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야생동물들이 먹고 살기 위해 사냥 같은 일련의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이 야생동물들에게 후한 복지국가를 제공한다면 어떨까? 이런 복지국가를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음식과 안식처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것처럼 들린다.
이런 조건을 적용한 실험이 하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유명한 윤리학자 중 한 명인 존 B 칼훈의 연구이다. 칼훈은 1960년대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서 쥐 실험을 실행했다. 그는 물 분사기, 터널, 음식물 쓰레기통, 보금자리 박스 등을 갖춘 금속 펜스에 네 쌍의 쥐를 가뒀다. 그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음식과 물을 제공했고 어떠한 포식자도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금속 펜스는 쥐들의 유토피아였다. 칼훈의 의도는 개체 밀도가 생쥐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는 것이었지만 그 실험은 그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처음 쥐들의 숫자가 55일마다 두 배씩 증가했고 이후 1,600마리 정도의 쥐들을 수용할 수 도록 공간을 충분히 확장했다. 확장한 이후에도 개체수는 2,200마리로 정점을 찍었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부터 쥐의 개체수는 멸종할 때까지 급감하기 시작했다.
칼훈이 관찰한 개체수가 감소한 시기 즉, 사회 규범과 구조가 무너지는 첫 징후가 나타난 전환점은 315일이 될 때였다. 암컷 개체들은 그들의 새끼를 돌보지 않고 수컷 개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영역을 방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개체 모두 더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성별에 기초한 행동(번식활동)과 사회적인 행동(포식자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행위)은 날이 갈수록 사라졌으며 마지막으로 태어난 수천 마리의 쥐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활동 자체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점점 더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르샤바 출신의 생물학자인 얀 쿠바슈는 쥐 유토피아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인이 된 쥐들은 전의 개체들과 다른 종류의 행동을 보인다. 그들의 시간은 오로지 자신을 돌보고 먹고 자는 것에만 할애되었으며 그들은 다른 개체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고 번식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쥐들은 그 이외에 특이한 자극에는 대처할 수 없는 어리석은 개체들이었다.”
외부적으로 풍부한 자원이 포식자로부터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기 때문에, 쥐들은 스스로 자원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쥐들은 이러한 행동을 관찰한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었다. 생존에 필요한 삶의 기술은 점차 사라져 갔다.
인구통계학자들은 만약 세계 인구가 상상의 최적 “최대치”를 초과한다면 인간이 유사한 상황에 굴복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정당한 도전을 통해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동기,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자극을 개인으로부터 박탈한다.
유토피아는 일이나 갈등이 없는 삶의 역설이다. 개인의 삶에서 모든 필요의식이 없어지면, 삶은 목적을 갖는 것을 멈춘다. 그렇게 개인은 정신적으로 죽는 것이다. 개인들의 도전을 덜어주고 그들에게서 목적을 빼앗음으로써 복지 국가는 완전히 부자연스럽고 반사회적, 편협한 존재가 된다.
이는 국가가 제공하는 구제제도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정신의 파괴와 도적적 해이를 유발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의 복지와 쥐들의 유토피아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쥐들에게는 정말 모든 것들이 무료였지만 우리의 복지체계는 한 사람의 이득이 어떤 사람에게는 비용으로 적용되는 점(세금)이다. 일부에게는 매력적인 보조금을 주지만 다른 일부에게는 세금을 부과하는 인간 복지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이중의 타격을 준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쥐 실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통해 우리 후손들의 경각심을 유발하고자 토마스 소웰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복지국가는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실수에서 파생된 결과로부터 보호해 무책임을 계속되도록 하고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그 실수를 적용하도록 허용한다.”
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입니다.
Lawrence W. Reed, Mouse Utopia Experiment and Reflections on the Welfare State, 11 October, 2020
번역: 임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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