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의 시민혁명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성공했던 민중 혁명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2년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국민에게 쌓여 갔던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이승만 대통령 85%, 이기붕 부통령 73%)이 “4.19 혁명”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기붕의 자살(4월 28일)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하와이 망명(5월 29일) 그리고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목적으로 하였을 뿐,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1955년 한민당에서 민주당으로 개명)을 비롯한 그 어떤 정치세력이 개입하거나 주도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혁명이후에 대한 그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4.19 혁명은 단지 불의에 항거하려는 국민의 순수한 저항의 발로였을 뿐, 혁명의 시작에서부터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에 이르는 과정은 전적으로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런데 주일 독일 대사관의 메네르트(Klaus Mehnert)가 서독 연방의회 의원 에를러(Fritz Erler)에게 보냈던 1960년 6월 5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4.19 혁명”은 “Die Revolution von der Seite" 즉 “아웃사이더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실패한 혁명”이었다는 것이다.(Politisches Archiv des Auswätigen Amtes, Abteilung 7, Referat 710, 1564권) 또한 주한 독일대사관의 뷩거(Bünger)는 서독외교부에 보낸 1961년 5월 23일자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9개월간 지속되었었다”라고 단정하면서, “4.19 혁명”의 불행한 결과를 정리하였다.(Politisches Archiv des Auswätigen Amtes, Abteilung 7, Referat 710, 1567권)
당시 서독의 외교관들은 도대체 왜 우리의 인식과는 상반된 인식을 가졌던 것일까? 우선 그들은 당시 “4.19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민주당의 뿌리는 친일세력 “한민당”이었다. 한민당은 이승만과 손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친일과거를 세탁하며 반공과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했었다. 따라서 서독의 외교관들은 자유당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똑같이 청산되어야 할 정체세력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4.19 혁명”은 결국 이승만을 하야시키고 나서 시민혁명 자체로는 성공했으나, 정권을 다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구세력인 민주당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메네르트가 규정한 “아웃사이더의 혁명”은 4.19를 가장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일 수 있다. 혁명의 주체가 대부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학생들이었고, 정작 혁명을 성공시킨 주체가 실제로 현실정치에서 직접 참여할 수도, 투표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시민(학생)들이 원했던 정치교체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4.19 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상황은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이나 국민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4.19 혁명 직후 민주당은 학생들에게 정치는 자신들에게 맡기고 학교로 돌아가도록 종용하였고, 4.19 혁명의 주도세력이었지만, 대부분 미성년자들이었던 학생들은 결국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메네르트는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수구적 성격의 민주당이 스스로 이루지 못한 정권교체를 시민혁명에 무임승차하여 성공하였고, “4.19 혁명”은 자유당보다도 더한 수구세력의 기득권 연장이라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민주당은 그들이 1945년 한민당 시절부터 숙원이었던 영국식 의회주의로 개헌을 했고, 7월 27일 5대 총선을 통해 민의원(233명)과 참의원(58명)으로 구성된 양원제 제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4.19 혁명은 성공한 시민혁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기보다는 학생들이 이루어 놓은 4.19 혁명에 무임승차하였고,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시민혁명의 성과를 가로챘다. 그리고 친일정당의 후예인 민주 계열은 현재도 4.19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오용하고,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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