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Richard Ebeling,
Austrian Economics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Freedom
1 June, 2004
현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1974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그 이전까지, 거의 25년 동안 오스트리아학파는 정지 상태에 있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오스트리아학파가 가장 독창적이고 선도적인 경제학파로 이름을 날렸다. 예컨대 한계효용론, 기회비용, 가치와 가격, 자본과 이자, 시장과 경쟁, 화폐와 경기변동이론, 비교경제체제론(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개입주의, 복지국가)에 있어 오스트리아학파의 업적은 막대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 대공황에 대한 케인스주의 해석 및 처방의 상승과 승리가 경기침체와 실업률 문제에 대한 모든 경쟁적인 접근방식을 일소시켰다. 여기에는 물론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이론 역시 포함되었다.
동시에, 미시경제학에서는 신고전파 접근법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개인적 의사결정의 논리, 경쟁적 용도의 희소자원 배분, 생산요소(토지, 노동, 자본) 사이의 소득 분배 등에 대한 연구는, 점점 더 수학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진척되었다. 연구관심의 초점은, 종종 협소하고 매우 인공적인 조건, 즉 시장경제가 대체로 균형상태에 있다는 가정의 '세부사항(specification)'과 '측정(determination)'에 있었다.
이러한 접근법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시장경쟁 논리 및 과정을 설명하려는 오스트리아학파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경쟁적인 신고전파와 달리, 오스트리아학파는 불완전한 지식,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시간의 보편적 역할,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지속적 적응인 시장조정 등을 강조한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핵심: 행동하는 인간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오스트리아학파는 개인을 '행동하는 인간(acting man)'으로 바라본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인간관은 실증주의, 역사주의, 그리고 신고전파 인간개념, 즉 단순히 물리적이고 수량적인 대상, 역사적 힘에 제어되는 수동적 주체, 혹은 수학적 방정식의 체계 내에서 '종속변수(dependent variable)'로 설명되는 인간관을 반박한다. 대표적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은 인간을 주어진 취향과 선호를 가진 수학적 함수처럼 취급하는데, 그러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환경에 의해 행동이 유도되며, 시장가격의 형태로 나타나는 다양한 제약과 객관적인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직면할 경우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반면에, 오스트리아학파에 있어 인간은 의도를 가진 존재자다. 인간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분명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상상하고, 창조하고, 결단할 능력이 있다. 인간의 정신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정신과 의지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상황을 발견하며 반성적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사회적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기며, 자신의 취향에 더 많는 상황을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은 정신적으로 선호하는 상황을 현실화하기 위해 행동 계획을 세운다. 인간은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자신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을 언정 모든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불충분함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여러 대안들을 살펴보고 가장 선호하는 것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러 목적 중 일부는 희소성 때문에 오늘 혹은 영원히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택할 트레이드오프를 결정해야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다른 목적의 형태로 자신의 선택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다.
불완전한 지식과 시장 기회
미제스는 모든 사람에게 기업가정신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창출하며,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 즉 손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언제나 투기적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완전 경쟁’ 가정 하에서는, 수익성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손실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모든 시장 참여자가 선택에 필요한 충분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행동과 완벽한 지식은 모순된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고,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적어도 개인의 관점에서 볼 경우에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는 불완전한 지식과 불확실성이 만연하고, 수학적 결정론 모델이 불가능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세계관 앞에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는 이러한 인간세계의 현실을 오히려 낙관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 상태를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 세계에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은 창의성을 발휘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할 동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떻게 발휘될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문화적인 모든 발전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의해 촉진된다.
경제 계산과 시장 과정
사유재산과 화폐교환에 기초한 사회제도의 의미를 신고전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사유재산을 노동과 희소자원의 보존을 유도하는 유인기제로, 또 화폐를 상품 사이의 가치 비교를 위한 회계단위로만 파악하고 있다. 이 두 서술은 모두 진실이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서술만으로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시장질서의 기능과 조정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사유재산과 화폐는 시장경제와 문명의 필수불가결한 속성이다. 사유재산권과 교환매개체의 발달 덕분에, 합리적인 경제계산이 가능해졌다. 이 점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은 물론 미제스다. 오직 사유재산만이 시장성 있는 모든 상품과 생산수단의 판매와 구매를 가능하게 하며, 화폐만이 이질적인 재화들 사이의 공통분모로 작용하여 거래를 용이하게 한다. 경쟁적인 시장에 사회의 모든 행위자가 참여함으로써 가격이 형성되고, 그리하여 경제 계산의 토대가 마련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진행된 경제 계산만이 수십억 명의 사람의 개별적인 행동을 상호 이익이 되는 시장경제 관계로 조정하고 통합한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질서가 양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즉 수십억 개의 개별적 계획들이 합리적인 사회 조정의 패턴으로 결합되는 것은 자유시장에서의 경제 계산 덕분이다.
자유의 정치경제학
인간과 시장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통찰 중 어느 것도, 실증주의 혹은 신고전파의 경제학과 양립할 수 없다. 물리적 실체 혹은 수학적 대상으로 격하된 인간은 행위자로서의 본질을 박탈당한다. 인간의 정신이 사회적, 경제적 분석에서 제외된다면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단지 측정가능한 물리적 객체 혹은 방정식 체계 내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면, 자유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많은 구성원이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 시장경제를 믿는 자유주의자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인간을 생각하고, 창조하고, 행동하는 존재자로 본다면, 그의 개인적 인간성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생각을 하기는 참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곧 각자가 스스로를 위해 행동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복지를 진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그 누구도 중앙경제계획과 정치적 개입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시장과정 내의 사회적 조정을 위한 가격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소비와 생산을 지휘하는 사회주의적 망상은 거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자유주의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지난 100년 동안, 오스트리아학파는 진정한 자유의 정치경제학의 지위를 누려왔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시장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했고, 우리시대에 자유를 옹호할 대의를 발전시켰다.
번역: 김경훈
출처: https://www.libertarianism.org/publications/essays/austrian-economics-political-economy-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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