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제가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던 최초의 국제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에 개최된 “카이로 회담” (1943.11.22.~26)이었다. 중국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1942년 4월에 한국의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미국에게 제안했지만, 미국은 한국인들에 대한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FRUS, Diplomatic Papers, General, The Far East(1942), Vol. 1, 873~877쪽) 오히려 1943년 3월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수상 이든 사이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잠정 합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카이로회담에 참가했던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후 한국을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독립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최초 언급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적당한 시기”라는 용어의 의미였다. 미국 측의 초안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단기간에 마무리하고 “가능한 한 조기에”(at the earliest moment)에 한국을 독립시키자고 작성되었다. 그러나 처칠이 이에 반대하자 미국 측은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다시 바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이를 다시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로 다시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의 “적절한 시기”와 마지막에 영국이 동의했던 “적당한 시기”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가시적인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후자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이 동남아에서 일본에게 상실했던 식민지를 순조롭게 반환받기 위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해 줄 수도 있다는 것으로 당시 미국 측은 해석하고 있다(Sherwood, Roosevelt und Hopkins, 629쪽). 결국 일본의 패망이 곧 한국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 개최되었던 “얄타회담”(1945.2.4.~11)에 한국문제는 다시금 연합국 간의 합의가 필요한 의제로 등장하였다. 여기서 한국문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20~30년간의 신탁통치에 대한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카이로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독립 시기는 여전히 불확실 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 개최된 “포츠담 회담”(1945.7.17.~8,2)에서 한국문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미국은 소련의 대 일본 전 참전을 전제로 동아시아에서의 작전구역을 나누는 과정에서 일본을 단독 작전구역으로 포함시키면서, 한반도의 북위 38˚ 이북의 해안에 대한 해상작전권을 미국이 차지하면서 지상군 작전권은 소련에게 이양하였다. 다시 말해 이 합의로 인하여 소련의 참전과 한반도 진입에 빌미가 제공되었고, 38˚ 이북지역의 신탁통치에 대한 기득권이 소련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개최되었던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16.~25)은 애매모호했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기간이 최대 5년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 내에 주둔하는 미소 양국의 사령부의 대표자 회의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에 의해 2차례 (1946년 1월 16일 / 1947년 3월 20일) 진행되었던 소위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에 참여할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인하여 결렬되었고, 이후 미국의 군정지역과 소련의 군정지역은 각기 독자적인 한국정부 수립을 결정하였고,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는 무산되었다.
당시 남한 지역에서는 찬탁(공산진영)과 반탁운동(자유진영)이 극심하게 대립했었다. 우익의 조직이 미약한 당시의 상황에서 남한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만약에 신탁통치를 하게 된다면 5년 이내에 남한지역도 공산화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던 미군정은 우익 단체들을 후원하면서 반탁운동을 유도하였다.
한편 포츠담 회담 당시 소련의 팽창의지를 확인한 미국이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것을 간파했던 이승만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그 유명한 “정읍발언”(1946.6.3.)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여기까지 한국이 분단되는 과정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2) 미-소 공동위원회의 좌절, 3)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다. 다시 말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으로 인한 한반도의 “1차 분단” 독일의 분단과 마찬가지로 국제법적 기득권을 미국과 소련이 차지하는 “포츠담 체제”의 구조였다.
하지만 6.25 전쟁을 통한 한반도의 “2차 분단”으로 한국문제는 “포츠담 체제”와는 다른 “휴전체제”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 38˚선 분단의 주체가 미국과 소련이었다면, 휴전조약에 서명한 주체가 미국(UN 참전 16개국 대표), 북한, 중국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90년 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후견 국가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 동-서독의 통일이 “2+4 조약”, 다시 말해 포츠담 회담에 서명했던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합의에 의해서 가능했고, 여기에 통일의 당사자 2개국(동-서독)이 추가로 서명했기에 이루어졌다.
6.25 전쟁 이후에는 “휴전조약”의 옵션으로 개최되었던 “제네바 한국평화회담”(1954.4.26.~6.15)은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최초이자 마지막 국제회담이었다. 여기에는 미국과 UN 참전 16개국과 대한민국 그리고 중국, 북한 외에도 중립국 자격으로 소련 등이 참여하였다. 회담은 북한지역에 대한 UN 감시하의 자유선거(변영태 외무부장관)와 외국군 완전 철수와 전 한국 선거(남일/주은래)라는 극명한 의견대립과 영연방 국가들의 비협조적 태도 등으로 인하여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었고, 이후 “휴전조약”의 옵션을 이행하기 위한 국제회담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지금도 휴전체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것이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이고 국제질서이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사실 2006년 11월에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이미 북한에게 “휴전체제”의 종식을 제안했었다. 당시 북한은 핵무력이 완성되지 못해서 이를 수용하지 않았었다. “휴전체제”의 종식과 “종전선언”은 “휴전질서”를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조약과 마찬가지로 국제법적으로 반드시 미국(UN 참전 16개국 대표)과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의도 필요하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한민국은 국제법적으로 권한이 없다.
하지만 현재 북한은 스스로 핵무장 완성을 했다고 주장하며, 도리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북 핵이 65년간 지속된 “휴전체제”의 종식과 새로운 평화질서를 만드는데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선 북한의 핵무장 완성에 여전히 회의적이고, 미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의 “비핵화”를 통한 평화조약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2월에 밴쿠버에서 6.25 참전 16개국 외교부장관 회담이 최초로 개최되었다. “휴전체제”라는 현상을 변경시키기 위해서 미국에게 이 국가들의 동의가 필요한 건 분명하다. 미국이 왜 이 시점에 6.25참전 16개국 외무장관 회담을 소집했는지, 그 배경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야기 시켜서 중국을 굴복시키려하고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의 “현상”과 “질서” 변경을 위해 실제로 군사적, 통상적, 외교적인 행동을 시작했다고 추측된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국제법적인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휴전체제”의 종식과 “평화체제”구축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북한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제 대한민국의 외교가 진가를 발휘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졌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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