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의 과거와 현재 - 청과물·건어물 수출에서 반도체·스마트폰 수출로
이병철은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1) '삼성상회’는 국내산 과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이후 삼성은 1940년대 무역업과 양조업에서, 1950년대 소비재 수입에서 설탕, 제분, 모직의 수입대체 산업으로, 1960년대에는 비료, 제지, 보험업을 거쳐서, 1960년대말에는 전자산업으로, 1970년대에 석유화학, 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1980년대에는 반도체 등의 첨단 기술산업에, 90년대에 무선전화와 자동차에 진출하였다.2)
이병철 시기의 삼성의 성장은 한국 대기업 성장의 한 전형(prototype)을 보여준다. 급속한 외형적 성장, 기업가 정신, 한 가족에의 소유와 경영의 집중, 정부 산업정책에의 호응과 추종, 국내·국제 시장 변화와 요구에 대한 신속한 대응을 위한 사업의 다각화로 요약될 수 있다. 시장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도의 기술 축적이나 수직 계열화 보다는 국내환경의 수요에 맞는 새로운 '좋은’ 사업 분야들로 확장해가는 것이 기업의 성적을 좌우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선도적 기업가로서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 선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제일제당의 경우 초기에 제당업에 투자하여 사업 첫 몇 년 동안(2년간)은 시장을 거의 독점한다. 점차 제당업에 경쟁자가 생기고 설탕의 수요가 줄어들자, 제당업을 유지하면서 제분업에 뛰어들고 이후에는 제당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화학 기술을 계속 개발하여 1978년에는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과 제약업으로 다각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정부의 유전공학산업진흥계획은 이보다 훨씬 늦은 1982년에 시작되므로 정부의 지원을 예상한 투자는 아니었다.
창업자 이병철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산업 선점과 우수한 제품의 생산으로 삼성을 국내 제일의 기업집단으로 성장시켰다. 2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선친의 소망 “거니야, 니 삼성을 100배 큰 세계적 기업으로 키울 수 있나?"3)에 맞는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기업가 정신과 경영 능력으로 삼성그룹을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오늘의 삼성은 1987년 12월 1일 이건희 회장에 취임 당시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 원 정도에 불과했던 삼성그룹을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취임 25년인 2012년에는 그룹 매출이 383조원으로 커져 취임 당시보다 28.3배 성장했으며, 그룹의 자산총액은 255.7조원으로 성장했다. 시가 총액으로 비교해 본다면 1987년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303조2천억원으로 303배 커졌다고 삼성그룹은 평가했다.4) 따라서 오늘의 삼성은 모두 그의 업적이라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성그룹이 아니라 단일기업 삼성전자로만 평가하면 연 매출액 200조(2015년, 2010년 154조), 당기순이익 20조가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10여만 명의 종업원과 연관된 수십만 명의 관련기업 직원, 12만여 명의 주주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5) 스마트폰 판매가 애플에게 뒤지기는 하였지만 반도체는 아직도 세계 선두를 점하고 있다. 최근 2009년~2014년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표 1>과 같다.
<표 1>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2009년~2014년)
출처: 박영래, “삼성전자 연간매출 9년래 첫 감소,” 『아이뉴스24』. 2015년 1월 8일.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022100&g_serial=875504 (접속일: 2016년 7월 19일)
2. 삼성의 후계자 되기 - 에피소드들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6) 위로는 형 맹희,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 이병철은 '삼성상회’ 경영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어머니(박두을)는 형님과 누나들을 돌보느라 이건희는 의령(宜寧)의 친가로 보내 자라게 했다. 이건희의 “혼자 지내기”의 시작이었다.7)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1953년 5학년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의 길을 나서게 된다. 이후 중학교 2학년에 귀국하여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 선수 생활을 하는 등 3년을 다니고, 8)1961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이건희는 이병철의 뜻에 따라 다시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9)
일본에서는 일본어가 되지 않아서, 귀국해서는 일본식 말투로 따돌림으로 외로운 생활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혼자 자라서 가정교육을 1퍼센트도 받지 않았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10)
이러한 일본에서의 경험은 이건희에게 천편 이상 영화 보기, (심심해서) 기계부품 분해·조립하기, 개 키우기, 혼자 생각하기, 신속한 선진문물 흡수, 선진국 사람들의 수준으로 세상 보기 능력을 키우게 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는 이건희를 '말이 없고’,11) 은둔의 동굴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너스레를 떨거나 호탕하게 웃는 것 없고 주로 듣는 경청(傾聽)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1965)하고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미국 조지 워싱톤 대학에서 MBA 과정을 공부했다. MBA와 함께 신문방송학을 공부하였다. 미국 워싱턴 유학 기간에 당시의 최첨단 기술의 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에 빠지게 된다. 1년 반 미국에 머무는 동안 여섯 번 차를 바꾸며 분해하고 조립하고 왁스를 먹여 되팔았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의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 고성능 '슈퍼카’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한 이건희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무리하게 삼성을 자동차에 대한 투자로 이끌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으나 지나친 단순화 논리다. 이건희가 훗날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이유는 첫째 과거 아버지 이병철이 전자와 반도체 가운데 먼저 전자를 택하여 투자하였던, 다시 말해 미래에 자동차 투자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삼성의 미투자 분야였다라는 점, 둘째 이건희의 자동차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해도, 셋째, 미래 자동차 산업이 삼성의 전자 산업과 시너지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건희가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신문방송학을 함께 공부한 이유는 아버지 이병철이 막내아들이 제조업 기업에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매스컴을 공부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희의 첫 직장은 중앙매스컴(훗날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이었다. 제조업 경영은 아버지 이병철과 맏아들 이맹희, 둘째 이창희가 맡고, 막내 이건희는 중앙매스컴을 맡는 구도였다. 본격적인 회사 경영에서 떨어져 나와 이건희는 중앙매스컴 회장이자 장인인 홍진기에게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게 된다. 장인에게 헌법, 상법, 주식회사법, 판례, 역사, 정치, 상식 등을 18년 동안 매일 저녁 강의를 받게 된다.12)
3. 경영의 신(神)13) - 일류로의 변화 유도와 최고의 기회 선점과 스피드 경영
이건희의 첫 사업은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였다. 수차례 아버지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지고 했으나 아버지가 거절하자 본인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돈으로만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의 한국 지분 50%를 인수하였다. 이건희의 생각에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고 한다. 또 아버지 이병철이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 가운데 전자산업을 선택한 이유가 전자가 자동차보다 부가가치가 몇 배나 큰 사업이라는 점이 핵심이었고,14) 그 전자산업의 제품 가운데 가장 큰 부가가치를 보이는 것은 반도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반도체는 초기 단계의 집적회로를 사용해서 숫자 표시 전자 손목시계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건희가 인수한 한국반도체가 기술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적자가 계속되자 이병철은 삼성전자의 김광호 이사를 시켜 사업을 정상화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광호 이사는 “시계칩 시장을 집중 공략해 (한국반도체의) 전 세계 시계칩 시장의 점유율을 60%로 올려 흑자 회사로” 만들어 버린다. 이건희의 첫 사업은 반도체였지만 좌절 그 자체였다.15)
이후 이건희는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고 '부’의 직함으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경영 수업을 하게 된다. 이건희 특유의 과묵함과 재능을 본 이병철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삼남에게 삼성을 맡길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장남 이맹희와 둘째 이창희가 아버지의 눈 밖에 벗어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결정된 측면도 있지만, 이건희의 경영 능력이 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측면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판단된다.
1987년 11월 이병철 사후 이건희는 회장으로 취임하며 본격적인 자기 경영을 시작한다. 취임사에서 이건희는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19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고 선언했다, 곧바로 아버지의 영향력을 탈피하고 구세대 경영방식을 벗어나기 위해 비서실을 개편하고, 비서실의 감사 권한을 줄이는 대신 각 계열사사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덜고 새로운 사업에 적극 도전하도록 '자율 경영’ 시스템으로 전환한다.
이후 경영 성과가 나아져 회장 취임 첫해 1988년 그룹 총매출 20조 1000억원, 총 세후 이익 3,411억원에서 1992년에는 총매출액 38조 21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수출액 역시 1987년 11.25억 달러에서 1992년에는 18.6억 달러로 증가한다.16)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에는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에 나서 제품의 '품질’을 높일 것을 주문한다. 소위 '품질 경영'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1993년 1월 LA에서 임원들과 함께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던 중 GE, 월풀, 필립스, 소니, 도시바 등 세계 일류 제품들과는 달리 매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삼성 제품은 Macy’s나 Bloomingdale's 등의 미국 백화점의 주요 매대 보다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싸구려 제품으로 인식되었다. 국내에서는 일류라고 인정받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메인 라인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바 'LA 회의'에서 이건희는 임원들 앞에서 직접 삼성 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뜯어 분해하고 기능과 부품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지적했다. 부끄러운 임원들이 스스로 변화하게 유도했던 것이고 거기에 세계 제일이 아니면 앞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한국 시장에 안주하는 삼성을 깨워 세계의 삼성으로 만들도록 한 단계 도약하는 변화를 실천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류 선진국 회사 제품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게 방향을 제시하는 회의는 일본 동경 아키하바라를 돌아 본 후 계속되었다. 품질과 기술을 중시하는 삼성으로의 조직 변화를 유도해 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93년 6월에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있게 된다. 1993년 6월 4일 동경 출장에서 삼성전자의 일본인 고문 후쿠다로부터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받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보고서에는 “(삼성은) 개인은 다 훌륭하지만 연구한 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현재 자신들이 제일이란 자만에 빠져서 창조적 도전을 하지 않는다. 한국 기업은 미리 대비하지 않고 문제가 터진 후에 돈을 쓴다. 삼성의 관리자들은 너무 급하고 실적과 결과만 평가한다. 일본의 근로자는 살아남기 위해 일벌레처럼 일을 하고 연구소엔 밤이 새도록 불이 켜져 있는데 삼성은 안 그렇다.”는 내용이었다.17) 이에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독일 쾨니히슈타인의 켐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로 불러 삼성의 변화를 촉구하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18)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과 핵심 임원을 부른 이유는 통독 이후의 변화와 유럽연합(EU) 체제로의 변화를 느끼며 미래의 삼성을 구상하는 것으로 그 핵심에는 국내 최고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최고로 업그레이드 하라는 변화의 주문이었다. 그곳에서 “불량 생산은 범죄입니다.”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버리고 질 위주로 갑니다.” “앞으로 21세기에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 등 안주하지 말고 계속 변화하여 세계의 흐름을 따라 잡으라는, 그리고 일류의 사고를 하고 최고 일류의 제품을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이는 물론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의 위치 선정이 아니고 국내 1위를 세계의 톱 랭킹에 들여 놓기 위해 임직원의 사고 전환을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식 '바꿔 간담회’는 68일간 계속되었다. 이건희는 1800명과 350시간 대화했고 사장단과 800시간 토의했다. 본인 스스로가 '신경영 대장정’의 목적을 “구조적인 문제는 그 근본부터 해결해야 하고 그 근본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설명하고 있다.19)
이건희는 사람을 바꾸고 긴장시키기 위하여 매우 자주 삼성 위기론을 주장한다. '진짜 위기’ 또는 '암 2기’, '진짜 위기는 자만,’ “변해야 살아 남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식의 위기 인식과 대처가 삼성을 일류로 존속시키는 메기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20)
이건희의 투자의 성공은 '선택과 집중, 사활을 건 도전'에서 찾을 수 있다. 1992년 64메가 D램 세계 최초 개발, 1994년 다시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1996년 1기가 D램 세계 최초 개발로 3세대 연속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한 발 앞선 개발로 선두로 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의 D램 회사에 비교하여 30% 수준이었다. 차세대 4메가 D램에 크게 투자하여 앞서 가려던 일본은 세계 시장이 최첨단 제품으로 값이 비싼 4메가 D램에서 실용적인 1메가 D램으로 수요가 확대되자 삼성에게 세계의 수요를 빼앗기게 된다. 첨단 기술로만 이기려 한 일본 기업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삼성에 패배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 기업이 기진맥진 해 있을 때 이건희 회장은 마지막 승부수로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대폭 증대하고 세계 최초로 4기가 D램을 개발하는 등 일본 기업을 기술과 투자 규모에서 앞서게 된다.21)
D램으로 일본 반도체와 싸우면서 1997년 세계 최초로 액정화면의 기판 사이즈를 600 x 720mm로 키워 생산하고, 또 세계 최초로 30인치 초대형 TFT-LCD를 개발하여 기술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샤프를 꺾고 세계 1위의 선두로 나가게 된다. 그 동안 LCD는 일본이 세계의 절대 강자였지만 그리고 삼성에게 기술이 넘어가지 않도록 LCD 관련 기술을 정부가 철저히 차단했지만 삼성은 악조건 속에서 기술로 세계 1위로 올라서게 된다.22)
이건희의 사활을 건 도전은 지극히 전략적이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다. 기술에만 안주하지 않고 또 기존 제품의 개선이나 신기술 적용에 그치지 않고 제품에 새로운 개념을 부과하는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명품 TV' 개발을 위해 삼성코닝, 삼성전관, 삼성전기 등 관련 계열사의 관련 분야가 동시에 참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는 '동시공학’ 개념으로 제품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제품의 완성도와 참신함을 높이는 시너지를 창출하였던 것이다.23)
휴대전화의 세계 정복 역시 전략의 성공이었다. 경쟁자인 일본이 '소형화 기술’에 집중하는 동안 삼성은 '세계 표준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넓히는 전략을 택하여 성장해나갔다. 즉, 이건희 회장은 휴대전화의 승패가 '표준방식’에 있음을 꿰뚫고 일본이 국내 시장에 머물 때 미국의 표준방식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고, 유럽의 표준방식으로 유럽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키워나갔다.24)
종합하면 이건희 회장의 투자 전략, 판매 전략, 기술 전략의 적중이 반도체, LCD, 명품 TV, 휴대전화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였다던 것이다. 특히 휴대폰 시장이 스마트폰으로 형성될 것을 예측하고 빠르게 생산을 전환한 전략적 선택은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국내 시장이 커서 국내 시장을 우선시 하는 일본과 달리 시장이 좁은 한국은 시작부터 국제적 시장 개척을 위한 국제적 기준 채택이 생존 방식인데 이건희 회장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 혜안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세계 최강 기업 삼성이 두렵다』를 낸 기타오카 도시아키(北岡俊明)와 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는 “반도체, 휴대폰, LCD(액정화면)의 '삼각편대’를 내세운 삼성이 도시바, 히타치, 소니 등 일본 9대(大) 전자 기업의 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이유를 삼성 이건희 회장의 뛰어난 경영철학에 주목했다. 일본 기업들이 공존공영과 공생을 최우선으로 일본 시장 점유율에 집착한 반면 삼성은 “기회 선점, 스피드 경영”으로 세계를 공략하고 세계 초일류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25) 모든 경영인의 기회 선점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계 초일류를 목표로 한다고 모든 회사가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게 조직을 끌고 간 이건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은 감히 '경영의 신(神)’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4. 삼성 이전과 이후(before and after)
(1) 삼성은 한국을 '제조 강국’ 'IT 강국’ '전자 강국’으로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200조 매출은 주로 해외에서, 특히 스마트폰을 포함한 IT모바일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2013년 삼성전자의 매출은 228조 7,000억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국내 매출은 22조 8,000억 원이로 전체 매출에서 국내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10%에 불과하다. 해외에서의 매출과 유명세 때문에 대한민국보다 삼성(Samsung)이 더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제조업 강국, IT 강국으로 만든 기업이다.26)
(2) 삼성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전자회사로 스스로 자리매김하였다. 삼성은 한마디로 세계에서 통하는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상 한동안 세계적인 기업이었던 포항제철이나 현대건설과 같은 대기업이 있었지만 지속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그리고 TV 등에서 소니(SONY)를 제치고 1등으로 자리 잡은 회사이다. 어떤 이는 제대로 일본을 이기거나 앞선 이는 명량대첩의 이순신과 삼성의 이건희 밖에 없다고 재미있게 평가했다.27)
이건희씨는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여 2014년 5월 쓰러져 입원하기 전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나갔다. 2014년 6월 말 기준으로 삼성그룹은 73개의 국내 계열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상장사는 17개사, 비상장사는 56개사이다.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로는 전자 부문에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S, 삼성SDI 등이, 금융 부문에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 등이, 화학 부문에 삼성종합화학, 삼성정밀화학 등이, 중공업·건설 부문에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테크윈 등이, 서비스 부문에는 호텔신라, 제일기획, 에스원,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의료원 등이 있다.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회사는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이다.28)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취임 후 '21세기 초일류기업 달성’이라는 비전과 '조(兆) 단위 순이익 실현’을 약속했고 '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을 축으로 하는 경영으로 실현하였다. 당시는 실현 불가능한 선언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평가절하 됐던 목표를 실현함으로서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인 기업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삼성의 매출액은 이건희 회장 취임 당시인 1987년과 비교하여 17조원에서 152조원으로 8.9배 성장했으며 2,700억 원에 불과하던 세전 이익을 14조2천억 원으로 52.6배 성장시켰다. 이 시기에 삼성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140조원으로 140배, 수출은 9억 달러에서 663억 달러로 73.7배 증가하였다. 해외직원을 포함한 임직원수는 16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1.7배 증가하였고 그 동안 삼성은 반도체, TFT-LCD, 휴대전화, 모니터 등의 세계 1등 제품을 탄생시켰으며, 브랜드 가치도 2007년 169억 달러로 세계 21위를 기록하면서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2002년에는 시가총액 면에서, 2005년에는 브랜드가치 면에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일본의 소니(SONY)를 앞지름으로써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으로 성장하였다. 2011년에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판매량이 애플(Apple)의 판매량을 넘어서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29)
이렇게 삼성의 제품이 소니를 추월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팔리는 제품이 될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제품의 디자인이 크게 향상된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은 2002년부터는 “세계 1등이 아니면 (삼성의)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물론 1996년 신년사에서 이미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경영의 최후의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96년 올해를 그룹 전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이렇게 디자인을 강조해도 나아지지 않자 2005년 4월에는 사장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참석한 뒤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삼성의 디자인 기술은 아직 부족하다. 애니콜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1.5류이다. 이제부터 경영의 핵심은 품질이 아니라 디자인이다.”라고 제품의 디자인 혁신에 나선다. 그 결과가 최근 삼성에서 유럽풍의 멋진 가구의 모습을 갖춘 전자제품이 출시되는 이유로 판단된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이와 같이 대단히 높은 경영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해 왔다. '삼성공화국론’이 그것인데 삼성그룹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5만 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며 국내 경제에 기여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한국을 알린 삼성의 기업 규모가 크다는 사실이 바로 부정적으로 영향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도리어 삼성은 비자금 사건 이후로 정치권과의 연계나 사회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활동은 크게 자제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비판과는 반대로 삼성은 그 규모에 합당하게 사회 공헌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31)
(3) 삼성은 기업의 성공에 인재가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병철은 삼성을 제일로 만들기 위해 회사 이름에 제일을 붙였다. 제일제당, 제일모직, 제일합섬. 그리고 “기업은 사람이다.”를 외치며 제1의 인재를 뽑아 제1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삼성을 기업들의 '사관학교’로 만들었다. 이건희는 최고의 인재가 만명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신념하에 사장 역할의 반 이상을 세계적 최고 인재 찾기에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삼성의 인재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1980년대 64메가 D램을 개발할 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눌러 앉은 한국의 인재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에서도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어느 회사도 기술을 내놓지 않을 때 결국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한국인 인재였던 것이다. 이후 특히 삼성이 가장 부족한 부분의 하나인 휴대폰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세계적인 인재들이 해결해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건희 회장은 인재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2000년 신년사에서 “디지털 시대는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 전쟁’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뛰어난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고, 2002년 6월의 인재전략 사장단 회의에서는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 지적 창조력의 시대입니다.”라고 했다.32) 이는 삼성이 '관리의 삼성’에서 '기술의 삼성,’ '디자인의 삼성’ 그리고 '인재의 삼성’으로 변화해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삼성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이슈 선점과 비전 제시가 한국의 다른 후발 기업(following companies)들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4) 삼성은 새로운 기업 소유경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삼성은 아직도 소위 '재벌’ 또는 '재벌그룹’이라고 불리는 가족 소유경영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재벌이 2차 대전 이후 해체되어 게이레츠 체제로 남아는 있지만 가족 소유경영은 아니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을 제외하고는 3대로 이어지는 가족 소유경영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델은 찾기 힘들다. 이건희 삼성그룹의 성공은 소유경영은 무조건 나쁘다거나, 가족경영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므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 일부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반대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5. 이건희의 삼성이 주는 교훈:
기업의 성공은 정치가 아니라 경영자가 만들어,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
그리고 '정치인은 4류 수준’
이병철 회장의 삼성은 정치권과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 즉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는 관계를 철칙으로 삼았다. 한국비료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인의 신의(信義) 없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면서 기업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치인과 관료의 자질이 높아져야 함을 지적한다.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발언의 배경과 발언 전문을 볼 필요가 있다. 1995년 4월 이건희 회장은 중국의 장쩌민 주석과 리펑 총리와 연속해서 회담을 갖게 된다. 삼성이 2000년까지 중국에 총 40억 달러를 투자해 100억 달러 규모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장쩌민 주석과의 만남에서 “국가지도자는 나라의 비전을 설계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으며, “일본은 이미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중국은 지도부가 앞장서서 경제 발전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데, 우리의 행정과 정치는 규제와 권위주의의 과거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려면 국민·정부·기업이 삼위일체가 되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국가 경영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틀을 새롭게 짜여 한다.”는 요지의 말을 간담회에서 하게 된다.33)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회장이 되고 처음 이렇게 많은 기자들과 만난다. 현재 우리 정치와 관료행정 수준으로는 21세기를 준비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현 수준을 국제 수준과 비교해 볼 때 비관적이다. 우리의 정치인은 4류 수준, 관료행정은 3류 수준, 기업은 2류 수준이다. 이 정권 들어와서 행정 규제가 풀린 것이 하나도 없다....이 정부와 삼성은 밀월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티한 관계에 있다. 자동차 사업은 우리가 정부와 밀월관계에 있어 따낸 것이 아니라 부산시민들이 불만을 터드리는 바람에 허가된 것이다....중국 국가 주석은 반도체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 해도 허가가 안 나오고, 허가를 받으려면 도장 천 개를 찍어야 한다. 반도체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인허가 행정이 규제 일변도이므로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이대로 가다간 우리나라는 2류 국가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문제는 인허가권을 쥐고 규제를 가하는 관료들의 수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34)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이건희 회장의 발언의 핵심은 관료와 정치인이 변해야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이 있었던 1995년부터 2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인 4류, 관료 3류의 현실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극은 그의 예언대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추락해 가고 있는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이건희 회장 시기의 삼성 성공의 핵심은 기업가 정신과 그의 탁월한 경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건희는 자신의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의 “미래 경영자의 모습”과 “사업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서 경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나는 '경영은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영화 뒤에는 반드시 명감독이 있듯이 훌륭한 경영의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기업을 발전시키는 주체는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가 바로 경영자다.35)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놓고 간단히 운(運)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업을 해본 사람은 운(運)이 좋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하려면 그에 값하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36)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국내 최고의 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배경에는 물려받은 재산을 안이(安易)하게 지켜내는 수성자의 모습도, 정부를 배경으로 한 권력의 후원도 또는 호경기를 맞아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운(運)도 아닌 무한히 노력하는 끈기와 집념의 경영자의 모습이 숨어 있다. 이건희 회장이 자신을 삼성의 '소유주’라기보다는 '기업 경영자’라고 말해 온 이유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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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자유경제원 -기업가연구회] 발제를 위한 초고임. 인용을 금함. 추후 내용과 전거를 보완할 예정임.
1) 이병철은 1936년 이미 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첫 투자는 '협동정미소’였다. 이병철이 정미업을 시작한 이유는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고, 당시 정미소는 농부에게서 소비자(국내, 일본)로 미곡이 이동하는 흐름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36년 6월에는 운송회사를 인수하여 운송업에 뛰어들었고, 일본 식민지 말기 연료 공급 부족이라는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뒤 마산에 위치한 조선식산은행에서 빌린 자금으로 토지에 상당히 투자하지만 '중일전쟁’이라는 상황의 변화를 예측하고 한국 거주 일본인 대규모 토지소유자들이 낮은 가격으로 토지를 매매한 것에 이병철이 속아 실패하게 된다. 삼성은 이병철의 초기 실패한 사업은 제외하고, 지금의 삼성과 긴밀히 연관된 '삼성상회’의 설립연도인 1938년을 창업 원년으로 계산한다.
2) 김인영, 『한국의 경제성장』, 서울: 자유기업원, 1998, p.136.
3) 위 말은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 사건 이후 맏아들 이맹희에게 넘기면서 던진 말로 알려져 있다. 본 글에서는 '맹이’를 '거니’로 바꾸었다.
4) 김현석, “이건희 회장 25년…"애플의 유일한 경쟁자" 삼성 매출 39배 커졌다,” 『한국경제신문』, 2012년 11월 20일. 2012년 그룹은 이건희 회장에 취임 25주년을 맞아 경영성과를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이던 매출은 올해 384조원(예상)으로 39배, 임직원은 10만명에서 42만명으로 증가, 수출은 63억달러에서 1,567억달러로 25배 성장, 이익은 당시 2700억원에서 올해 30조원 이상으로 110배 넘게 증가”했다고 공개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애플의 유일한 경쟁자”는 삼성이라고 평가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3년 공정거래백서』에서 2012년 삼성 그룹의 계열사는 81개, 자산총액은 255.7조라고 공식 발표했다.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공정거래백서』, 서울: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p.604. 참고로 최근 이재용 부회장의 계열사 정리로 2016년 삼성의 소속회사는 59개로 축소되었다.
5) 삼성전자는 3개의 주요사업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CE부문(TV, 냉장고 등)과 IM부문(스마트폰 등 HHP, 네트워크시스템 등), DS부문(DRAM, 모바일 AP, LCD 패널 등)으로 나뉜다. 삼성전자의 전체 매출의 50~60%, 영업이익의 60~70%는 IT모바일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앞의 내용은 자료는 네이버 증권에서 가져옴.
6)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10일 자택에서 쓰러진 이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중에 있다.
7)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았고, 1945년 해방이 되고 집에 가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 둘째 누나가 “늬 엄마는 누구냐”고 해서 “의령에 있다”고 대답하고, 도리어 여동생에게 “늬 엄마는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서울: Human&Books, 2010, p. 19.
8) 이건희의 서울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의 별명은 '백곰’이었다고 한다. 큰 덩치와 흰 피부 때문으로 추측된다. 웰터급으로 전국대회 입상을 했고, 연습 중 눈썹 부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자 “어머니가 그걸 보시더니 깜짝 놀라가지고 형제, 누나를 총동원해서 교장한테 찾아가 빼달라고 해서 다음 날 제가 레슬링부에서 쫓겨났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서울: Human&Books, 2010, pp. 35, 40. 이러한 레슬링 선수생활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은 훗날 IOC위원에 임명된다.
9) 『호암자전』에 따르면 이병철은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입학하여 “모처럼 공부에도 열중하고 내 나름으로는 충실한 나날을 보내”다가 심한 각기병(脚氣病)에 걸려 휴학하게 된다. 이병철, 『호암자전』, 서울: 중앙일보사, 1986, pp. 12-17.
10) 이건희는 인터뷰에서 "가장 민감한 때에 배고픔, 인정차별, 분노, 객지에서의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런 모든 걸 다 느꼈습니다.“라고 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3.
11) 이건희는 한 인터뷰에서 “집에서 제 별명이 '말 없는 사람’입니다. 무재미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20년 동안 우리 가족기리 외식한 게 두세 번이나 될까요.”라고 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9.
12)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109.
13) 경영 능력으로만 평가한다면 '신의 경지’으로 보인다. 인간의 어떤 능력을 '신의 경지’라고 칭찬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다. 하지만 경영 성과로만 볼 때 현재까지 어떤 경영자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룬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논쟁적일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14) 당시 전자는 생산품 1그램당 부가가치가 17원인데 자동차는 1그램당 3원 몇 십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15)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134.
16) 이경식, 『이건의 스토리』, p. 235.
17)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61.
18) 켐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의 테라스에서 프랑크푸르트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19)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42.
20)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은 그의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과 막내로서 삼성그룹의 승계자로 살아온 삶의 무게감 때문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21)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서울: 경영자료사, 2014, pp. 312-322.
22)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p. 322-326.
23)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 327.
24)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p. 331.
25) 이인열, “일본이 두려워하던 한국,” 『조선일보』, 2016년 7월 23일, A30; 기타오카 도시아키(北岡俊明)·일본디베이트연구협회, 『세계 최강 기업 삼성이 두렵다』, 책보출판사, 2006. 일본에서 위 책이 출판된 것이 2005년이니 벌써 11년이 지났다. 삼성이 추격자 소니를 얼마나 더 앞서 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속단하기 힘들다.
26) '전자(電子) 강국(强國)’의 이미지는 삼성과 LG의 합작품이다.
27) 박상하, 『이건희: 초고속 성장 제국 '삼성전자’ 이건희 스토리』, 제4부 참조.
28) 네이버 지식백과, “삼성그룹(Samsung Group).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649960&cid=43167&categoryId=43167 (접속일: 2015년 11월 6일).
29) 김인영, 「기업에 대한 통념 깨기 ① 기업의 의미와 사회 공헌 - 삼성의 사례를 들어」, 자유경제원, 2016년 5월 17일, p. 6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옴. https://cfe.org/20160517_144592 (접속일: 2016년 7월 20일)
30)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74-376.
31) 삼성의 사회공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인영, 「기업에 대한 통념 깨기 ① 기업의 의미와 사회 공헌 - 삼성의 사례를 들어」, 자유경제원, 2016년 5월 17일을 참조할 것.
32)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66-367.
33)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61.
34)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p. 304-305.
35)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75.
36) 이건희,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서울: 동아일보사, 1997, p. 286.
37) 본 글에서는 글의 주제인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관계없는 진보좌파 계열 언론이나 학자, 그리고 민노당(통진당, 정의당)의 과장된 삼성공화국론, 소유지배 문제, 무노조 경영 비판, 세습 경영, 삼성전자 한계론 등에서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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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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