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는 어둠으로 가득차있다. 밤하늘의 지구를 관찰하면 수 없이 아름다운 별빛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모든 별이 태양처럼 별빛을 스스로 내는 것은 아니다. 태양처럼 별빛을 스스로 내는 항성도 있고, 수성이나 금성처럼 그 빛을 반사하는 행성도 있다. 그런 별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빛의 교환을 통해 광활한 우주는 아름다운 별빛으로 단장된다.
태양빛이 비치지 않는 지구의 밤은 빛의 교환으로 밝아지지 않는다. 인간들 사이의 교환에 의해서 밤은 낮보다 밝게 빛난다. 누군가 전기를 생산하고, 누군가는 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또 누군가는 그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그 무언가를 위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이런 과정들이 무수히 반복되어 지구의 밤을 밝히는 것은 단지 ‘똑딱’ 스위치를 하나 누르는 것으로 밝아지게 된다. 물론 이제는 너무나 흔한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매일 매일 반복되면서 지구의 밤은 낮보다 밝아지게 된다.
지금은 너무 당연해진 이런 기적을 통해 인간은 지구의 밤을 빛으로 채워가고 있다. 이런 기적을 통해 인간은 무지(無知)라는 어둠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런 기적을 통해 인간은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있다. 이런 기적을 통해서 스마트폰 버튼만 누르면 동시에 수백만명과 소통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단순한 기적의 원리를 ‘교환’이라고 부르고, 이 기적을 유지하는 교환이 자유로운 사회를 ‘자유시장경제체제’라고 부른다.
이 같은 원리는 자연에서도 무수히 벌어지고 있는 원리다. 60억이 넘는 인구가 지구에서 쉼없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는데, 아무도 이때문에 질식하지는 않는다. 지구 어디서나 식물들이 그 이상으로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아담스미스는 이와 같은 통찰을 갖고 사회가 돌아가는 질서를 시계로 설명했다.
시계 태엽속의 톱니바퀴들은 제각기 자기 역할에 따라 열심히 돌고 있을 뿐이지만 그 의도와는 관계없이 시간을 보여준다. 톱니바퀴들은 그것이 시계제작자의 의도라는 것을 모른다. 이는 스미스의 유명한 빵집 주인의 예시와 같다. 우리는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서 사회를 진보시킬때 그것이 이성의 결과라고 믿기 쉽지만, 그것은 오만이다. 테엽이 시계제작자의 의도를 모르고 돌아가듯, 인간사회의 진보도 신의 의도에 따라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신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사회일수록 신의(信義)가 중요하다. 그런 신의가 잘 지켜지는 사회일수록 일정한 테옆에 의해 시간이 정확히 표시되듯, 매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모든 기적의 원천인 교환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어, 법, 문화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교환과 긴밀하게 연결 돼 있다. 우리는 교환을 쉽게 이성으로 재단하고 옳고 그름으로 나누지만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마치 ‘유모차’는 틀렸으니 ‘유아차’로 바꾸자거나 ‘돈까스’는 틀렸으니 ‘돼지고기 너비 튀김’이라고 바꾸자는 것과 같다. 이런 이성의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언어의 자연스런 교환을 막는 행위는 언제나 거북하고 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사람들의 다른 어떤 교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교환은 인간의 본성이다.
최근 우주에서 블랙홀 사진이 관측되었다. 어둠이 존재가 되고 빛이 그림자가 된 신기한 사진이다. 블랙홀이 주변의 빛을 힘(질량)으로 당기기 때문에 빛이 어둠을 드러내는 그림자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가 상상해왔던 깜깜한 블랙홀과는 달리 블랙홀 주위는 아주 밝다.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며 한반도의 위성사진이 연상되었다. 또 정부가 편성한 513조의 예산도 생각났다. 빛의 배경이 되어야할 어둠이 빛의 중심이 되면 블랙홀이 되듯, 사람들의 배경이 되어야할 정부가 사람들의 중심이 되면 사람들은 들러리가 된다. 그러나 모든 팽창하는 정부인 사회주의가 한때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듯 블랙홀도 한때는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실체는 빛의 왜곡이고, 절멸(絶滅)이다. 정부는 어둠처럼 배경일때 어둠의 한 없는 깊이 속에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며, 사람은 그 어둠 속에서만 한 줄기 빛으로 빛 날 수 있다.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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