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항제철의 탄생
포스코는 민영화 이전의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를 모태로 하여 탄생한 세계적인 철강기업이다. 포스코 이전 우리나라에는 철강산업이란 것이 사실상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제철산업은 제선(쇳물 만들기), 제강(강철 만들기), 압연(금속가공), 열연(금속 성형)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전 과정을 모두 갖춘 철강공장을 일관 종합제철소라고 한다. 포스코 이전 우리나라에는 각각의 시설을 갖춘 소규모 공장들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가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한국전쟁 이후, 대대적인 전후 복구사업으로 철강재 수요가 급증하자, 정부는 일관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종합제철소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맨 처음 시도는 자유당 말기인 1958년에 강원도 양양에 지으려던 종합제철소였지만, 정치적(4.19), 경제적(외자도입실패) 이유로 말미암아 흐지부지 되었다. 두 번째 시도는 민주당 정부에서 수립한 동해안 제철소 건설계획이었지만 변변히 추진해보지도 못한 채 무산되었다. 이어 집권한 공화당 정부 역시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인데, 야심차게 출범한 공화당 정부에서는 부정축재 환수금, 외자도입 등등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었지만 세 번의 시도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포스코는 그 다음 시도였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7년~1971년)에 즈음하여, 제조업 발전을 위해서는 철강공업의 반드시 필요함을 재차 인식한 정부는 장기적인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1963년에 5개국 8개사의 연합체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결성되어 1968년까지 예비협정, 기본협정, 추가협정의 세 차례에 걸쳐 협상이 이루어졌다. 협정이 진행중이던 1967년 7월에는 제철소의 입지로 포항이 선정되었고, 9월에는 사업주체로서 대한중석광업(이하 대한중석)이 결정되었다. 당시 설립자본금은 총 4억원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3억원, 사업주인 대한중석(현, 대구텍)이 1억원을 출자하였다.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포항제철의 창립은 1968년 4월1일의 일이다.
박태준은 당시 대한중석의 사장으로서, 대한중석의 성공을 바탕으로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포철이 정상화되기까지는 많은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은 KISA에서 지원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당시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 박사가 포철의 경제성이 없다고 평가한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자금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핵심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한국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결국 KISA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포이 회장의 권유로 만들어진 휴식기간 동안 박태준은 포철 건설에 관한 자금을 동원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바로 대일 청구권자금 8천만 달러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일청구권자금은 돈을 대는 일본이 사전에 자금의 사용처를 명시해둔 것이기 때문에 포항제철 건설자금으로 바로 활용할 수는 없었다. 박태준은 일본의 내각을 집요하게 설득하였고, 결국 일본의 지원결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후술할 것인지만, 박태준은 유소년기의 일본생활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지인들이 있었으며 일본 유력인사들을 통해 우호적인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70년 4월1일, 마침내 포항 1기 설비가 착공됐다. 조강기준 연산 103.2만t 규모의 포항종합제철은 1973년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포항종합제철은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 포항제철의 발전
일관 종합제철소는 제품을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 제선공장, 제강공장, 압연공장, 열연공장의 순으로 건설하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며, 이를 전진(Forward)방식이라 한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역으로 열연공장부터 건설하는 역진(Backward)방식을 택했다.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고 여기서 번 돈을 공장 건설에 재투자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포항제철은 1기 총 22개 공장설비 가운데 1972년 7월 중후판공장을 준공하고 같은 해 10월 열연공장을 준공했다. 그리고 1973년 6월9일,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해 첫 쇳물을 생산했다. 같은 달 19일 분괴공장과 강편공장을 준공함으로써 제선·제강·압연·지원 등 총 22개 공장 및 설비로 구성된 종합제철 일관공정을 모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3년 7월3일, 마침내 포항제철소에서 포항 1기 설비의 종합준공식을 가졌다. 이후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2~4기, 광양제철소 1~4기, 광양 5고로 증설 등 지속적이 설비확장에 나섰다. 1기 준공 원년 44만 9천톤이던 조강 생산량은 2005년에는 3천만톤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수익 증가 역시 인상적이다. 가동 1년 만에 당시 외자 투입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242억원의 흑자를 실현하였으며, 이후 지속적인 흑자를 이어오고 있다. 초창기 포스코가 이룬 업적의 위대함은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고로의 생산성에서 찾을 수 있다. 쇳물을 생산하는 고로는 그 특성상 내구연한이 15년을 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973년에 만들어진 제1고로는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또한 비용은 낮고 효율은 높은, 속칭 '가성비’로는 아직도 세계최고의 생산성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코는 파이넥스 등의 최첨단 제조기법 등을 발판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조강생산능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후 중국업체들의 급격한 부상으로 말미암아 현재는 세계 5위권 정도에서 순위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비록 조강생산량 1위 자리는 내주었지만 지배구조의 투명성이나 운영 안정성, 무엇보다 우수한 품질 등의 차원에서 존경받는 세계 1류 철강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투자의 달인인 워렌버핏 역시 포스코 투자경험에 매우 높은 만족감을 밝힌 바 있다. 최근 사업다각화를 염두에 둔 투자로 인해 다소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포스코는 분명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부족함이 없는 기업이다.
3. 철강왕 박태준
박태준은 1927년 10월 부산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까지는 양산에서 자랐고, 이후 부친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할 때까지 이방인으로 성장했다. 1945년 해방이되자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으며, 육사에 입학하여 6기로 졸업, 임관하였다. 박정희와는 육사시절 사제지간이었지만 5.16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박정희가 거사 실패 시 가족부양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 복무시 박태준은 일절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야전군으로 복무할 당시, 부정한 고춧가루 납품업자를 색출하여 혼내주고, 관련된 군내 상관들의 압력도 단칼에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당시 군수기지 사령부의 박정희 사령관에게도 알려졌고, 그를 인사참모로 발탁하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5.16 이후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과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였으며, 1963년 육군소장을 끝으로 예편하였다. 당시의 군 출신들이 그러하듯이 박태준 역시 정치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꾸게 된다. 박태준의 경제인으로의 활동이 시작된 시기였다.
경제협력, 기술제일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박태준은 일본인 친구들도 많고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에서의 삶은 다른 재일 한국인들이 겪었듯이 대부분 차별과 모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 무시와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실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는 정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포스코의 기술제일, 1등주의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포항제철이 처음 시작될 당시, 일본의 도움은 거의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KISA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은 포항제철은 자금조달원으로 대일청구금을 활용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 자금은 농업부문에 이미 배정된 것으로 그것의 전용에 대해서는 한일양국의 재합의가 있어야 했으며, 그 전제조건은 일본철강업계 대표들의 포항제철에 대한 기술지원 약속이었다. 이를 이끌어 내기 위해 박태준이 만난 것은 업계의 리더격인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이었다. 박태준은 이나야마 회장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고, 일본철강업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 받았다. 이것이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하는 일본기술단의 조직으로 구체화되었고, 그들은 포항으로 들어와 기술도 없고 경험도 없는 한국인들의 제철소 건설 현장에서 감독 역할을 맡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코는 국제경제협력, 즉 한일경협의 상징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경제활동의 국제화가 가속화되면서 국가 간 경제협력의 중요성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 되었다. 물론 서로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겠지만, 포스코는 우리경제의 근대화 태동기부터 국제경협을 토대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포스코를 적극적으로 도왔을까? 박태준은 어떻게 일본철강업계, 나아가 내각의 지도자들까지 설득할 수 있었을까? 이를 짐작할만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박태준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 역설하였다. 북한의 도발은 대한민국은 물론, 일본에도 심각한 위협요인이며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야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이다. 부산에 북한의 적기가 휘날리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안보가 황폐화되었음을 의미하며, 이 경우 일본역시 비상사태에 직면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역설한 것이다. 대한민국에 유리한 것이 일본에게도 유리한 것이며, 따라서 일본 역시 한국의 경제발전에 일조해야한다는 논리로 압박하였다. 결국 박태준은 일본철강업계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러한 지지를 앞세워 내각의 지도자들까지도 설득하게 된다.
박태준의 초창기 목표는 '완공과 동시에 공장을 완전히 우리 손으로 돌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공장의 설립단계부터 신일본제철 등의 일본 엔지니어들로부터 초보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모양새였지만, 원대한 목표를 가슴에 품은 것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박태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원들의 해외연수에 적극적이었고, 직원들 역시 이를 잘 이해했다. 포항제철을 탄생시키는데 절대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나야마 회장의 배려는 직원들의 해외연수 시에도 이어졌다. 박태준의 부탁을 받아 홋카이도의 한 제철소 전체를 포항제철의 연수생들이 직접 운전해보게끔 하는 통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이와 같은 다소 무모해보이는 노력으로 인해 포항제철소 1기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포스코 직원들 손으로 공장전체를 직접 돌리는 상황에 이른다. 일본기술단이 완전히 철수한 때는 1978년 포항제철소 3기를 완공한 직후였으며, 이는 포항제철이 기술적으로는 사실상 자립했음을 의미한다.
제철보국, 그리고 우향우 정신
포항제철의 설립모토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다. 즉 포항제철을 성공시켜 나라에 보답하자는 것이다. 포항제철의 종자돈은 대일청구권자금의 일부였으며, 박태준은 이를 '조상의 혈세이며 피의 대가’라 규정하였다. 조상의 피의 대가로 세운 포항제철을 기필코 성공시켜 국가에 보답하자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항제철의 또 다른 모토는 '우향우 정신’이라고 한다. 우향우란 군대식 제식훈련 용어지만, 포항제철이 있는 영일만에서 우향우를 하게 되면 동해바다이다. 결국 우향우 정신이란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죽자’는 결기를 의미한다. 전쟁을 하듯이 제철소 건설과 발전에 매달린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지간한 희생쯤은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생업은 중요하겠지만 전쟁하듯이 목숨 걸고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을 강조하는 박태준은 진정 비장했고 사원들은 이에 부응하였다. 전직원이 밤낮없이 달려들어 포항제철을 세우고 일구게 된 것에는 이와 같은 절박하고도 강인한 정신력이 함께 했기 때문이라 본다.
박태준의 순환론
포스코가 기술자립을 한 무렵, 중국 덩샤오핑이 일본 신일본제철을 방문하여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과 환담을 나누었다. 덩샤오핑은 중국에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이나야마 회장은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을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덩사오핑은 이에 '그럼 박태준을 수입하면 될 것’이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농반진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이지만 향후 포스코의 중국진출 당시 유익한 자산으로 활용되었다.
포항제철이 승승장구하자, 1981년 일본 철강업계는 스스로 포항제철이라는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부메랑 이론’으로 포항제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당시 포항제철은 포항제철소 4기를 완공하고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부메랑 이론에 따라, 일본 철강업계는 포항제철에 대한 지원중단을 결의했다. 이에 박태준은 '선진국이 먼저가고, 그 뒤를 중진국이 가고, 후진국은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순환론’으로 일본 철강업계를 설득하였고, 이러한 노력이 유효하여 일본 철강업계는 포항제철에 대한 지원중단을 거두어들인다.
박태준은 중국의 철강업계 태동기에, 자신의 약속인 순환론을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이 제철소 건설에 나서자 포스코는 중국철강업계에 업무 매뉴얼까지 제공하면서 도왔다. 이를 우려하는 직원들에게 그는 '대세는 피할 수 없으며 선진기술로 앞서나가는 수밖에 없다’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출 것을 강조하였다. 포스코가 개발한 세계최초의 파이넥스 공법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4. Before & After, POSCO
제철산업은 제품의 수요자들이 '또 다른 거대한 공장’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개별 소비자 입장에서 포스코 이전과 이후를 명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공부하고 일하는 건물, 타고 있는 차, 먹고 쉬고 노는 모든 곳에 포스코의 제품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포스코로 인해 적어도 우리 국민들의 삶이 더욱 안전하고 윤택해졌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반면, 산업과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포스코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뚜렷이 구분된다. 포스코 이전에는 종합제철회사는커녕, 철강생산이라고 할만한 변변한 공장도 없었다. 즉 우리나라는 포스코 이후에야 철을 자체 생산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종합제철회사의 건설은 전후 복구과정에서 급격히 수요가 증가한 철의 공급을 위함이지만, 수요가 충분하다고 하여 제철산업 자체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철강생산은 그 자체로도 높은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이지만, 전후방 연계효과가 매우 뚜렷한 기간산업이다. 첨단 전자, IT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생산여부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제조업 특히 중화학 공업의 발전은 철강산업의 선도적 발전이 필수적이다. 철 생산의 경쟁력이 건설, 기계, 자동차 등 산업생산의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산업발전 계획을 세운 것도, 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포항제철과 같은 철강산업을 키운 것도 당시의 상황이나 경제력을 비추어 보면 상당히 무모해 보이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이후 우리나라는 중화학 공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했고 이때의 뿌린 노력의 결실이 현재의 전자와 자동차, 화학, 중공업의 성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성공의 바탕에는 다양한 요인이 내재해 있겠지만, 포스코의 성공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포스코는 '식구 많은 가난한 집안의 맏형’이었던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근대 경제사에서, 포스코의 성공은 단순히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가난한 나라, 그래서 공공연히 업신여김을 받던 나라가, 각고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둔 모범 사례가 되었다. 철강산업의 전문가는 물론, 자국 국민들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던 대업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경제개발에 대한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스코는 우리 경제발전에 뼈대를 세운 그야말로 큰 기업이라 할 수 있다.
5. 마치며
포스코는 혜안을 지닌 몇몇의 천재로 일군 기업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책임과 소명의식을 가진 기업인이 없었더라면 포스코의 성장역사 또한 오늘처럼 빛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우리경제가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해있는 것처럼, 포스코의 앞날 역시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과거 1세대 포스코의 주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향후 닥쳐올 어려움도 '장남의 책임감’으로 꿋꿋이 극복해 나가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신중선, 강철왕 박태준, 문이당(2013)
이대환, 박태준의 삶과 정신
_____,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 박정희와 박태준, 아시아(2015)
위키백과, 포스코
김 상 겸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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