산인 금의 가치도 같은 기간 1.7% 올랐습니다. 같은 통화라도 멕시코 페소 가치의 변화율은 마이너스 5.6%, 즉 가치가 떨어진 겁니다. 위험할 때 가치가 떨어지는 멕시코 페소화는 위험자산이죠. 반면에 일본 엔화와 금은 위험할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성장률이 낮은 나라, 미래가 어두운 나라의 통화가치가 높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제의 성장률은 매우 낮은데 통화가치는 가장 높습니다.
게다가 일본 GDP에 대한 국가부채 비율 230%은1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습니다. 이 정도의 국가부채면 웬만한 나라는 국가부도 사태에 몰리게 됩니다. 국가부도 위기를 겪은 그리스는 181%, 아르헨티나는 52%입니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세계 최악 수준인데도 그 부채 조달의 수단인 일본 국채는 일본 엔화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안전자산입니다. 채권은 위험할수록 수익률이 높고, 안전할수록 수익률이 낮아집니다. 부도 확률이 높은 채권은 수익률까지 낮다면 누구도 인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국채는 세계에서 가장 수익률이 낮은 자산 중에 하나입니다. 낮은 수익률에도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를 기꺼이 인수하는 거죠. 그만큼 일본 국채는 안전 자산입니다. 국채 부도 확률을 반영하는 CDS 프리미엄도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5년 만기 국채의 6월 30일 CDS 프리미엄을 보면 일본은 19.0bps인데 그리스는 151, 이탈리아는 170입니다. 참고로 미국은 18.1, 우리 대한민국은 28.5입니다. 투자자들이 일본 국채에 대해서는 부도 위험이 거의 없다고 여긴다는 증거인 셈이죠.
왜 일본 경제는 이런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일본인들의 성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일본인은 저축을 많이 하는 국민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저축율이 2%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일본 경제가 승승장구할 때, 즉 1980년대 일본 가계의 저축률은 30% 이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습니다. 생산한 것의 30% 이상을 저축하니까 소비가 그만큼 적은 겁니다. 소비가 적다는 것은 저축이 많은 것이기도 하지만 수출이 많은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수출을 많이 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무역흑자를 누렸습니다. 그 돈으로 외국에 건물도 사고 회사도 사고 미국 국채도 사들였습니다.
이 그래프는 일본인의 해외 자산 규모입니다. 1990년대 이전 일본의 해외 자산은 마이너스였습니다. 빚을 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급격히 재산이 늘어서 1992년부터는 순채권국으로 바뀝니다. 2018년 현재로는 73조 달러의 대외순채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제 규모가 거의 3배에 달하는 중국은 아직 26조 달러입니다.
일본인들은 그 저축으로 해외 자산만 사들인 게 아닙니다.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도 사들였죠. 일본 국채 중 외국인 소유 비중은 12.8%에 불과합니다.2 그러니까 막대한 일본 국채는 대부분 일본 국민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돈을 찍어서 갚아도 된다는 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일본 국채는 GDP의 230%가 넘지만 부도날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게다가 지진이나 쓰나미가 났을 때 구호품을 받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성향도 상당히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부도를 낼 상황이 된다면 일본 국민이 기꺼이 그 국채를 인수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 지경에까지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글로벌 투자자들도 인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일본 국채를 기꺼이 인수하는 거겠죠.
이처럼 무너질 염려가 필요 없는 일본 경제이지만 성장률은 형편없습니다. 재산을 많이 모아 놓은 노인이 새로 사업을 벌리지는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의 전자산업, 자동차, 철강, 화학 등 제조업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동차, 전자, 부품, 소재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내놓을 만한 제품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 때 세계 최고의 제조업을 자랑하던 일본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노가미 다카시라는 사람이 <일본 전자 반도체 대붕괴의 교훈>이라는 책에서 설득력 있게 밝혔습니다. 여기서 그는 일본인들의 지나친 기술우선주의, 회의 문화를 듭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기술적으로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일단 제품을 출시하고 고쳐 나간다. 일본 기업이 제품을 출시할 때가 되면 이미 한국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했고 다음 단계의 제품을 출시했다. 이런 내용입니다.
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할 때가 많은데도 일본인들은 실패가 두려워 계속 앞뒤를 재는 데에 시간을 보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회의는 열심히 하지만 책임을 지기 싫어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히토시바시 대학의 요코 이시쿠라 교수가 제팬타임스(Japan Times)에 ‘Stop talking about innovation and act!’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혁신은 이제 그만하고 행동부터 하라. 이렇게 번역될 수 있겠는데 유노가미 가카시의 진단과 같은 맥락입니다. 회의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일본인의 습성은 1990년대까지는 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통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세상에 내놓고 고객의 요구에 따라 고쳐가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삼성과 LG가 그렇게 성공했습니다. 중국 기업들은 더 하지요. 그러니 일본인들의 습성대로 행동하는 기업은 설 자리가 없어진 겁니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과 중국 기업에 따라 잡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 데나 투자해서 실패를 거듭하는 것 보다는 투자를 안 하는 것이 더 낫죠. 하지만 투자를 잘해서 회사를 키우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일본인들은 열심히 생산을 해서 70%만 소비를 하고 나머지는 저축을 했습니다. 제품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수출된 겁니다. 그런데 저축한 돈이 국내에 투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잉저축, 잉여저축이 쌓이게 된 겁니다. 그 덕분에 재산은 많아졌는데 성장은 부진해졌습니다. 재산은 많은데 새로운 사업을 못 벌이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노인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 일본인들의 소극성을 심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잉여저축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일본 정부가 나섰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수입보다 지출을 많이 했습니다. 재정적자를 발생시킨 것이죠.
그 때문에 GDP의 230%를 넘는 국가부채가 쌓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는 초라합니다. 쓸데없이 돈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지방공항 같은 것을 만드는 데 계속 돈을 쏟아 부은 거예요. 일본의 1인당 공공자본가치는 46,700달러인데요. 34,200달러인 미국보다는 40%가 많고, 독일, 한국 보다는 거의 2배가 더 많습니다.3 공공 인프라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거지요. 당장은 뭔가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의 저축을 낭비한 셈입니다.
국가별 공적 자본 액수
이제는 일본도 안심 못한다는 평가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벌이가 줄어들다 보니 저축률도 많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면 쌓아 놓은 재산도 줄어들기 마련이죠. 하지만 일본 경제가 위험해진다는 조짐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 워낙 조심스러운 데다가 쌓아 놓은 돈이 많아서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 겸임교수
* 이 글은 2020.7.5 <김정호의 경제TV>로 방영된 <일본 경제의 두 얼굴. 저성장에도 엔화는 왜 안전자산인가? 일본 국채 수익률은 왜 마이너스인가?>의 텍스트입니다.
2 2019년 말. https://www.mof.go.jp/english/jgbs/reference/Others/holdings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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