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하나 없는 흙수저(?) 신격호가 일군 한·일 모두의 기업 ‘롯데’

윤서인 / 2016-12-16 / 조회: 29,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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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처럼 연일 뉴스를 오르내리는 기업 롯데. 기업 경영권 분쟁에 이어 한국 회사냐 일본 회사냐 의미 없는 논쟁까지, 점점 더 강력해지는 대한민국의 반일 정서가 이제는 양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기업에 까지 나쁜 이미지를 덧씌우고, 오너 일가의 한국어 발음에도 시비를 걸더니 급기야 롯데가 아사다 마오를 자사 광고 모델로 썼다는 것 마저 도마에 올려 공격을 하는 현실이다. 


특히 많이 나오는 말이 "롯데는 일본 회사인 주제에 한국 회사인척 한 게 잘못이다"……. 롯데가 한국 회사인척 하느라 한국에 막대한 법인세도 내고, 수 만 명의 한국인에게 일자리도 제공하고, 롯데월드까지 지어서 중국 관광객조차 한국으로 오게 만드는 모양이다. 도대체 한국 회사냐 일본 회사냐가 무엇이 중요한 지에 대한 얘기는 접어 두고, 필자는 별의 별 누명과 오명으로 점점 얼룩지고 있는 기업 롯데를 더도 덜도 없이 있는 그대로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한다. 모두 반일의 색안경을 벗고 롯데의 진짜 이야기를 들어 보자.


롯데그룹


롯데는 1948년 일본에서 창업했고 일본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10순위 정도의 기업이 된 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즈음해 1967년 한국으로 진입한 기업이다. 창업주 신격호 (시게미쓰 다케오しげみつ たけお 重光武雄)가 90이 다가오던 상당히 최근까지 경영 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2015년 기준으로 국내에만 총 80개사의 계열회사를 두고 있으며 주력 업종은 식품, 유통, 화학, 금융, 주력 업체는 롯데제과(주), 롯데칠성음료(주), 롯데쇼핑(주) 등등이다. 이중 상장사는 8개사, 비상장사는 72개를 거느린 재계 5위권 그룹이다. 이 중 모기업은 일본 쪽은 1948년에 설립된 롯데(주) 이며 한국 쪽은 1967년에 설립된 롯데제과(주)이다.


일본으로 건너 간 19세 소년 신격호는 1922년 울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자라던 문학 소년이었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을 매우 좋아해 장차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작가가 되려면 더 큰 물에서 공부해야 좋은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그는 1940년 부산공립직업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부모 몰래 19세에 부관연락선에 몸을 싣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간다."시골에 살다가 하도 가난해서 일본에 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가출인 셈이죠. 수중에는 83엔이 고작이었습니다. 정말 살기 어려웠습니다. 1941년이었으니까."


열아홉에 무조건 일본으로 건너간 신격호는 초등 친구의 하숙방에 얹혀 반년 정도 함께 살았다. 거기서 온갖 허드레 일을 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으나 문학도들이 전쟁에 끌려가던 시절인데다 현실이 너무 고되었고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단 꿈을 접고 대학에 진학해 화학을 전공하기로 한다.한 평 반짜리 방을 얻어 독립한 신격호는 와세다 대학 이학부에 진학했고 우유배달 등을 하며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난 뒤 졸업 후 1944년 도쿄 근교에 작은 윤활유 공장을 세웠으나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 버렸다.



그는 귀국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재기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의 손에 5만 엔의 빚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모른 척할 수 없다”며 다시 우유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일해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2년 후 1946년 5월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사업장을 열고 전공을 살려 커팅오일을 응용한 비누와 포마드, 크림 등을 만들면서 화학 관련 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는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200곳이 넘는 상점에 물건을 납품한 결과였다.


그러다 정작 대박이 난 것은 여기서 오일 등을 섞으면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만들어 낸 껌이었다. 열심히 비누를 만들고 있 어느 날 마침 공장에 놀러 온 지인이 미군에게 받은 껌을 내밀었는데 그 달콤한 맛이 신격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어엇! 나도 이걸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부터 갑자기 껌에 매달리기 시작한 그는 비행기의 바람막이 유리를 녹여 얻은 초산비닐수지와 송진 등을 섞어 녹여서 향료와 섞은 뒤 나무판에 흘려서 칼로 잘라 결국 껌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든 한 개에 2엔짜리 껌이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하자 주위의 식품가게 주인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어 껌을 사는 등 생일이나 명절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사업의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이제 종업원을 더 많이 고용하고 사업장을 크게 넓히면서 1948년 6월 28일, 오늘날 롯데그룹의 모체가 되는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한다.


문학 소년이 꿈이었던 그답게 회사 이름을 괴테의 소설 여주인공 '샤롯데'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리고 작은 껌 포장지 하나는 물론 광고 콘셉트까지 직접 감성적인 터치를 입히며 챙기기를 좋아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 롯데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였다" 고 말할 정도로 사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기업 경영의 전반에서 문학소년 특유의 감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장 1위로


당시 일본 껌 1등 업체는 '하리스 껌' 이었다. 롯데는 하리스 껌을 따라잡을 제품 개발은 물론 다양한 광고 전략을 실시했고 1953년 드디어 대나무 파이프 풍선껌의 히트로 풍선껌 분야에서 하리스를 따라잡고 만다. 이어 신격호가 직접 만들어 낸 "입속의 연인 롯데 껌" 이라는 카피를 내세운 광고를 선보이면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했고, 껌 포장지 안에 천만 엔 당첨권을 집어넣는 아이디어로 누가 천만 엔의 주인공이 될지 국민적인 관심까지 받으면서 일약 화제의 껌 회사로 도약, 일반 껌 분야에서까지 하리스를 따라잡게 된다. 



이때 하리스 껌에서는 "롯데는 돈 벌어 한국으로 다 보낸다." 라는 말로 롯데를 음해하며 공정거래 위원회에 고발까지 했다니 롯데의 국적논란은 예전부터 있어 온 모양이다.


1950년대 중반 드디어 일본의 1위 껌 회사로 등극한 롯데는 이어 1961년 초콜릿 사업에 진출해 업계 1위이던 모리나가에 도전장을 낸다. 이때 그가 한 투자는 바로 스위스의 초콜릿 기술자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거액의 스카웃료를 제시하여 무조건 스위스보다 좋은 초콜릿을 개발해 달라 당부했고 그렇게 나온 제품이 바로 지금까지도 소비되고 있는 가나초콜릿이다. 재미난 것은 이때도 신격호가 직접 카피를 지었다는 점. "가나와 함께라면 고독마저도 감미롭다" 지금 봐도 아름다운 광고 카피가 아닐 수 없다.


가나초콜릿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진입하는데 성공하자 여세를 몰아 캔디, 아이스크림 등등 다양한 제과 제품들을 쏟아 내놓으며 일본 최대의 제과 업체 메이지, 모리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제과회사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제과업 재벌이 된 롯데는 이후 1961년 롯데 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으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되었다.


모국으로 컴백


이때 운명처럼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되자 신격호는 한국으로 진입을 계획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애국심 때문이다 조국을 그리워해서 그렇다 말하지만 필자는 다름 아닌 기업가 정신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겐 한국에 널려 있는 무궁무진한 사업의 기회들이 보였을 것이다. 그가 가장 잘 했었고 모태가 되었던 바로 그 껌 사업으로 1967년 롯데는 한국에 진입하기 시작한다.천연 치클을 내세운 롯데 껌과 가나 초콜릿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것들이 바로 초콜릿과 껌이었다. 당장 보릿고개에 식량도 부족한 시기에 주전부리 기호식품인 껌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일본에서의 성공 경험을 살려 적극적인 마케팅을 폈고 마침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박차를 가하며 배고픔에서 해방되던 시기와 절묘하게 맞물려 롯데 껌도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 뒤 한국에서도 1973년 호텔 롯데, 롯데 칠성 음료 등을 설립했고, 1975년 롯데 자이언츠, 1978년 롯데 삼강, 롯데건설, 롯데 햄 우유, 1979년 롯데 쇼핑 등을 설립해 진정한 재벌그룹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한국인이 가난을 벗어나던 시기에 우리에게 기호식품과 선진 낙농 제품까지 다양하게 소개하며 식생활을 끌어 올린 1등 공신이 바로 롯데라고 할 수 있다. 롯데칠성음료를 통해 80년대에 시장에 쏟아져 나온 음료들을 그 맛은 물론 cm송까지 필자는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대한민국은 물론 일본까지 군것질과 주전부리 문화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신격호라 하겠다. 학교 끝나면 바로 앞 식품점에 들러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먹던 시절이 생각난다. 웃고 있는 태양 모양의 롯데 로고로 디자인 돼 있는 플라스틱 꽂이에 껌들이 가득 꽂혀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롯데는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과자를 사달라고 졸랐던 내가 지금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면서 그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롯데가 그 중심에 있다.“컬러TV의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는 TV를 이용한 홍보가 대세가 될 것이다. TV브라운관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인들을 뽑는 대회를 열자. 미인이 주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 롯데와 롯데의 상품이 연상되어 좋은 홍보 효과를 가져 올 거다.”


1980년대 컬러TV 시대와 발맞춰 화장품도 옷도 아닌 껌 만드는 회사가 '미스롯데선발대회’라는 미녀 마케팅을 실시한 것도 그의 감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65년 롯데공업으로 라면 사업을 시작한 신격호의 동생 신춘호 역시 대한민국의 라면 산업을 이끈 인물이다. 모기업인 롯데와 소원해지면서 형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사명을 '농심'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롯데가 생수 시장, 스낵 시장에 진출하면서 사사건건 농심과 부딪히며 오랜 라이벌로 겨뤄온 것도 재미있다. 이 두 형제의 경쟁 역시 대한민국 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롯데의 가치


롯데가 설립한 회사들이 주로 우리의 피부에 닿는 회사들이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필자에겐 1979년 설립된 롯데리아를 잊을 수 없고, 1988년 11월 오픈한 롯데 잠실점과 이듬해 7월 같은 장소에 롯데월드가 문을 열었던 것들이 모두 생생하게 기억난다. 1994년엔 세븐일레븐까지 인수하면서 지금 롯데는 유통의 대명사가 되었다.롯데그룹은 '일본 광윤사-일본 롯데홀딩스-한·일롯데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광윤사는 지배구조상 한국과 일본 롯데그룹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정점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 28.1%를 보유하고 있다. 2015년 8월 기준으로 광윤사는 신격호 총괄회장(0.8%)과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10%), 신동주 전 부회장(50%), 신동빈 회장(38.8%) 등 4명이 지분 99.6%를 보유하고 있다. 신격호는 짝수 달엔 한국, 홀수 달엔 일본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며 경영을 해 '현해탄의 경영인' 이라고도 불렸다.


중요한 점은 롯데는 한국에서 사업의 성공이 더 대단했고 그래서 지금은 한국 롯데가 일본 롯데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한국 롯데 계열사 80개, 일본 롯데 계열사는 17개 수준. 매출액 역시 일본에서 4조, 한국에서는 55조 이상이 나온다. 고용 인력의 차이 역시 일본 4천 5백 명, 한국 17만 명, 해외 6만 명 정도라고 하니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난다.이래서 롯데를 가지고 한국 회사냐 일본 회사냐 국적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일본에서 창업해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넘어와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은 물론, 국민들의 식생활, 문화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오히려 한국회사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평소 그가 '기업보국' 을 내세우며 번 돈을 우리나라에 재투자 한 규모도 매우 크며 지금 짓고 있는 제2롯데월드 랜드 마크도 우리의 미래 관광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랜드 마크의 유리창이 알고 보면 일본 제품이더라, 일본의 기술이더라, 하면서 어떻게든 반일감정을 동원해 그를 깎아내리는 자들은 얼마나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하였는가. 신격호의 반의 반의 반의 반 만큼이라도 이바지 했는가 진심으로 묻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주식이 바로 롯데제과 주식이다. 두 번째 역시 롯데칠성음료 주식이다. (물론 비싼 주식이 좋은 주식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이 '껌 값'이라 불리는 그 작은 껌으로 시작해 탄탄하게 오랜 세월 한 발짝 한 발짝 성장해 왔다는 점이 놀랍다. 뛰어난 마케터이자 카피라이터였던 그가 대중과 가장 깊숙이 맞닿은 제과업을 했던 것도 큰 성공요인인 것 같다. 필자가 참 좋아했던 롯데리아의 리브샌드도 그의 작명이었고 한우불고기버거 출시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참 세심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하겠다.


그동안 잘해왔던 롯데지만 부족한 면도 분명히 있다. 지금보다 좀 더 해외로 진출했으면, 좀 더 제품의 퀄리티가 디테일 해졌으면, 좀 더 기업문화 측면에서 대중 친밀도를 높였으면, 좀 더 야구 좀 잘 좀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롯데를 애정으로 지켜보고 싶다. 필자는 롯데 하면 추억이 생각나고 참 고맙다.


윤서인│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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