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크 사상의 현대적 조명

김경훈 / 2020-05-11 / 조회: 7,377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 A. Hayek)는 제한된 정부와 법의 지배에 입각한 자유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무정부(아나키)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통달하며 정부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하이에크는, 역설적으로 정부의 테두리 없이 자유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이에크의 논리는 물론 실제적(realistic)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좌파사상 혹은 보수주의와 다르게,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철저하게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근본으로 삼는다. 불완전한 존재자인 인간의 계획은 언제나 실패가능성을 수반한다. 하이에크는 사회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가 치명적 자만이라고 비판하며, 중앙계획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사회만이 성공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실제적 관점은 폭력의 위험을 시사한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자가 될 순 없기 때문이다. 폭력의 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하이에크는 무정부가 아니라 정부가 운영하는 법의 지배를 제안한다. 관건은 정부의 폭력성을 어떻게 해야 최대한 억누르고 시민의 적이 아니라 보호자로 훈련할 수 있는지에 있다. 요컨대 하이에크 사상은, 현실적으로 가용 가능한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환경조건을 고려하여 행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간행동학(praxeology)의 교훈을 반영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제한된 정부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인 동시에, 이론적으로도 자유주의와 가장 잘 부합한다. 그러나 제한된 정부가 현실적 조건에서 가능한 최선이라는 점이, 곧 이론적 차원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체제임을 (즉각적으로) 뜻하지는 않는다. 실례로 자유주의 연구를 선도하는 서구권에서는 하이에크 사회철학의 근본적 통찰이 제한된 정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견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정부-자본주의(anarcho-capitalism)’는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와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전통의 산물이며, 하이에크 사상은 무정부와 대립한다는 전통적 견해는 매우 지배적이다. 라스바드와 호페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정립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무정부주의적으로 이해될 경우 더 나은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하이에크 사회철학은 오스트리아학파의 무정부주의적 성격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무정부주의적 가능성 역시 1980년대 중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돈 라보이(Don Lavoie), 피터 뵈키(Peter Boettke), 데이비드 프리치코(David Prychitko), 그리고 스티븐 호르위츠(Steven Horwitz) 등 조지메이슨대학교 머카터스센터(Mercatus Center at George Mason University) 소속의 경제학자들이 이를 주도했다. 하이에크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라스바드와 호페의 미제스 해석과 유사한 논지를 가진다. 즉 하이에크 자신이 무정부를 비판했음에도,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를 함의하며, 따라서 하이에크의 진면목을 이해하려면 무정부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 주장의 근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인식론적 재구성이다. 하이에크의 진화적 인식론이 미제스-라스바드-호페의 선험적 인식론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40년대 이후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 전통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며 오스트리아학파 선험론과 상충하는 진화론적 입장에 큰 강조를 두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는 하이에크 인식론의 기초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서 기인한 경험주의 사조에 있다고 이해한다. 반면 미제스 중심의 오스트리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칸트, 브렌타노 등 합리주의 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돈 라보이를 필두로 한 조지메이슨 하이에크주의자들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대표하는‘해석학(hermeneutics)’에 주목하며, 오스트리아학파 인식론의‘해석학적 전회(hermeneutic turn)’를 주장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주어진 텍스트로 이해해야 한다는 해석학의 주장은 경제과학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경우, 계량경제학적, 경제통계학적 연구와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은 다양한‘기투(entwurf)’방식을 매몰시키고 자기만의 입장만을 강요하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즉 시장경제의 불확실성, 제한된 정보, 그리고 진화적 과정이 그 자체로 인간의‘기투성(entwerfenheit)’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해석학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규제가 아니라 완전한 불필요성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무정부-자본주의는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체제로 격상된다.


두 번째, 조지메이슨 하이에크주의자들은, 엘레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 그리고 공공선택학파에 주목한다. 규칙, 규범, 제도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국가-시장 이분법을 넘어 시민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드러냈으며,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의 지배에 반드시 국가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요컨대 국가 혹은 정부의 강압이 없더라도, 시민사회의 법치주의는 그럭저럭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에크 무정부주의의 지향점은, 라스바드-호페 무정부주의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조지메이슨 하이에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오스트리아학파를 넘어‘정통 경제학(mainline economics)’에 속한다고 주장한다.‘주류 경제학(mainstream economics)’은 일종의 사회학적 개념으로, 엘리트 학자 집단 사이의 유행이다. 반면 정통 경제학은 실제적인 경제사상 전반을 포괄한다. 즉 좋은 방법론을 추구하지만, 특정한 접근법만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으며, 오스트리아학파 뿐만 아니라 케네스 불딩(Kenneth Boulding), 로널드 코스(Ronald Coase),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더글러스 노스, 엘레너 오스트롬 등의 연구 성과 역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열린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하이에크 무정부주의에서 강조되는 것은‘결과론(consequentialism)’이다. 실증적, 경험적 연구를 통해 자유시장과 시민사회의 힘이 국가를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반면 라스바드-호페 무정부주의는‘선험적-공리적 이론의 논리적 일관성(the consistency of a priori axiomatic theories)’을 최선의 덕목으로 삼는다. 인간행동학은 오류불가능성, 반박불가능성, 그리고 보편타당성을 반영하는 선험적 진리 체계이다. 따라서 인간행동과 그 결과인 사회적 질서에 관한 모든 연구는 인간행동학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인간행동학의 토대인‘행동 공리(action axiom)’와‘논쟁의 선험(a priori of argumentation)’을 고려할 때, 오직 무정부-자본주의만이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고, 선험적으로 보편타당한 사회체제라는 것이 라스바드-호페 전통의 핵심 논조이다.


관건은 무정부-자본주의가 라스바드-호페 전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하이에크 사상에 입각한 무정부-자본주의 역시 가능하다는 점을 많은 연구결과가 보여준다.


한국에서 하이에크는 제한된 정부와 최소국가만을 의미할 뿐, 그가 가지는 무정부주의적 함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외에서는 이미 80년대부터 관련 연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하이에크 연구가 세계적 추세와 상당 부분 괴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해외 경향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하이에크 사상의 무정부주의적 가능성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며, 이 점을 연구함으로써 하이에크 사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진척시킬 수 있음은 확실하다.


하이에크 사회철학은 하이에크 자신의 정책적 주장이 아니라 후학들이 개발한 무정부주의와 더 자연스럽게 연결되는가? 법의 지배와 폭력의 방지는 국가와 정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자생적 질서로서 유지될 수 있는가? 하이에크의 진화적 인식론은 해석학적 함의를 가지는가? 하이에크를 존경하고 또 깊이 공감하는 자유주의자라면, 분명 상기한 질문들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자유경제에세이 칼럼 코너(http://hayek.or.kr/1417)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TOP

NO. 제 목 글쓴이 등록일자
76 한광성의 비극과 자유무역의 필요성
김경훈 / 2020-11-26
김경훈 2020-11-26
75 공기와 마스크 그리고 개인주의
배민 / 2020-11-19
배민 2020-11-19
74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나
정성우 / 2020-11-13
정성우 2020-11-13
73 [자유발언대] 기업 미래 위협하는 상속세 전면 손질해야
서영주 / 2020-11-05
서영주 2020-11-05
72 자유주의자는 반자유주의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김경훈 / 2020-10-29
김경훈 2020-10-29
71 [자유발언대] 한국 기업경제 위협하는 `3%룰` 폐기돼야
김채원 / 2020-10-21
김채원 2020-10-21
70 학력시장과 교사의 전문직업성
배민 / 2020-10-12
배민 2020-10-12
69 자유주의자(libertarian)가 공무원이 될 수 있는가?
김경훈 / 2020-09-28
김경훈 2020-09-28
68 ‘소득주도성장’ 아닌 “영웅주도성장”
손경모 / 2020-09-03
손경모 2020-09-03
67 생각보다 오래된 부동산의 역사
정성우 / 2020-08-25
정성우 2020-08-25
66 의대 정원, 의료시장과 건강보험
배민 / 2020-08-19
배민 2020-08-19
65 자사고·외고 폐지 정책, 다양성과 평등에 역행한다
조범수 / 2020-08-10
조범수 2020-08-10
64 뉴딜은 실패한 정책이었다
정성우 / 2020-07-30
정성우 2020-07-30
63 기본소득의 맹점들
강지원 / 2020-07-06
강지원 2020-07-06
62 정경유착과 부당이익의 문제
김경훈 / 2020-07-03
김경훈 202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