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Ralph Raico,
The Social Philosophy of the Austrian Economists
10 August, 2019
Erich Streissler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을 ‘학파’로 통합한 것은 결코 한계효용과 같은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이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과장되고 심지어 괴팍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학파 지도자들의 정치적 견해는 분명히 그것을 자유주의로 식별하게 하는데 한몫 했다.
Menger, Bohm-Bawerk, 그리고 Wieser 등 이 학파의 설립자 중 가장 의문이 적은 것은 Wieser의 견해다. Streissler이 특징 짓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보수적이고 가톨릭적인 토대 위에서 그는 간섭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적 감정이 상당 부분 섞인 다양한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마르크스를 존경하고 사회혁명적 미사여구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현명한 관료주의(자신의 계층에서 나오는)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 기구의 지혜를 믿는 국가주의자였다.
Streissler에 따르면 Wieser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총통’이였으며, 1926년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을 반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면에 Menger의 정치적 성향은 가장 많이 연구되어 왔고 가장 논란이 많다. 예를 들어, Mises는 Menger가 “오스트리아 정부가 당시에 거의 모든 정부와 마찬가지로 채택했던 개입주의 정책을 진심으로 반대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고전적 자유주의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Streissler 또한 Menger를 학파가 자유시장에 몰두하게 된 시초로 보며 그의 자유주의를 강조한다. Emil Kauder은 그에 반해 Menger가 사회개혁의 동조자였으며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근까지 Menger의 정책사상의 주요 출처는 그가 1891년에 빈 주요 신문에서 발표한 ‘고전경제학과 현대경제정책의 사회이론(The Social Theories of Classical Economics and Modern Economic Policy)’이다. 여기서 Menger는 애덤 스미스가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날, 스미스의 주장을 심각한 오해로부터 구하려고 한다. 그가 발견한 주요한 오역은 (나중에 Lionel Robbins의 1953년 방식인) 스미스가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한다는 잘못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스미스의 주장을 부당하게 맨체스터 학파의 주장과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Ferdinand Lassalle로부터 시작된, 맨체스터주의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를 일컫는 보편명사가 되었다.) 이 Menger의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사회주의자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Streissler는 오스트리아 학자인 Brigitte Hamann의 연구에 의해 Menger에 대한 관점에 새로운 빛이 드리워졌다고 믿고 있다. Hamann은 Menger가 1876~1878년 사이에 가르친 황태자 루돌프의 수첩을 발견했다. Streissler는 “황태자의 수첩은 Menger가 국가에 대한 의제가 애덤 스미스보다 더 적으며, 가장 순수한 고전적 자유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treissler가 이런 공책들의 증거로서의 가치를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Bruce J. Caldwell이 “Menger의 정책 관점에 대한 마지막 장은 아직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쓴 것이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Bohm-Bawerk은 초기 오스트리아 학파가 정치경제학에 관한 실용적인 문제에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집을 정돈하기 위해서는 집부터 지어야 한다”라는 이유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실용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가 있으며 이를 직접 가르치지만, 우리의 문헌 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이론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라고 덧붙었다. 그러나 그가 직접 가르친 그 견해들은 다소 모호하게 남아있다.
Kauder는 Bohm-Bawerk를 포함한 학파설립자들의 생각 속에서 모순적인 힘들이 작용한 결과로 그들의 경제정책이 자유와 권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보였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은 ‘social ontologist(사회 존재론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모든 사회현상은 이 마스터플랜과 관련하여 구상된다. 이 ontological structure (존재론적 구조)는 단지 무엇일 뿐 아니라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Kauder는 “자유방임주의 메커니즘에 따른 자연질서”를 보여주는 Bohm-Bawerk의 ‘Positive Theory of Capital’을 예로 든다. 이에 따르면 “‘아름다운 조화’ 내에서 자유 경쟁 하의 장기적 가격에 도달했을 때 경제 구조들은 한계효용, 할인이론, 우회생산에 의해 서로 잘 맞게 결합한다. 앞서 언급한 Rothbard의 시장경제에 대한 구상의 초기 버전인 이 “social ontology(사회 존재론)”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Kauder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전통은 국가 온정주의의 일환이었으며, 자발적인 경제 질서의 개념의 표현조차도 적극적으로 억압되어 왔다고 한다. 학파의 설립자들은 “영국(즉 스미스적)과 오스트리아의 전통 사이에서 타협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Bohm-Bawerk는 경제학자가 자유경쟁과 국가의 개입 둘 다 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썼다.
마지막에 Kauder는 Bohm-Bawerk가 사회적 안정이 진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며 오스트리아 과거의 이상과 유사한 사회 정적주의를 설파했다고 주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Stephan Boehm은 “Bohm-Bawerk의 재무장관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은 개인 총소득에 대한 누진소득세의 도입이었다”라고 지적한다.
반면에 Erich Streissler는 Bohm-Bawerk를 “국가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회의론을 가진…극도의 자유주의자”로 지칭한다. Menger, Wieser, 그리고 Bohm- Bawerk 이 세 설립자 중 오직 후자만이 애덤 스미스의 국가는 “나쁘고” “바보 같은” 것이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Bohm-Bawerk의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으로서의 경험이 그를 정부 지도자들과 정부의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신랄한 회의주의자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Streissler는 Bohm-Bawerk의 생애 마지막 해인 1914년에 발행된 두 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서 (노조에 의한) 강압적인 개입이 경제법을 우회할 수 있다는 생각과 막대한 공적 자금지출을 통해 정치인이 지지와 일시적인 사회적 평화를 사려는 경향, 둘 모두를 비판했다. Streissler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Bohm-Bawerk의 후기 관점에 관한 질문은 특히 흥미롭다. Mises가 1905-1906년 Bohm-Bawerk의 마지막 관직 이후에 열린 그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 학파에 동조했던 두 명의 경제학자는 학파의 설립자들을 이 학파의 떠오르는 유명인사 Ludwig von Mises의 원칙적인 경제 자유주의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다.
Wilhelm Vleugels는 Schmollers Jahrbuch의 기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주관적 가치 이론의 과학적 유용성을 옹호하는 동시에, 국가 공동체의 요구를 개인의 요구보다 우선시했던 구 독일 전통과의 양립성을 주장했다. “처음에 [오스트리아인의 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구가 동시에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즉시 극복되었다.” Vleugels의 가장 중요한 증거물 (Wieser의 진술서를 제외하고)는 1886년에 나온 Bohm-Bawerk의 “자유 경쟁의 역효과 (Disadvantageous Effects of Free Competition)”라는 제목이 붙은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서, Bohm-Bawerk는 자유 경쟁의 조건 하에서 공급과 수요는 “가장 유용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평형을 이루게 되며, “사회적으로 가능한 절대적 효용의 최대량”을 창출한다는 주장을 다룬다. 놀랍게도 이 관점을 설명하는 사람은 사회 개혁적인 사고방식으로 잘 알려진 Albert Schaffle이고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Bohm-Bawerk다. Bohm-Bawerk는 이 관점 속에 “교환으로부터 얻는 높은 상대적 이득과 높은 절대적 이득의 혼동”이 있기 때문에 이를 “기만적”이라고 특정 짓는다. “이상적인 측정 기준”을 가정하면서, Bohm-Bawerk는 가난한 소비자보다 더 많은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소비자가 해당 재화로부터 얻는 효용은 가난한 소비자가 그로부터 얻는 것보다 덜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불행히도 실제 경제생활에서 수없이 발생한다”라고 하지만, Bohm-Bawerk는 1840년대의 아일랜드를 그의 예시로 삼았다. 아일랜드 원주민들은 곡물의 시장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 곡물들은 대신 수출되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리며 아사할 때, 곡물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자들의 수요에 따라 양주와 훌륭한 구운 상품을 위해 사용되었다. Bohm-Bawerk는 결론을 내리기를,
편견이 없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기주의적 경쟁 속에서 이루어진 이 교환은 사람들의 필수적인 생존과 발전을 위한 가장 절대적인 효용과 관련된 분배인 생필품 밀과 옥수수의 가장 생산적인 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 것이다.
Velugels의 기사가 실리기 몇 년 전, Bohm-Bawerk의 이 에세이가 실린 작품들의 모음집을 편집한 Franz X Weiss는 Mises와 반대되어 Veleugels와 같은 입장에서 주장했다. 드레스덴에서 개최되고 Mises, Hayek 등 오스트리아 학파 회원들이 참석한 Merein fur Sozialpolitik 모임에서 Weiss 또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구세대들이 편찬한 다양한 문헌들을 인용하며 오스트리아 경제학을 Mises의 자유주의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고 시도했다.
이 중에는 그를 맨체스터주의의 지지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경솔하다는 Menger의 발언이 있었고, “현대 사회에서 개혁이 요구되는 각종 한탄스러운 상황” 앞에서 “자유방임주의라는 별로 좋지 않은 정책과 통행 허가증은 부적절하다”라는 Bohm-Bawerk의 주장이 있었고, 그리고 경제가 국가의 조치에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경제의 불변 자연법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Wieser의 견해도 들어 있었다.
Weiss는 자신의 목적이 “설립자들을 포함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여러 유명한 대표자들이 경제 정책의 결론을 Mises가 반드시 도출해야 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도출해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Weiss의 비평에 대한 Mises의 짧은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권위와 인용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내 논증은 주해가 아닌 논리에 근거한다. 이 인상적인 함축의 의미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의 정치적 중요성은 주요 추종자들의 특정한 관점이 아닌 내부 논리체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Weiss와 Vleugels와 같은 작가들이 Mises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이유는, Vleugels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맨체스터주의의 결정적인 오류를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극단적인 형태로 되살리려고 애쓰는 학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유방임주의의 근본적인 오류는 문명 세계 전체는 아닐지라도 중부 유럽에서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다. Mises가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주장에 대한 논쟁을 재개하려고 추정된다는 점이 Mises의 반대자들이 그의 일생 동안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게 하였다.
Kirzner가 지적한 대로 오스트리아 경제학과 진정한 자유주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 사람은 Mises였다.
번역: 이선민
출처: https://mises.org/wire/social-philosophy-austrian-econom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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