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출발점

권오중 / 2018-08-30 / 조회: 7,993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부터다. 1961년 6월 군사정부는 1) 재무행정, 2) 금융, 3) 산업, 4)외국의 원조와 천연자원, 5) 국민과 산업구조, 6) 기타 부수적 문제 등, 그들이 추진할 경제 정책의 기본 노선 6개항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7월에는 이를 실현시킬 방안으로 “긴급경제시책”(18일)과 ”5개년 계획“(22일)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전까지 한국은 국제적 사회에서 부정부패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 부터의 차관도입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즉 통제하기 어려운 정부라는 국제사회의 인식 그리고 공무원들의 무능함과 부패로 인하여 공사급 이상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들은 4.19 이전까지 미국, 대만, 베트남, 프랑스, 영국, 터키, 필리핀, 바티칸 서독 등 9개국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한국이 수입하는 재원은 거의 '국제협력기구’(ICA, AID의 전신)의 재원에 의해 조달되었다. 이로 인해 외국과의 교역이 미국의 정책에 의해 흔들릴 수 있었다. 군사정부는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경제개발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아닌 제3국의 차관을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5개년 계획은 미국이 아닌 제3국으로 부터의 자본 유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런 의도에 따라 군사정부는 서독의 개발원조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서독으로 부터의 차관 도입은 이승만 정부시절부터 4.19 이후 민주당 장면 정부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었다. 그러나 실제로 서독이 한국에 대한 차관 제공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군사정권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설치로 인한 서독 정부의 인식변화였다. 대한민국과 분단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서독은 베를린 장벽 건설이후 서독의 반공전선 구축에 대한민국과의 강력한 친선관계를 구축하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반공전선 강화를 위해 서독정부는 대한민국에 대한 차관제공을 결정하게 되었다.


1961년 12월 12일 상공부장관 정래혁은 서독의 본(Bonn)을 방문하여 서독기업협회와 '5개년 계획’과 관련된 사업 계약을 체결하였고, 13일에는 서독의 경제부 차관 베스트릭(Ludiger Westrick)을 만나 서독과 경제, 기술 협력에 대하여 합의했다. 그 내용은 1)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하여 한국정부를 자문할 4명의 경제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을 2년 동안 파견, 2) 지하자원(특히 석탄과 철광석의 매장량)을 조사연구 할 전문가의 파견, 3) 서독에서 한국의 산업견습생 교육과 60명의 실습생에 대한 경비부담 등이었다. 또한 서독 정부는 이 사업을 위하여 7,500만 마르크 규모의 장기적 개발차관을 승인하였다. 서독 정부는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의 자급자족과 전기, 통신, 철도, 항만 등의 산업 인프라 건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걸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산업개발 분야에 서독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였다. 이를 통해 서독의 기업들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산업 인프라 사업(비료, 발전, 항만, 철도, 통신)에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독의 차관은 군사정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5개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재원을 제공해 줄 또 다른 국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군사정부가 접근했던 국가는 이승만이 배척했던 일본이었다. 당시 한일협상의 핵심 쟁점은 청구권 문제였고, 한일 간의 입장 차이도 컸다.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하고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인 합의를 끌어냈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도쿄로 들러 11월 12일 두 번째 회담을 가졌는데, 여기서 김종필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 불가, 총액 6억 달러 관철’을 요구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훈령을 받았지만, 결국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했다. 김종필은 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오히라 외상이 받아들여 메모가 작성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결국 한국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재원은 확보되었고,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외자의존도가 60%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1962~1966년의 기간 동안 당초 목표치인 7.1%를 웃도는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으며,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높아졌다.


1차 단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낸 박정희 정권은 이어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을 통해 식량자급, 산림녹화, 수산개발, 화학, 철강, 기계공업 건설에 의한 공업고도화에 초점을 맞췄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3~1976년)에서는 중화학 공업 건설과 수출증대를 통한 단계적 경제성장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77년에 100억불 수출(중화학 제품이 35%)을 이뤄냈고,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년)에서는 그 동안 수출 품목은 다양화되었으며,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군사정부는 산업구조를 고도화시켜 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정부주도의 경제발전 계획이 출발점이 되어 2017년 GDP 1조 5,297억 달러(세계 11위), 수출액 5,739억 달러 그리고 1인당 GDP가 3만 2,774달러(세계 27위)의 국가로 성장하였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던 많은 나라들이 5개년 계획을 수립했지만 대부분 실패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유무역을 지향하고 수출기업 육성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실패한 나라들은 외국자본을 들여오더라도 수입대체산업 육성에 치우쳤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내놓은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당시 국민이 원하는 바를 잘 표현한 것이었다. 잘 살고 싶다는 국민의 의지는 성장 동력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 정권은 자유무역의 현실에 적합한 치밀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그 결과로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성장정책은 관주도의 경제시스템, 대기업의 독점화와 자본가에 의한 이익의 편중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만들어냈다. 더구나 억눌렸던 노동 분야의 발발이 1980년대 후반부터 표면화하였고 정치적 민주화 바람도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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