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사 3부작 ① 고통과 광기의 시대, 1840~1976 아편전쟁에서 모택동까지

김정호 / 2020-03-24 / 조회: 1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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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PhZHkg_ugLI&t=1s


중국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중국 근현대사 3부작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1부는 고통과 광기의 시대,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76년 모택동 사망까지입니다. 2부는 미친 듯 돈 번 시대, 등소평의 집권부터 2013년 시진핑 집권 이전까지를 다룹니다. 3부는 중국몽의 시대, 2013년 시진핑 집권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를 다룹니다.


오늘은 1부 고통과 광기의 시대 편입니다. 지도자를 기준으로 하자면 장개석과 모택동 시대입니다. 중국은 원래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앵거스 매디슨이 추정한 자료에 의하면 1820년까지 중국은 세계 GDP의 35%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1/3이죠. 그러니까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는 당시로서는 모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거죠. 



그런데 1820년 무렵부터 중국의 비중은 갑자기 쪼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서유럽과 미국은 급상승하고 중국은 거의 수직 하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중국의 문제라기보다 서유럽이 급격히 부강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상업혁명, 스페인의 신대륙발견, 영국의 산업혁명 이런 사건들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이 급격히 강대국이 된 거죠. 특히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중국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이런 나라들의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중국은 문을 닫아 걸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중국의 상대적 비중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부강해진 나라들은 중국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인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승전의 대가로 홍콩을 빼앗았습니다. 광저우, 닝보, 상하이 등의 도시는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러시아 등도 중국을 유린했습니다.


그 다음은 일본입니다. 출발은 늦었지만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가장 공격적인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고요. 1937년에는 본토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했죠. 일본에 의해 중국과 장개석 군대는 철저히 유린당했습니다.


서양과 일본이 부강해지는 사이에 중국인들은 뭘 했을까요? 청 왕조는 그야말로 지지부진 우왕좌왕이었죠. 그 와중에도 각성한 중국의 청년들,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반란과 시위가 끊이지 않았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손중산, 즉 손문이었죠. 손문은 1911년 신해년에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를 부인하고 한족의 나라인 중화민국을 선언합니다. 중국 역사 최초로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 즉 공화국이 탄생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수도는 남경, 즉 난징이었으며 그 세력권은 남부였습니다. 북부는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북부의 군벌들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으로 통일을 이룬 주역이 장제스 또는 장개석입니다. 장개석은 기독교도였고 중화민국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명분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또 다른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입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레닌을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죠.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은 당시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던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등불 같았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도 이루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내자는 것이죠.


중국도 그랬습니다. 모택동은 토착 공산주의자이고 주은래, 등소평 같은 사람은 파리 유학을 가서 공산주의자가 되었죠. 중국 공산당이 설립된 것은 1921년입니다. 손문이 창당한 국민당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당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공산당원들도 국민당원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나 손문 사망 후 국민당을 장악한 장개석은 공산당을 적으로 여겼습니다. 공산당이 소련식 소비에트 국가를 만들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1931년 장시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장개석에게는 두 가지의 큰 골칫거리가 있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공산당이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일본과의 싸움보다 공산당 토벌에 더 힘을 쏟았습니다.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936년 시안사변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터집니다. 장개석이 시안 시찰에 나섰다가 감금을 당한 사건입니다. 공산당군을 토벌하라고 부사령관인 장쉐량을 시안으로 보내 놓고 격려차 시안을 갔는데 장쉐량이 오히려 장개석을 감금해버립니다. 공산당을 토벌하지 말고 그들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요구한 겁니다. 결국 장개석은 그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것이 제2차 국공합작입니다. 정부군과 공산당의 홍군은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지요. 1945년 드디어 일본이 항복을 했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하기는 하지만 그건 중국군의 승리라기보다는 일본의 패배였고 미군의 승리였습니다.


어쨌든 중화민국은 전승국의 지위에 오릅니다. 그 덕분에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과 함께 전후 국제질서를 세우는 데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은 날로 세력이 커가는 공산당을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 나라를 통째로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죠.


약체였던 중국공산당의 홍군이 결국 승리하는 데에 국공합작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산당은 정부군과 합작을 하면서 정부군의 장비와 돈, 각종 군사기밀들을 얻어 냈던 겁니다. 중국 공산당은 결국 국민당군에게 승리했고, 1949년 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 즉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탈출했죠. 그곳에서 임시정부를 만듭니다. 그것이 차이니스 타이베이, 즉 타이완입니다.


중공은 탄생하자 마자 전쟁에 나섭니다.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치겠다며 도움을 청하니까 전투로 단련된 10만 명 사단을 통째로 내어줬죠. 김일성은 그들을 받아서 인민군에 편입시킵니다. 모택동은 김일성에 100만 명을 추가로 더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안세영 교수의 신간, <위대한 중국은 없다>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끝나자 공산당은 본격적인 소비에트화에 착수하죠. 인민공사라는 것을 만들어 모든 인민을 그곳에 소속시킵니다. 재산은 모두 징발하고 식사도 한 곳에 모여 공동식사를 하게 했죠. 인민을 국가에 예속된 일종의 노예로 만든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이죠. 철강생산량을 급격히 늘려서 15년 안에 공업으로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나섰습니다. 동네마다 진흙을 쌓아 용광로를 만들게 하고 쇠붙이란 쇠붙이는 농기구 냄비까지 내다가 녹이게 했죠. 쓸모 없는 쇳덩이를 만들어낸 것이죠. 그러니 인민들은 시간이 없고 도구가 없어서 농사도 짓지 못하게 됩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집니다. 모택동은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다며 참새를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리죠. 전 인민이 들고일어나 참새를 잡았고 참새의 씨가 마르게 됩니다. 그러자 메뚜기의 세상이 되죠. 천적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농사가 잘 안 되는데 메뚜기까지 기승을 부려서 농업생산이 급감하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 되어 버립니다. 홍콩대학교 디쾨터 교수가 공산당 문서를 다 뒤져서 밝혀낸 사실을 쓴 책 <마오의 대기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시의 참상,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6천만 명이 아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등 모택동이 야심 차게 추진했던 사업들은 대실패로 끝나게 되죠.



이렇게 되자 실용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죠. 유소기, 등소평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사유재산을 다시 인정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모택동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것을 참을 수 없었죠. 그의 열혈 지지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부추겨서 홍위병을 조직하고 거리로 나서게 만들죠. 그들이 전국을 돌며 마오의 반대자들은 모두 잡아다가 모욕 주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수백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집권하고 나서 중국은 광기와 공포로 가득한 세상이 된 겁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던 시기입니다. 물론 인민들은 낙원이 올 줄 알고 공산당과 함께 싸웠겠죠.


그런데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이런 책에서 그것을 중국의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간의 탄생 과정이라고 찬양합니다. 노무현, 문재인, 조국, 임종석 이들은 다 그 책에 감명받으며 자란 사람들이죠.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중국 인민은 지옥에 빠져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목숨 부지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었죠. 모택동은 유일신처럼 모셔졌습니다. 그런 세상이 1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은 그렇게 중국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사망합니다. 중국의 인민들은 그제서야 살길이 열리게 되죠.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김정호 / 김정호의 경제TV 크리에이터, 서강대 겸임교수




* 이 글은 2020.1.17 <김정호의 경제TV>로 방영된 <중국 근현대사 1부. 고통과 광기의 시대: 아편전쟁에서 모택동까지. 1840~1976>의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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