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 만리(牛步 萬里), 119년 두산을 일으킨 기업가 박승직

박종운 / 2015-02-05 / 조회: 1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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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B 맥주, 프로야구 원년 우승, 대학교 혁신, 대한민국 기업 최장수 기록 갱신의 두산

 

2015년 올해로 34년을 맞아 날로 인기를 끌고 있는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원년(1982년) 우승팀은 어디일까?

 

그 팀은 바로 OB Bears다. 그 해 OB Bears는 박철순 투수가 24승4패7세이브와 전무후무한 22연승을 세우며 우승했다. 지금은 두산그룹의 주력 기업이 OB맥주에서 두산중공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팀 이름이 두산베어스로 바뀌었는데, 두산그룹이 프로야구 출범 첫해부터 팀을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업 초창기에 이미 인화를 위해 야구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최근 과감하게 학과별 통폐합을 이루고, 갈라파고스적인 교육이 아니라 사회에서 시장이 요구하는 교육에 다가가려고 시도함으로써, 학교평가가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앙대학교는 어디에서 운영하고 있을까? 그것도 두산그룹이다. 그 변화는 두산그룹의 재단 참여와 시장지향적 혁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룹 회장임에도 트위터로 보통 사람들과 격의없이 어울림으로써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그것도 두산 그룹의 박용만 회장이다. 그는 한때 할아버지가 보부상으로서 걷던 길을 직접 걷는 배땅(배오개에서 땅끝마을까지) 프로젝트에 나서기도 했다. 2004년 11월부터 2006년 7월까지 토요일마다 20-30km 씩 걸어서 배오개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걸었다. 이 프로젝트로 할아버지의 고생을 되새기며 두산의 창업정신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럼 그룹회장으로 하여금 창업정신을 되살리고자 땅끝마을까지 강행군을 하고 싶게 만들었던 그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그가 바로 이번에 살펴보고자 하는 두산의 원 창업주 박승직이다.

 

한 가지 더 흥미있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1등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어디일까? 하는 논란이 일었었다. 두산그룹과 조흥은행이 치열하게 다투며 자신이 대한민국 최고 오래된 기업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기네스협회가 나서 면밀하게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약간은 애매하게 개인부문과 법인부문으로 나누어서 둘 다 최고 오래된 기업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어쨌든 공인 연도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바로 1896년에 세워진 두산그룹이다. 두산은 1896년 8월 1일 세워진 '박승직 상점’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897년 세워진 조흥은행보다도 1년 먼저였다(조흥은행은 현재는 신한은행으로 합병되었다). 물론 나라 밖에는 이보다 오래된 기업도 있다. 세계 최장수 회사는 일본의 금강조(金剛組, 곤고 구미)라는 회사인데, 그것도 백제인 유중광이 578년에 세웠다고 한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단연 두산이다.

 

놀라운 것은 두산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보부상에서 시작했지만, 점포를 가진 상인으로, 그리고 제조판매도 하는 상공인으로, 나아가 3대에 걸쳐 소비재 생산에서 생산재 생산까지 아우르며 지금 재계 순위 10위권으로 도약을 한 기업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기업들이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다가, 아들 손자 대에는 그만 사랑에 자만하다 소비자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곧 사라져 갔는데, 두산은 어떻게 100년 이상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크게 발전하기까지 했을까. 무슨 비결이 있어 두산이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커나갔을까? 그런 점에서 두산그룹의 원 창업자인 박승직의 기업가정(entrepreneurial mind) 및 두산의 기업문화를 배워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2. 소비자에 대한 봉사의 한 길 - 자급자족이 아닌, 소비자에 대한 봉사가 부(富)의 길이다

 

박승직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86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박승직이 12세 되던 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국이 이루어졌다. 그는 시골에서 천자문 4서5경 등 전통 유학을 공부하는 서당공부가 학업의 전부였기에 나라를 휘감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선각자들은 격랑에 휩싸인 조국의 운명을 건지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었지만, 박승직은 아직 전통적 유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란 조선의 백성이었다.

 

그렇지만 박승직은 전통적 사농공상의 세계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골의 좁은 세계에 갇혀서 자급자족에 안주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는 시장봉사의 길이 더 낫다는 아래로부터의 자각을 스스로 이룬 것 같다. 박승직이 농사보다는 장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계기는 어린 시절에 화전을 일구면서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박승직은 화전을 일구고 있었는데 괭이에 튕긴 돌이 정강이를 때렸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농사꾼의 운명에 대한 설움이 더 북받쳤다.

“언제까지 이렇게 희망 없는 농사만 지으면서 살아야 하나. 장사를 해보자. 젊은 몸 농사만한 힘만 들인다면 무엇인들 못 이루랴.”


이러한 결심을 한 박승직이 상업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된 일화가 있다. 박승직은 광주 고향 인근의 송파장에서 만난 김만봉의 소개로, 어느 날 가출하여 서울 배오개(梨峴)에 있는 한 가게로 일하러 갔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호롱불 밝히는 등잔용 석유를 파는 일을 맡아 75냥 어치를 가지고 나갔다. 망우리 고개 너머에 있는 한 마을에 갔을 때, 차마 입이 안떨어져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팔러 왔냐고 했다. 그래서 석유라고 하니, 너도 나도 사갔고, 115냥을 벌어 40냥을 남겼다. 아, 사람들이 석유를 이렇게 많이 필요로 하는구나 하면서 그는 다시 석유를 가지러 배오개를 향해 망우리 고개를 넘었다. 그런데 그때 망우리 고개에서 발병이 난 피물장수가 그를 불렀다. 자신이 발병이 나서 도저히 피물을 지고 가지 못하겠으니, 300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120냥에 넘겨주겠다고 했다. 마침 115냥 밖에 없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가격에 흥정이 되었다. 박승직은 그 피물을 배오개장으로 가지고 와서 500냥에 팔았다고 한다. 두 번의 거래로 하루 사이에 무려 425냥을 번 것이다. 그러나 곧 가출한 아들을 찾아 뒤쫒아온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비록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소비자에게 상업적 봉사를 했던 보람이 이후 박승직의 기업가적 삶을 규정하였다.


박승직이 이때의 경험을 되새기건대,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며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상업을 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보람도 있다고 보게 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공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안 것이다.

 

당시 서당 교육으로는 천자문 정도였고, 사농공상의 질서를 강요하던 시대여서, 상업은 천시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업 원리, 부기 기법 등을 가르치는 곳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승직의 총명함을 들었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소작을 부치고 있던 땅의 지주인 민영완(閔泳完)이, 민비가 고종의 왕비가 된 후 여주 인근 여주 이천 광주의 민씨 세족의 일원으로서의 세도정치 덕에 갑자기 시골 한량에서 일약 전라도 해남 군수로 가는 일이 생겼을 때, 수발을 들 수행비서로 그를 지명하였다.

 

그래서 박승직은 1881년 17세에 해남에 따라가서 3년을 지냈다. 그러나 박승직은 해남에 가서도 비서 활동을 한 수당을 쪼개어 돈을 벌었고 (제주산 말총 갓을 사고 팔아 돈을 벌었다고 한다) 고향에 여분의 돈 300냥을 만들어 보냈다.
 

큰형 박승완이 면직물 포목 장사를 시작한 것은 박승직이 보낸 그 돈을 재원으로 한 것이다. 박승직이 1936년 일제 조선총독부에 도량형기 위탁판매 허가신청서를 낼 때, 자필로 '명치 15년(1882)에 경성부 종로 4정목 15번지에서 면포상을 개업’했다고 쓴 것으로 보아, 형이 했던 사업은 박승직의 동의와 위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큰형 박승완이 포목점으로 이익을 보아 박승직이 고향에 돌아온 지 2년만에 300냥을 돌려줌으로써, 박승직은 드디어 1885년부터 이 돈을 밑천으로 큰 형이 하고 있는 포목 장사에 나서게 되었다. 박승직은 각지에서 포목을 수집하는 일에 나섰고, 1889년에는 둘째형 박승기와 함께 본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박승직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세계가 아닌 상공농사(商工農士)의 새로운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승직은 서울을 근거지로 하여 짐을 직접 등에 지고 혹은 말을 사서 말에 짐을 지워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면포 등 가내수공업제품을 수집하고, 수집한 면포 등은 객주나 여각이라는 도매상에게 판매하였고, 또한 수집하러 갈 때 생활용품을 가지고 가서 마을마다 물건을 팔기도 하였다. 박승직의 보부상 생활은 근검절약의 표본이었고, 감자를 먹으면서 다닌 고행의 상업활동이었다. 이렇게 발품을 파는 것으로부터 장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아래로부터 몸소 자신만의 시대를 만들어 나갔던 주역의 하나였다.

 

박승직의 이러한 출발은 롯데 신격호 회장이 우유배달로부터 사업을 시작하고, 대우 김우중 회장이 신문배달로부터 시작한 것과 비견된다. 최초 무자본, '맨발의 청춘’에서 출발한 이들 기업가들의 공통 특징은 우직함과 근면성실, 그리고 절약 속에 시장봉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3. 포용적 제도의 효과 - 보부상에서 간판을 단 상점주로의 변신

 

박승직은 근면검소하게 감자를 먹어가면서 13년(1884-1896) 보부상 생활을 함으로써 부를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간판을 단 상점주로 변신하였는데, 이는 때마침 경제제도가 포용적으로 바뀐 덕을 본 것이다.
 

갑신정변 이래 선각자들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갑오경장으로 국가가 특권을 부여했던 독점상인인 시전의 특권이 폐지되고 나자, 그는 1896년 8월 종로4가에 박승직 상점 간판을 내걸 수 있었던 바, 박승직이 간판이 없는 난전(亂廛)에서 간판을 내건 상점(商店)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시전특권폐지라는 제도가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정조 때인 1791년 사상(私商)인 난전을 금하는 특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 폐지를 발령하는 신해통공이라는 부분적 개혁이 있었지만, 이는 새로이 성장한 도매상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봉건적 특권을 얻음으로써 7의전, 8의전, 14개 시전 등으로 마구 늘어나 임의로 금난전권을 자행했던 것들을 원래대로 축소한 것일 뿐이었다. 기존 육의전(六矣廛)이라는 시전의 봉건적 특권을 제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육의전의 봉건적 상인 특권인 금난전권의 실질적이고 전면적인 폐지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이루어졌다. 종로1, 2가 부근이 시전의 중심지였다면, 그 옆에 있던 종로4가는 난전인 사상도고의 중심지였는데, 특히 박승직이 취급했던 면직물 포목은 육의전의 주요 취급품목이었기 때문에, 그 전 같으면 탄압을 받았을 직종이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처럼 박승직이 종로4가에서 상점 간판도 없는 난전의 수준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간판을 내걸고 상업다운 상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포용적 경제제도의 실시라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상업의 적들: 화폐 불안정 및 화폐개혁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박승직은 백동화 인플레이션과 화폐정리사업으로 어려움도 겪게 된다.

 

1894년 갑오경장 때 대한제국은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발표하여 은본위제를 실시하였는 바, 본위화폐로는 5냥 은화를, 보조화폐로는 1냥 은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2전 5푼 백동화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환국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면허세를 내면 백동화를 주조할 수 있었던 것이 함정이었다. 백동화의 주조이익(seigniorage)이 많았기 때문이다.

 

1901년 7월 이전에는 쌀 한 되 가격이 1냥 내외이던 것이 1901년 말에는 7냥 수준으로 7배가량 올랐으며, 일본 지폐와의 교환비율도 1899년 100 대 100에서 1903년 말 100 대 220에 이를 정도로 가치가 하락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로 상거래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국민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상업에서 화폐가치의 하락은 엄청난 악재다. 실물로의 도피현상 때문에 건전화폐를 바탕으로 해서 상업을 영위해야 하는 상인들은 화폐가치 안정을 강력히 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8년 독립협회는 백동화의 유통을 중단하라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했고, 각국 공사들도 그런 요구를 해서, 1902년 이후에는 주조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승직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나, 그동안 쌓아온 신용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이러한 혼란이 있던 와중에, 러일전쟁(1904.2-1905.9)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제국은 1904년 8월 대한제국과 협정(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재정과 외교에 대한 모든 업무를 일본인 고문에게 일임하도록 한다. 이때 재정고문이 된 대장성 주세국장 출신의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주도로 화폐정리사업을 하였다. 메가다는 대한제국의 화폐유통문란의 핵심이 백동화 남발에 있다고 진단하고, 1905년 1월 '화폐조례’를 발표하여 기존의 은본위제를 일본과 똑같은 금본위제로 전환하는 한편, 발권력을 일본제일은행으로 일원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1905년 7월부로 화폐교환소를 설치하여 백동화를 신화폐로 교환하도록 했다.
 

이로써 화폐남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으나, 화폐발행권을 넘겨주는 주권 상실의 아픔과 함께, 대한제국 국민들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신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백동화의 품질을 평가하여 갑을병 세 단계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일본인은 갑으로 대한제국 국민들은 대체로 을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말의 거상들 중 많은 상인들은 1905년 7월에 실시된 구한국정부의 백동화를 일본화폐인 원(圓)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에 의해 도산하거나 폐업”하였는데,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유동성 결핍, 어음시장 혼란, 신화 발행 지체 등 여러 부작용이 뒤따라” 그렇게 되었다.

 

 

5. 상업과 규모의 경제: 상업도 이제는 주식회사 법인으로 만들어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한다.

 

박승직은 면포를 다루는 상업을 하면서 일본인들의 진출을 실감했다. 일본인들은 1894년 청일전쟁이후에 많이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1903년 대한제국 거주 일본인들은 3만명이었으나, 1905년에 5만 명, 1906년에는 8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상인들이 있던 종로 일대를 파고들려고 했다.

 

그래서 박승직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개인 회사 형식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던 대한제국의 상인들을 규합하였다. 현대적 주식회사 제도를 본따서 1905년 마침내 자본금 7만8천 원(圓)의 광장(廣藏)주식회사를 만들었다. 대표이사 사장에는 교육자 출신의 김한규가 취임했고, 이사에는 박승직 상점의 박승직을 비롯하여 최인성과 해동저와 동양목을 판매하는 남대문의 포목상 장두현, 직물과 면사를 수입하여 종로에서 포목상을 하는 김태희 등이 취임하였다. 광장주식회사의 광장시장은 구성원들의 면면에서 보듯이 직물 도소매를 위주로 한 시장이었다. 이처럼 박승직은 주식회사를 만들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함으로써 직물을 구하고자 하는 대한제국 국민들이라면 쉽게 광장시장에 찾아올 수 있게 하였다.
 

박승직은 수공업 시대에 보부상을 하면서 면포를 수집해서 객주 여각에 공급했었으나 이제 우수한 일본 제품들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중에 소화기린 맥주의 소액주주로 함께 참여하게 되는) 김연수 등은 1919년 경성방직을 세웠지만, 박승직은 제조업에 직접 뛰어들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상업에 주력하다 보니 변화된 환경 속에서 수입업체를 세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창신사(彰信社)를 세워 후지가스방적회사의 제품을 수입하였으나, 수입 면직물의 질이 낮아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907년에 일본인 니시하라(西原龜三) 및 최인성과 함께 자본금 2만9천원으로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세워 면직물의 수입판매에 나섰다(1910년에 일본 이토추상사(伊藤忠商社)의 가세로 자본금을 46,600엔으로 늘렸고, 1914년에 자본금 50만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1921년에는 자본금이 100만엔으로 되었다).

 

박승직은 곧 이어 1925년에 개인 상점이었던 박승직 상점도 주식회사 체제로 만들었다. 이때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은 자본금 6만엔(1,200주)로 시작했는데, 그중 공익사 부채 4만5천원이 전액 투자자금으로 주식화되었다. 박승직상점이나 공익사의 사장 모두 박승직이었지만, 공익사 전무가 다카이헤이미치로(高井兵三郞)이었는데, 공익사에서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에 감독사원도 파견하기로 한 것으로 보아, 주식회사로의 변환은 구제금융(bail-out)의 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승직상점의 어려움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초반 불황으로 인한 것이지만, 박승직의 신용이 있었기 때문에 이토추상사도 공익사를 통해서 지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 자본금을 18만엔으로 늘리면서 박승직일가의 지분이 67%로 늘어나는데, 이는 1930년대의 호황 때문이었으며, 이로써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은 사실상의 구제금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다카이헤이미치로(高井兵三郞)는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이 되살아나자 1939년에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1936년에는 아들 박두병을 영입하여 경영을 물려주었는데, 경성고상을 나오고 조선은행에서 4년간 근무했던 박두병은 출근부를 도입하고 상여금을 차등지급하는 등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을 현대화하였다. 내외적 요인의 결과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은 1938년 매출이익 10만원을 돌파하여 1939년 23만 엔까지 올라갔다.
 

6. 상인과 단결: 반시장적 조치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상인들도 뭉쳐야 한다. - 상업회의소

 

박승직은 화폐정리사업 등에서 대한제국 상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자 상인단체를 결성하는데 앞장섰다. 심각한 자금난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상무사와 서울의 상인들을 통합하여 1905년에 경성상업회의소를 만들었다. 의장에 김기영(金基永), 부의장에 이군필(李君弼) 등 임원 21명으로 이루어졌는데, 박승직은 여기서 상임 의원을 맡아 포목상들의 권익을 대변하였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09년에 국내 최초의 상업 전문지인 《상공월보(商工月報)》를 발행하여 물화(物貨)의 생산·가격 등 상거래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 상공월보 중 1911년 1월에 발행된 제15호는 일제 총독부에 의해 치안방해 명목으로 압수되기도 하였고, 1915년 일제 총독부의 조선상업회의소령에 따라 대한제국인들로 이루어진 '경성상업회의소’도 끝끝내 해산되어 '경성일본인상업회의소’에 합병되어 명칭만 같은 새 '경성상업회의소’가 만들어졌다.
 

경성상업회의소는 일제 패망 후 일본인들을 뺀 채로 재건되었고, 1948년 독립 건국 후에는 서울상공회의소와 대한상공회의소로 바뀌는데, 박승직의 상공회의소 사랑을 반영하여 아들인 박두병, 손자인 박용곤, 박용성, 박용만 등도 상공회의소에 애착을 가지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보게 된다. 1951년에는 (1919년 창립된) 국제상업회의소에도 가입하게 된다.


 

7. 상업과 신분해방 – 명월관에서 백정들을 교육하고, 여성들을 사업파트너로 삼다.

 

박승직은 우피(牛皮) 장사를 하면서 전국의 도축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소를 도살하면서 우피를 최초에 만들어내는 사람이 백정이라고 불리는 도축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신상회(相信商會)를 세워 소가죽을 취급하고 있었던 박승직은 소가죽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축인들을 교육시키기로 했는데, 도축인들을 우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제국 최고의 음식점인 명월관으로 불렀다.

 

당시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의 장(典膳司 長)으로 있으면서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1909년 차린 20세기 최초의 조선 요리집으로서 그 해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어전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기녀들을 채용하여 영업이 번창하였던 곳이다. 신분제는 물론 1894년 갑오경장으로 없어졌지만 아직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가축을 도축하는 사람들은 아주 천대받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박승직은 궁중 기녀 출신들이 있는 최고의 요리집인 명월관으로 불렀던 것이다.


박승직은 명월관에서 그들에게 우피가 값이 나가도록 가공을 할 수 있는 요령을 강습하기도 하고, 공연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백정들을 부르는데 대한 안순환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안순환을 설득하여 박승직이 이런 초대형 이벤트를 성사시킨 것에서, 한편으로는 박승직의 신분차별 철폐 의지를 읽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상업적 필요야말로 우리 의식 속에서도 신분해방을 실질적으로 이뤄나가는 유효한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박승직은 또한 박가분제조본포를 하면서 여성들을 채용하고, 또 박두병으로 하여금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을 경영하게 하면서 여성들을 5명이나 채용하였다. 그리고 1945년 일제패망 후, 그리고 미군정기에는 부인 정정숙과 며느리 명계춘으로 하여금 운수회사(두산상회, 1946)를 차리게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들에 대해서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박승직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일찍 벗어던졌던 것으로 보인다.


 

8. 상인과 정치환경: 상인이 할 수 있는 충군애국, 그리고 망국적 상황 속에서의 굴곡들

 

박승직은 어떻게 개화기의 신문물을 접했을까? 그는 종로5가에 있는 연동교회를 다니면서, 또 거기에 연설하러 온 이상재의 이야기를 통해 신문물을 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삶의 족적상 보부상으로서 보부상조직인 황국협회에 속해있었다. 보부상조직은 기본적으로 개화와 함께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데 적대적이었다. 대표적으로 1899년 9월 경인선의 개통과 1905년 1월 경부선의 개통으로 예전과 같은 보부상으로는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활용하여 지역 거점 상업이 더욱 활발해지는 반면, 보부상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개화파 활동을 하는 독립협회와도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황국협회는 1898년 만민공동회 해산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박승직은 보부상 출신으로서 황국협회의 일원이긴 했지만 연동교회를 다녔고, 인천(제물포)에서 상품을 떼어다가 팔기도 하는 등 신문물의 우수성에 접하고 나름 개화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민공동회 해산 시에는 어떤 역할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승직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에 동참하였다. 1907년 2월 서상돈이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면서 당시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원의 차관 누적액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4월 8일에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설치, 한규설(韓圭卨) ·양기탁(梁起鐸)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4월말 까지 보상 의연금을 낸 사람은 4만 여명이고, 5월까지 걷힌 돈은 230만원 이상이었다.

 

그러나 송병준이 지휘하는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의 탄압(양기탁을 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시킴)으로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박승직은 경성상업회의소 활동을 하면서 이 때 대구 광문사에 70원을 기탁하였다고 한다.

 

1910년 망국 이후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있던 고종이 1919년에 사망하였다. 박승직은 즉시 상민봉도단(商民奉悼團)을 결성하여 그 단장을 맡았다. 봉도단에는 왕가봉도단, 상민봉도단, 각 정동총대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상민봉도단은 약 10만원의 돈을 걷어 상여를 매는 담배군(擔陪軍)과 상여를 인도하는 인군(引軍) 1025명의 비용을 댔다. 그리고 일제 경찰의 개점 종용에도 불구하고 4월 중순까지 상점의 문을 닫아걸고 철시(撤市)를 하였다. 우국지사들은 고종의 장례식 날을 기화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는데, 상인들도 철시로 호응한 것이다. 그러나 민생을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의 제공을 위해서, 상점 문을 다시 열 수밖에 없었다.

 

박승직은 1926년 순종이 사망했을 때에도 상민봉도단을 결성하여 역시 그 단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연거푸 상민봉도단장을 역임했던 것은 박승직이 일제 치하 민족계 상인들의 대표자였으며, 상인들이 자신의 애국심을 표현할 계기가 드물긴 하지만 그런 계기가 있었을 때 박승직이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입증한다.

 

북한을 추종하는 좌파인 민족사회주의자들은 박승직이 일본 제품을 들여와 판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인들과 회사를 함께 하고, 상업회의소도 함께 한 것에 대해서 '매판자본(買辦資本)’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국내의 산업기반을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자 시각에서 이 비판을 살펴보면, 소비자들이 우수한 제품을 찾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을 위해 봉사한 것이지, 국내의 우수한 제품이 있었음에도 상인들이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은 것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 1919년 경성방직을 창업한 김연수도 제품을 생산했을 때 그 제품을 외면한 같은 동포들에 대해서 야속한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원인이 품질 차이에 있다는 것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경성방직이 제품의 질을 높이면서, 민족 기업 제품이란 점을 함께 홍보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같은 민족 소비자들에게도 먹혀들어갔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품질이 같아졌을 때서야 비로소 민족기업의 제품이 선택되었다는 점을 외면해선 안된다. 박승직도 그제서야 비로소 경성방직의 제품들을 적극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부(富) 위에서 세력화가 이루어지고 수탈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형성된다는 민주 독립의 역사 법칙을 감안하면, 그래도 같은 일도 일본인이 하는 것보다는 말이 통하는 대한제국 출신이 하는 게 더 낫다고 봐야 한다. 매판자본론이라는 박현채 류의 자급자족경제 시야에 머물러 있는 한, 대한민국 건국 후 글로벌한 차원에서 소비자를 찾아 가공무역을 통해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도 나아갈 수 없고, 그 원리도 이해할 수 없다.

 

박승직은 또한 일제의 창씨개명요구에 어쩔 수 없이 1941년 박(朴)을 미키(三木)로 창씨개명을 하고, 박승직 상점의 도매부를 미키상사(三木商社)로 바꾸었다.

 

그러나 소비자를 직접 대하는 소매부는 여전히 박승직상점의 명칭을 고수하는 등 소극적이나마 저항을 하였다. 박승직은 일제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인, 1945년 8월 13일부터 박승직 상점의 제품을 모두 처분하고 영업활동을 중지하였다. 일제가 중일전쟁으로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을 날로 확대하면서 학도병과 정신대를 동원하는 데다가, 각각의 집마다 돌아다니며 고철까지 징발해가는 총동원체제 하에서는 더 이상 상업이 불가능했기에 그랬던 것으로 판단된다. 8월 15일 일본왕의 항복선언은 민족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박승직상점에게도 예견할 수 없게 갑자기 다가온 것이었다.

 

박승직은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 건국은 아들 박두병에게 새로운 출발이었다. 박두병은 일제 패망 후 미군정 시기에 1945년 10월부터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을 맡았는데,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전인 1948년 2월에 소화기린맥주의 상호를 동양맥주로 변경하였다. 회사 운영 실무뿐만 아니라, 이제 대외적 명칭에서까지 독립을 이룬 것이다.


 

9. 상업에서 상공업으로, 운수업으로 – 박가분의 제조판매, 그리고 두산상회

 

박승직은 1905년에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부인과 일찍 사별한 뒤, 한 동안 홀로 지내다가 41세에 이르러 19세의 정정숙과 결혼을 한 것이다. 이 세 번째 부인과는 해로하였는데, 두산그룹의 후계자인 박두병이 1910년에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가분은 1915년 부인 정정숙이 아들 박두병과 함께 먼 친척뻘 되는 할머니에게 놀러가서 분을 만드는 기술을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당시까지의 화장품이었던 백분은 “쌀가루, 분꽃씨, 서속(기장과 조)가루, 조개껍질을 태운 분말과 흰 돌가루, 칡을 말린 가루 등을 절구나 맷돌에 갈아 분말을 만들고 체에 쳐서 만든” 것이다. “납을 끓여서 생기는 서리 모양의 가루를 긁어서 분과 섞자 착색율이 더욱 좋아졌다.” 정정숙은 이것을 본인도 바르고, 일하는 여자들에게도 나누어주고 호평이 일자 면포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이 분이 예상 외로 인기를 끌자 박승직은 정정숙에게 돈을 대주고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하였다. 박승직이 사장이 되어 박가분제조본포를 만들고, 아녀자들 10여명을 고용해서 분을 만들었다. 1918년에는 특허도 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박가분 광고를 내기도 하였고, 광고에서 경성 생산품 품평회 심사위원장상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박가분의 판매는 박승직의 상업을 더욱 번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박가분은 납성분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제조 판매를 중단하였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화장품 개발을 하면서 변신을 해보려고 하였지만, 일본 화장품과 경쟁력이 없어서 화장품 제조판매 사업은 접게 되었다.

 

박승직은 박승직상점을 접은 후, 일제 패망이 이루어지자 이미 모든 재고를 다 처분하고 영업활동을 중단한 포목판매업은 더 이상 유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두산상회라는 이름으로 운수업으로 뛰어들게 된다. 본인이 이미 80대 고령이었기에 사업 자체는 20살 연하의 부인 정정숙이 며느리 명계춘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였다.  


 

10. 요약: 배오개의 거상 박승직의 상업입신의 비결 - 근자성공(勤者成功)

 

박승직의 일생 그리고 박두병과 두산그룹을 보면 기업가정신이라는 한 알의 씨앗이 묵묵히 커나간 끝에 어느새 거대기업집단이라는 큰 나무로 성장해나간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박승직은 등잔용 석유의 공급이라는 단순한 교환행위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나는 말총을 이용한 갓을 한양에 공급하는 일도 했다. 나중에 보부상으로 본격적으로 나섰을 때는 사람들이 옷이나 이불 등에 쓰느라 많이 필요로 하는 면포를 수집하여 객주나 여각에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동시에 면포를 수집하러 가는 길에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주는 일을 13년간 하였다. 소비자와 상인 상호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일에서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스스로도 그 이익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박승직은 상업의 묘미를 알아냈다.

 

일정 정도 자본이 모이자 박승직은 종로4가에 면포를 파는 상점인 '박승직상점’을 내게 된다. 환포상, 보부상에서 드디어 도소매상으로 입신을 이룬 것이다.

 

박승직은 이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과 함께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는데, 광장주식회사는 최초의 민간 현대 시장인 광장시장을 개설한다.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최고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공익사를 만들어서 전문수출입업에 뛰어든다. 또한 공익사에서는 모시가 우수한 한산지역에 계약 및 생산개선을 실시하는 등 주문생산제(선대제(先貸制))도 실시하여 저포개량도 이뤄낸다. 나아가 자신의 상점도 개인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탈바꿈시켜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만들었다. 

 

박승직은 상업 뿐만 아니라 제조 판매도 하였다. 부인이 만든 분(紛)을 면포 판매시 사은품으로 주다가 그것이 호평을 받자, 상표를 박가분이라 붙이고, 박가분제조본포의 사장으로서 그것을 판매하는 길로 나섰다.

 

이러한 박승직의 보부상 13년, 도소매상 50년에 걸친 상업입신(商業立身) 과정은 그 아들에게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아들 박두병을 경기고상으로 보낸 뒤, 조선은행에서 일을 하게 하다가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을 물려주었다. 또한 박승직 자신이 김연수와 함께 (총 6만주 중) 각 200주 씩을 가진 소화기린맥주의 형식상의 소액 주주로 있었지만, 일제 패망 후 소화기린맥주의 자치위원회가 찾아왔을 때 본인은 나이가 많아 고사하고, 아들 박두병으로 하여금 전문경영인으로서 경영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박두병의 동양맥주(OB, Oriental Brewary)의 판매망은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의 판매망을 활용하도록 하였다. 전문경영인 박두병은 박승직에게서 배운 인화(人和)의 정신을 살려 노사분쟁의 소지를 없애나갔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폐허가 된 동양맥주의 불하공고가 나자, 박두병은 자신이 해봤기에 잘 할 수 있는 동양맥주를 인수할 결심을 하고, 김연수의 동의를 얻어 그것을 34억 1366만원에 낙찰받아 재건하는데 성공한다.

 

박승직은 아들이 동양맥주를 직접 인수하여 키워나가는 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전쟁통인 1950년 12월 20일 86세로 사망하였다. 박승직은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 “내가 죽거든 여러 날 두지 말고 그 이튿날로 장사를 지내거라”는 뜻을 밝혀왔었기에, 박두병 형제들은 다음날인 12월 21일 장례식을 조용히 치렀다. 이후 아들 박두병은 박승직의 기업가 정신을 물려받아 OB 맥주를 발판으로 오늘의 두산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키워나가게 된다.

 

이상과 같은 상업입신 과정에 비추어 박승직의 기업가유형(type of entrepreneurship)을 전체적으로 구분해보면, 현대 삼성 등과 대비되는 박승직만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정주영이 일단 부딪쳐봐서 안될 것이라도 되게 만드는 천재적 돌파형이라면, 삼성 이병철은 미리 완벽한 준비로 손댄 것은 꼭 이루고 마는 철저한 준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박승직이나 아들 박두병은 '기발하지는 않지만’ 맡은 바 일을 우직하게 신용을 지키며 잘 해내는 근면성실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박승직이 1929년 자녀들에게 근자성공(勤者成功)이라는 글로 교육하고 반시장적 제도에 맞서 상업회의소등을 조직한 것을 보면 그의 기업가유형이 개인주의적 풀뿌리민주주의적이었고, 자생적이고 상향식이라는 점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수출입국 시기 이병철 등이 자신의 시장봉사를 국가목표와 결부시켜 산업보국(産業報國)이라 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11. 두산그룹 우보만리(牛步 萬里)의 또 다른 비결 - 인화(人和)

 

1815년 나폴레옹 군대를 워털루에서 물리쳤던 웰링턴 장군은 후에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스쿨의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만큼 학교에서 기본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두산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기본은 박승직 상점에서 이루어졌다. 두산그룹의 창업자 박두병이 업무를 익히고 사업감각을 익혔던 것은 1936년부터 박승직상점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뿐만 아니라 1946년 부인 정정숙과 며느리(아들 박두병의 부인) 명계춘이 운수회사를 만들었을 때, 박승직이 아들 이름을 따서 두산상회라고 작명하고, 한말 두말 쌓아 올려서 산처럼 되라는 뜻풀이까지 덧붙여주었는데, 이를 통해 박승직은 두산그룹의 기본 정신까지 분명히 밝혀주었다.


박승직이 아들 박두병에게 들려준 다음과 같은 우화도 두산이 간직해야 할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옛날에 사돈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돈은 나날이 재산이 불어나고 생활이 윤택해지는데 다른 사돈은 구차한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가난한 사돈이 잘 사는 사돈을 찾아와서 부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허허, 부자 되는 비결이 따로 있겠습니까만 한번 이렇게 해보시지요.”

“무얼 말입니까?

“지금 돌아가시는 길로 식구들에게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올려놓아라 하고 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돈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게 비결이라고 하니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부자 사돈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냐는 식으로 아버지의 말을 무시해버렸고 그 부인조차 망령이 났다면서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낭패한 그는 그길로 부자 사돈을 찾아가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식구들에게 미친 놈 취급만 당했다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허언을 했는지 사돈께서 직접 한번 보시지요.”

부자 사돈은 밖으로 나와 젊잖게 외쳤다.

“내 할 말이 있으니 다들 밖으로 나오너라!”

잠자리에 들었던 그의 아들들이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고 부인도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대청을 내려섰다.

“외양간에 있는 소 중에서 제일 큰 황소를 지붕에 좀 올려놓아야겠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아들들과 부인은 잠시 무어라고 의논을 하더니, 이내 두 동생은 올 밖에 있는 짚가리를 헐어 마당에 날라다 쌓기 시작했고 큰아들은 굵은 서까래 토막들을 가져다가 쌓이는 짚단 사이사이에 끼워 짚단이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머잖아 마당에는 지붕 추녀 높이만큼 비스듬한 경사길이 만들어졌다. 그 위에 멍석을 깔자 부인이 끌고 나온 덩치 큰 황소도 큰 저항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가난한 사돈은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바로 이거였구나! 내가 왜 좀 더 진작부터 이렇게 해오질 못했던가.”


박승직이 아들 박두병에게 이런 일화를 들려준 것은 그만큼 일을 함에 '인화(人和)’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박승직도 형제들과 함께 사업을 했으며, 조카들도 거두어 사업에 동참시켰다. 이것이 두산그룹에서 박승직의 손자 대에 이르러 그룹회장을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으로 이어지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서 하는 형제경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두산그룹사에서는 그룹 이념(자아의 실현, 기업의 성장, 사회에의 봉사)의 상위에 '인화’를 올려놓고 있다.
 

박승직상점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익사의 구제금융을 받고 주식회사체제로 전환하고서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의 경영이 호전되었을 때 공익사의 다카이가 선선히 손을 뗀 것도 사업파트너와의 인화가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런 점은 중화학공업으로 업종변신을 이룬 두산그룹이 2007년 밥캣 인수 직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를 맞아 어려움을 겪었을 때, 산업은행 및 사모펀드들과의 협조 분위기를 만들어 위기를 돌파해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박두병은 주식회사 박승직상점 전무를 맡고나서 운동부(야구부)를 창설하고, 금강산 야유회도 가는 등 직원 단합에 힘썼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을 맡고나서도 임금인상 요구가 있을 때, 맞서 싸우기보다는 인플레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점을 적극 인정하여 미군정 감독관 스튜어드 대위를 설득하여 인기가 있었던 맥주 현물로 노동자들에게 보너스로 지급함으로써(이로 인해 스튜어드 대위는 징계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생활개선과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OB 맥주를 인수한 직후 1953년 노조가 생겼지만, 그 이후에도 노동자들에 대해 함께 하는 사람(collaborator, 협업자)들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노조와 화합해서 회사를 경영해가고 있다.

 

최근 두산그룹의 광고에서도 '사람이 미래다’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있는데, 두산그룹의 기업문화를 상기해보면, 그 말이 우연히 선택된 문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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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운 |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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