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류韓流에서 K-팝까지, 기원과 출발
2014년 현재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한국 대중문화가 국경을 넘어 순환되고 소비되는 현상’을 뜻한다. 초창기에는 폭이 다소 좁아 '한국 TV 드라마 열기’의 용례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대중음악, 영화 등으로 확산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그러나 한류라는 용어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그 의미는 지금과 조금 다르다. 1990년대 한국의 문화관광부에서는 한국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 제작한 샘플러 시디에 '한류’라는 단어를 밖아 넣었다. '팝’이라고 하는 단어의 중국어 번역어가 '유행’이었으니 한류의 원래 의미는 '한국유행가歌’의 줄임말이었던 것이다. 발명發名은 한국에서 했지만 이를 유통시킨 것은 중국 미디어였다. 중국 미디어를 통해 '한류’는 이후 '한국 팝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통용되었다. 다소 모호하게 시작된 한류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1999년 11월의 클론 공연과 2000년에 들어 연달아 개최된 H.O.T와 베이비복스의 베이징 공연이었다. 클론의 공연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50주년 기념행사의 일부였고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연할 권리를 허락한 한국 팝 뮤지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H.O.T는 베이징에서 1만 2천 명의 관객을 모았다. 그런데 왜 하필 중국에서 한류가 폭발한 것일까. 중국은 그때까지 자본주의적 문화 산업이 거의 발전하지 못한 '문화 개도국’이었고 당연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으로서의 음악’과 '상품으로서의 가수’를 처음 접했던 것이다. 이는 문화산업이 나름대로 그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한국 음악이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한류가 처음부터 국내 업체의 진출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입까지 한류는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에이전시는 일종의 '문화 오퍼상’으로 한국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한국의 문화 상품을 작은 규모로 판매했다. 이때의 대표적인 중국 에이전시로는 '우전宇田 소프트’가 있으며 이들은 1998년 H.O.T의 중국판 음반을 시디로 배급했다. 반면 K-팝이라는 신新한류 혹은 한류 2.0을 뜻하는 용어는 1998년 일본에서 H.O.T의 음반이 발매되고 1개월 만에 5만 장을 판매한 무렵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이팝J-pop과 달리 K-팝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일본 음악 산업계에서 한국의 대중음악 전체가 아닌 해외로 수출되는 일부 한국 음악을 지칭한 것이 K-팝이다. 국제적으로만 통용되던 이 단어는 2005년에 들어와서 국내용 단어로 전환된다. 2009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인촌은 한국형 빌보드 차트를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K-팝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수십 년간 사용되어 온 유행가, 가요라는 명칭 대신 산업으로서의 한국 대중음악이 새로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2011년 8월 미국의 빌보드는 '코리아 K-pop 핫 100’차트를 신설한다.
2008년 '재팬 핫 100’에 이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차트였다. 2014년 현재 K-팝은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처럼 단지 지역적인 구분에 따라 명명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성이 있는 시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 K-팝의 출발과 성장의 중심에 이수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2. 약사略史 이수만
6.25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 부산으로 밀려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희재, 아내의 이름은 김경현이었다. 이희재는 강원도 정선에서 한학을 가르쳐온 학식 있는 집안의 자제로 배재학당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서 수학물리과를 다녔다. 전쟁 전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김경현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 이화여전 출신으로 성악으로 입학하여 피아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 전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셋째는 전쟁이 발발한 지 만 2년이 되던 해 태어났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체구가 작았던 이 아이가 나중에 대한민국 음악 산업을 좌지우지하게 될 이수만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섯 식구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입성한다. 이들이 새로 둥지를 튼 곳은 인왕산 자락의 부암동이었다. 이곳에서 이수만은 청운국민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수만은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수만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를 전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로 졸업하고 명문이었던 경복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고 이는 나중에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등으로 이어지고 서울대로 마감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였다. 그가 입학했을 당시 경복고등학교에는 3학년에 '교내 2대 명물’이었던 임성훈과 최병걸이 재학하고 있었다.
클래식을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음악적인 소양이 남달랐던 이수만을 대중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그의 작은 형 이수영이었다. 이수영은 이수만에서 비틀즈를 들려주었고 이수만은 비틀즈를 뿌리로 하여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으로 청취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항공대학에 진학한 이수영은 입학과 동시에 '활주로runway’를 결성하여 음악적인 갈증을 푼다. 송골매 멤버로 알려진 배철수가 이 런웨이의 6기 멤버다. 형이 대학에서 밴드를 결성한 것을 따라하듯 이수만은 경복고등학교에서 '후로그Frog'라는 밴드를 만든다. 아마도 서양 팝의 카피 밴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룹에서 이수만은 팀의 리더을 맡는다. 이는 밴드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인데 밴드의 리더는 일반 멤버들과 달리 밴드의 운영이라는 짐 하나를 더 짊어진 존재다. 그의 리더 역할은 집단과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가 되려는 그의 욕망과 기질을 반영한다. 1969년 클리프 리차드의 내한 공연이 한국 사회를 왈칵 뒤집어 놓는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이수만은 클리프 리차드 현상에서 음악 이외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남성 뮤지션과 여성 팬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과 측정불가의 폭발력이었다. 이수만은 음악과 비즈니스 그리고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장르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회 현상)의 의미를 어설프게나마 더듬어봤을 것이다. 아울러 외국 가수가 한국에서 음악으로 팬들을 열광시키는 일이 그 반대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근거 불충분의 이상한 오기까지.
1971년 이수만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 기계과에 입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수만은 집안의 기대와 음악적인 욕구 사이를 갈등하며 대학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수만의 음악적 여정은 세시봉의 뒤를 이은 명동 청개구리 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수만은 당시 음악적 파트너였던 백순진과 포크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하여 무대에 서기 시작한다. '4월과 5월’의 데뷔 앨범은 DJ 이종환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음반을 내는 데에는 2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1인당 국민 소득이 10만원이 채 되지 못했던 시기라 이들은 그저 음반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당연히 제대로 된 계약서가 있을 리 없었고 판매수익에서는 완벽하게 소외되는 것이 또 그들이었다. 대학생 포크가수들은 아마추어와 상업 가수의 중간쯤에 어정쩡하게 위치하고 있었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기획사와 음반사와 매니저 아닌 매니저였던 이종환 사이에서 관행적으로 '적당히’ 배분되었다. 1974년 이수만은 방송국으로 진출한다. 개그맨 박성원이 진행하던 '비바팝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후속 진행자가 된 것이다. DJ로서의 이수만의 재질이 빛나던 시절이다. 이수만의 입담과 프로그램 진행 능력은 TV로 이어졌다. 19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의 사회를 맡아 이수만은 재치 있는 진행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0년 11월 30일, 이수만에게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BC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는다. 이를 계기로 이수만은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연예계 생활 10년의 결산은 이수만에게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가왔다. 그는 플로리다주 멜버른에 위치한 FIT(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되었다.
공학도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긴 했지만 한번 빠졌던 음악적 자장磁場에서 이수만은 쉽게 탈출하지 못했다. 특히 1981년 8월 1일 뉴욕에 본부를 둔 케이블 TV의 형태로 개국한 MTV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대중음악의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MTV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이수만은 뮤직 비디오 제작이라는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연예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터뷰까지 하고 온 그에게 심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수만은 다시 작곡에 손을 댔다. 24시간 음악의 물결이 출렁이는 MTV는 한 청년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음악적인 소득이 MTV였다면 개인적인 소득은 평생의 동반자 김지혜를 만난 것이다. 디자인을 전공하던 김지혜는 이수만과 아홉 살 차이였지만 문화라는 양식을 공유하던 둘에게 장벽은 없었다. 1984년 이수만과 김지혜는 LA 토랜스 감리교회 목사 앞에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선다. 이수만은 MTV를 즐긴 것이 아니라 '공부’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청자들이 MTV를 보는 가장 큰 이유가 스타의 패션을 보기 위해서라는 설문 조사 결과는 이수만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다. 패션에 이어 가수의 율동을 보기 위해서가 두 번째였고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세 번째였다. 이수만의 사업적인 '촉’은 이 부분에서 예리하게 발동한다. 이미 클리프 리차드 공연에서도 음악 이상의 이면을 곰곰이 따져봤던 혜안이 아니던가. 그는 근시일내에 MTV가 한국에 상륙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집안의 기대는 아직 완전히 이수만의 한쪽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로 받을 수 있는 초임 연봉 3만 달러를 포기했고 국내 대학에서의 강의를 거절했다. 음악으로 발길을 돌린 그는 학교에서 배운 컴퓨터 공학을 음악과 융합한다면 아날로그 방식과는 전혀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이수만은 1985년 6월 귀국한다.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볼 것이 있고 들을 것도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선 보이겠다”는 매우 상징적인 워딩으로 연예계 은퇴를 번복한다. 그의 연예계 복귀는 KBS FM 라디오의 '젊은이의 노래’로 이루어졌고 이후 같은 방송국의 '연예가 중계’의 메인 MC로 대중과 만난다. 음악 작업은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의 기획과 대중들의 취향 사이에는 아직 간극이 있었다.
그가 홍종화, 곽영준과 만든 프로젝트 밴드 CPU는 외면당한다. 유학시절부터 이수만의 오랜 꿈이었던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은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1984년 9월 MTV 음악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마돈나가 장식했다. 2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는 김완선이 데뷔한다. 만 열 일곱의 나이로 김완선은 이문세의 발라드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한다. 볼륨감 있는 몸매와 수준급의 춤 솜씨로 순식간에 가요계의 한 면을 장악한 김완선을 키운 것은 그녀의 이모 한백희였다. 김완선은 인순이에 이은 한백희의 두 번째 작품이었고 한백희는 김완선을 가둬놓다 시피하고 3년이나 모질게 트레이닝 시켰다. 가수를 발굴하여 숙식까지 제공하며 도제식으로 키우는 건 일본 바둑계에서나 쓰던 방식이다. 이수만은 김완선의 데뷔 과정을 주목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향후 그가 추진할 1990년대 아이돌 프로젝트에 대한 밑그림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수만은 평소 친분이 있던 클럽 DJ 최진열을 떠올린다. 이후 SM 최초의 매니저가 될 최진열에게 이수만은 이런 제의를 한다.
“음악에서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던 시대는 끝났어. 나는 전문적인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야. 회사를 하나 차려서 음반 기획과 제작을 모두 하려고 해. 그렇게 만든 노래들을 방송국에 소개하는 일도, 그리고 팬들을 관리하는 일도 지금부터는 체계적으로 분업화해서 처리해야 하거든. 여러 팀의 가수들을 동시에 회사에 두고서 일을 해나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그러자면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해 줄 인력이 필요해.”
최진열은 이수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기 절정의 DJ로서는 부러울 게 없었지만 그에게도 갈증이란 게 있었다. 최진열의 합류는 그를 따르던 청소년 춤꾼들의 합류를 의미했다. 허현석, 이주노, 양현석이 그 이름들이다. 이수만은 그 중 하나인 허현석을 '남자 김완선’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추구하는 지점은 미국의 팝 스타 바비 브라운이었다. 한남동에서 살았던 허현석은 구슬치기나 딱지놀이 같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놀이 대신 랩이나 브레이크 댄스가 익숙한 독특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수만이 그를 낙점했을 때 허현석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이수만은 허현석에게 현진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두 명의 백댄서를 붙인다. 이 둘이 강남 최고의 춤꾼이었던 강원래와 구준엽이다. 1990년 여름, 흑인 음악과 토끼춤을 장착한 현진영과 와와가 TV화면에 등장했다. 현진영의 손에는 마이크가 들려있지 않았다. 마이크는 귀에 걸어 입 앞으로 연결되는 무선 마이크였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현진영은 역동적인 춤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올랐지만 인기 절정의 순간에서 현진영은 대마초 흡연 혐의로 추락한다. 자숙의 시간을 거친 후 현진영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컴백한다. 그러나 또 다시 대마초 흡연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현진영 사건은 이수만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남고 가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본래 기업가 열전이란 인물과 업적이 3 : 7 정도의 비율로 배정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이수만의 경우 그의 행적과 사업적인 성취를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수만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한국 음악 산업의 발전을 살피는 것과 같은 의미다. 현진영의 부침을 겪는 동안 이수만은 두 가지 사업 방향을 확신했다. 하나는 컴퓨터 음악이 언젠가는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과 해외 팝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 한국 음악계의 출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3. 육성肉聲 이수만
1999년 봄, 필자는 이수만과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가졌다. 이때는 이수만이 H.O.T로 베이징 차트 6위라는 당시로서는 성공적인 안착을 달성한 시기다. 15년이나 흐른 지금 당시의 인터뷰는 일부 낡아 보이고 일부 빗나갔다. 그래서 흥미롭다. 기억을 되살리자면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한 사업가였다. 음악이 좋아 사업을 시작한 것인지 사업을 하다 보니 음악이라는 아이템이 우연히 걸린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중음악은 대중의 욕구와 시대 변화에 민감하다. 사회, 문화 제반의 빠른 변화에 유연한 사고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획자는 문화의 최전방에 선 Leading Edge다. 기획자는 대중의 문화 선택의 준거 집단을 제시함으로서 문화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기획사 사장 1인 체제였지만 이제는 전문적인 인력들이 기획, 재정, 경영, 프로듀싱 등의 분화된 파트에서 일한다. 구조적 분담이 이루어진 가장 큰 이유는 예전보다 음반 시장의 규모가 커졌고 해외 시장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서 옮기는 것이 민망할 정도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직도 1인 보스가 회사를 내키는 대로 '감’에 의존해서 운영하던 시절이다. 낡았으되 의미 있는 설명이다. 그는 음악 시장이라는 말 대신에 음반 시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1999년은 음악이 음원으로 형질변경(필자로서는 전락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되기 전이다. 그래서 음악은 CD나 카세트테이프의 형태로 존재했다. 중간 매개체 없이 스마트 폰에 음원이 담길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H.O.T는 베이징 차트에서 6위에 올랐다. 거기 투입된 비용은 천만 원이 넘지만 환율로 따져 지금껏 돌아온 수익은 거기의 4분의 1 정도다. 실패한 거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스타트로는 좋았다. 그리고 음반이 팔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노래가 뜨면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변하고 청바지, 신발, 음료수 등 일반상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장 자체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수만은 음악의 부대 산업으로서의 미용, 패션, 각종 공연 이벤트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음악이 뜨면 언어를 포함, 해당 국가에 대한 관심과 호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는 문화의 힘을 알고 있었다.
“세계 시장에 한국 음반을 배급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영어로 음반 제작을 할 예정이다. 세계 시장은 이제 단일국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패키지로 묶인 시장(유럽 공동체 등)을 상대해야 한다. 그에 대비해 아시아 패키지 기지의 전초를 마련하기 위한 인터넷 방송국을 기획하고 있다. 인터넷 방송국 설립이 끝나면 타워레코드 같은 브랜드를 만들어 직접 배급에 참여할 생각이다. 내부적으로는 음반사 최초로 상장기업으로 등록, 많은 사람이 경영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다. 음악으로 벌어들인 돈을 음악에 재투자 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발언을 끄집어내어 현재와 대비해가면 곰곰이 씹어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도 없다. 그는 몇 개의 공약을 한 셈이다. 영어로 음반제작을 하는 것은 성취했다. 음반사 최초 상장도 달성했다. 인터넷 방송국 설립은 저절로 필요 없어졌다. 유튜브가 대신 해줬다. 그는 이 사이버 공간에 인터넷 방송국의 개념을 뛰어넘는 음악 영토를 건설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쓰기로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음악 산업의 문제점을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말하겠다. 매개체 중 하나는 네트워크다. 음반을 프로모션 할 매개체가 방송밖에 없다. 그만큼 규제도 많고 탈도 많은데 그 외에 방법이 없다. 한 가지 더 일본의 경우 심야 시간에는 음반 광고가 CF의 70~80%를 차지한다. 이는 자유경쟁시장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나라는 동일 시간대 광고료의 차등이 없고 심야에는 프로그램도 없는 관계로 방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매개체의 또 다른 부분은 유통이다. 불법 음반에 대한 규제가 확실해야 그만큼의 수익으로 재투자할 수 있는데 규제가 미약하다. 상상하는 것보다 손실의 범위가 매우 큰데 아직 수수방관하고 있다.”
컴퓨터에는 밝았지만 이수만의 인터넷에 대한 이해는 여명 직전이다. 2014년 현재 TV는 낡은 매체가 되었다. 시간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TV는 경쟁력이 제로다. 1989년 가을, 이수만은 스튜디오를 만들면서 디지털이 다가올 시대의 대세가 될 것이며 온라인 공간에서 음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디지털 음원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에 가까운 주장을 직원들에게 역설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을 실감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컴퓨터가 대세라지만 실제로는 컴퓨터를 만져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컴퓨터, 디지털, 인터넷이라는 개념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 1999년은 너무 빨랐을 것이다.
4. 아이돌 그룹의 시대를 열다.
현진영의 모델이 바비 브라운이었다면 H.O.T의 벤치마킹 대상은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은 모리스 스타라는 미국 아이돌 그룹의 창시자가 만들어낸 기획 상품이었다. 예쁘장한 백인 소년들이 부르는 흑인 정서의 음악은 순식간에 미국을 점령했다. 1995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수만에게 확신을 주었다. 부모를 제치고 구매결정권을 행사하는 미국 청소년들이 지불하는 비용이 한 해 무려 96조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수만은 아이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할지, 어느 연령대의 가수가 노래를 불러야 호응이 높을지, 어떻게 소비자들인 아이들에게 다가갈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여론조사기관에 설문을 의뢰해 나온 공식이 '고교생 그룹 + 춤 + 노래 + 새로운 변화’였고 그 결과물이 H.O.T였다. 데뷔할 무렵의 H.O.T 멤버들은 고 1부터 고3 까지 모두 재학생이었다. 이수만은 이들이 수업을 마친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8개월간의 지옥 훈련이 끝나고 이들은 1996년 9월 데뷔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 타이틀은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였고 표지에는 양팔로 머리를 감싼 소년 한 명이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모습이 인쇄되어 있었다. 학교 폭력에 도전하는 힙합 전사들의 이미지로 H.O.T는 청소년들을 열광시켰다. 청소년들은 기꺼이 H.O.T를 서태지를 잇는 그들의 새로운 대변자로 받아들였고 후원군이 되었다. '전사의 후예’에 이어 후속곡인 '캔디’까지 표절 시비에 휘말렸지만 이미 팬덤을 형성한 청소년들은 H.O.T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이수만은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 다섯 명을 각기 다르게 포지셔닝했다. 문희준은 유머humor 가이, 강타는 핸썸handsome 가이, 장우혁은 터프tough 가이, 이재원은 샤이shy 가이, 토니 안은 무드 mood가이로 포장되었다, 폭넓은 성향의 팬들이 취향에 맞춰 골라잡을 수 있도록 다변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전략은 시장에서 통했고 나중에 소녀시대의 창설 때에도 그대로 응용된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H.O.T의 멤버들은 차례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수만은 1997년 2월 H.O.T의 잠정적인 활동중단을 발표하고 고별무대라는 형식을 통해 휴지기에 들어간다. 이는 서태지가 이미 구사했던 전략으로 앨범 출시와 활동 개시 - 휴지기 - 후속 앨범 발매와 활동 재개를 탄력적으로 구사하는 전형적인 순환 마케팅 기법이었다. (활동중지라더니 겨우) 3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H.O.T는 1997년 6월 2집 앨범 '늑대와 양’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열흘 만에 1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1997년 9월 H.O.T의 팬클럽 1기 창단식이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서 열렸다. 10대 소녀 1만 5천 명이 모인 화려하고 거대한 행사였다.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또 하나의 마케팅 기법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다. 마침 뉴 키즈 온 더 불록의 내한 공연 당시 고교생 한 명이 압사한 공간에서 벌어진 행사라 언론은 내심 사고가 터지기를 기대했지만 1만 5천 명의 소녀들은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진행했다. 이 또한 이수만이 노린 팬 클럽의 새로운 형태였다. H.O.T는 이제 사회 현상이 되었다.
보이 그룹으로 시장을 타진한 이수만의 다음 프로젝트는 걸 그룹 조직이었다. 이전에도 걸 그룹은 있었다. 그러나 눈요깃거리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게 그때까지 등장했던 걸 그룹의 경로였다. 그들은 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는 체력도 준비도 없었다. 1996년 처음 걸 그룹을 떠올린 이수만은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미국의 3인조 걸 그룹 TLC를 찍는다. TLC는 세 멤버 티-보즈T-Boz, 레프트 아이Left Eye, 칠리Chilli의 이니셜을 따 이름을 지은 그룹이었다. 이수만은 형태는 물론이고 이들이 구사했던 음악도 집중해서 연구했다. 보통 뉴 질 스윙New Jill Swing이라고 불리는 흑인 음악 장르였다. H.O.T 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은 프로젝트 시작부터 아시아 시장을 노렸다는 점이다. 한국어 담당 최성희, 영어 담당 김유진, 일본어 담당 유수영은 수천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선발되었다. 이수만은 중국어를 담당할 멤버까지 확보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그 꿈은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이수만은 H.O.T멤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걸 그룹 멤버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 최성희는 바다, 유수영은 슈, 김유진은 유진이 되었고 이들의 이니셜을 따서 S.E.S를 팀 명칭으로 정했다. 세 사람은 아침 열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연습을 반복했다. 훈련강도는 높았다. 보컬 트레이너들은 바닥에 누운 세 여고생들의 배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보컬 훈련을 시켰다. 목이 아닌 배로 부르는 노래를 하기 위해서였다. S.E.S는 1997년 11월 SBS 음악 프로를 통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다. 이들의 데뷔 앨범은 1주일 만에 16만 장이 판매된다. IMF로 경제가 한겨울처럼 얼어있던 시기이니 결코 적은 수량이 아니었다.
이수만이 걸 그룹 결성 때부터 염두에 둔 것은 일본 시장 진출이었다. 1998년 2월, 이수만은 S.E.S와 함께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일찍이 일본의 음악 평론가 교 노부코는 “일본에서 한국가수가 엔카를 부르지 않으면 음반을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 음악 산업계의 상식”이라고 단정 지어 말한 바 있다. S.E.S는 당연히 엔카 가수가 아니었고 S.E.S의 일본 시장 노크는 그러니까 상식에 도전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소니의 오디션 담당 프로듀서는 보컬과 힙합이 출중한 S.E.S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소니는 7년을 제시했고 이수만과 S.E.S의 계약 기간은 5년이었다. 대신 이수만이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스카이플래닝’이었다.
조건은 40개월에 2천 5백만 엔. S.E.S의 일본 활동은 활발했지만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포지셔닝에 문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비로운 요정의 이미지였지만 일본에서는 그것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그저 그런 걸 그룹 중 하나로 묻혀버린 것이다. 이수만에게는 좀 더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BoA(본명 권보아)는 대단히 특이한 한류다. 보아는 'K-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도 아니고 'J-팝을 부르는 일본인 가수’도 아니다. 보아는 'J-팝을 부르는 한국인 가수’다. 이수만의 전략이 그 영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고 100% 완제품 수출 상품도 아니다. 보아는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 굴지의 레코드 회사인 에이벡스Avex와 합작하여 생산한 합작품이다. 보아의 벤치마킹 모델은 아무로 나미에였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일본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하려면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즉, 트레이너들에 의해 단련되는 시간 + 3년이다. 후보군을 초등학교 고학년 중에서 골라야 했던 이유다. 보아는 오디션에서 S.E.S의 '완전한 자유’를 불렀고 바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연습생으로 선발된 초등학교 5학년 생 보아는 학교인 경기도 남양주에서 서울 방배동 연습실까지 시외버스, 전철, 택시를 갈아타며 왕복 5시간을 길에 버렸지만 단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재능과 독기. 보통은 둘 중에 하나이기 쉬운데 보아는 '독한 천재’였다. 집에 돌아간 보아는 거울 앞에서 또 연습을 이어갔다. 머리도 좋았다. 중학교를 수석 입학했지만 이수만의 권유로 외국인 학교로 옮긴다. 영어 같은 외국어 습득에 용이하고 감각도 국내적으로 길러져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을 연습생으로 뽑아서 외국인 학교까지 진학시킨 이수만이나 그걸 믿고 따라한 보아나 둘 다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다.
중국에서의 H.O.T의 성공, 일본에서의 보아의 성공부터는 생략한다. 이제까지의 과정만으로 이수만이라는 기획자가 어떤 경로로 한국 음악 산업을 발전시켜 왔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그룹 신화와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여기서 논의가 중단된 것이 섭섭할 수도 있겠다. 발굴에서 진출까지 그 경로는 대부분 비슷하다).
5. K-팝 그리고 이수만 시대의 명암
명실상부하게 '아시아의 스타’ 지위를 획득한 보아와 비와 세븐은 한국의 빅 3인 SM, JYP, YG 소속으로 200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가수다. 이들 빅 3는 해외 진출에서 예전처럼 대행업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사를 설립하여 직접 현지를 공략하는 '트랜스내셔널’한 기업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 변화는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한국은 경제의 압축 성장에 이어 음악 산업에서도 압축 성장을 기록한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경제성장의 문화적 버전이 지난 10년 간 한국 음악 산업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압축적 '글로벌화’는 인터넷이라는 인프라(혹은 우리 삶의 기본 플랫폼)를 통해 달성될 수 있었는데 62만 명이 구독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유튜브 채널은 이에 대한 반증으로 적당하다.
심지어 싸이의 '충격적인’ 성공도 3만 명의 팔로어를 가진 투애니원 멤버 산다라 박의 트위터 계정에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H.O.T를 시작으로 한국 대중음악 시장은 가수가 아닌 제작자 중심으로 재편된다. 과거 도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던 연예 산업에 기업 경영 이론이 도입된 것이다. 이수만은 제작자가 가수의 음악에서부터 패션, 라이프스타일까지 총체적으로 기획하는 것을 시스템화 시켰고 재능도 재능이지만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주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가수들을 주로 선발하고 단련시켜 데뷔시켰다. 물론 김완선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프로젝트였다. 산업의 영역에서 비즈니스 모델로 이를 실천한 것은 이수만의 고유한 미덕이다. 그러나 약점도 있었다. 이수만은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자작곡이 가능한 뮤지션 대신 10대 연습생 중심으로 후보군을 선발’하는 것에 대하여 '인성人性’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강조했다. 이 부분이 다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비평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 이는 가수를 돈을 버는, 혹은 노래를 하는 기계로 만들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 대중들은 이제 새로운 가수가 등장하면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어느 기획사 소속인지를 따져 묻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습생에 대한 오랜 기간의 투자가 기획사와 가수 사이의 불합리한 계약 관계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쪼개진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소송 문제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경영 스타일로 빅 3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두견새를 통한 유명한 비유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에 대한 설명은 빅 3의 수장인 이수만, 박진영, 양현석에게도 유용해 보인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를 죽여 버린다고 했다. 이수만 스타일이다. 시키는 대로, 제시하는 대로 따라오도록 한다.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주장하면 잘라버린다. 심지어 그는 계약이 만료된 가수들과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도록 구슬려야 한다고 했다. 박진영 스타일이다. JYP 소속 가수들이 떠나면서 하는 말이 있다.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 비가 그랬고 G.O.D의 김태우가 그랬다. 박진영은 소속 가수들의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JYP에는 오직 JYP 스타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방향으로 따라오도록 구슬린다(표현은 이렇지만 실제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만과 박진영은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양현석 스타일이다. 그는 인재를 발굴하지만 소속 가수들이 끼와 개성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른바 '똘끼’ 충만한 음악 스타일을 존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완숙해질 수 있도록 지켜봐 준다는 뜻이다. 빅 3가 내세운 자신들의 음악 영토에 대한 명칭을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해진다. SM는 '타운’이고 JYP는 '네이션’이고 YG는 '패밀리’다. 그들의 경영 스타일과 그 명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빅 3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인 발상이 아니다. 이수만은 1세대로 봐야 하고 나머지 둘은 이수만을 보면서 배운 2세대로 보는 것이 맞다. 이수만이 없었다면 나머지 둘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위험하지만 일부 타당하다. 선발주자가 없었다면 둘은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수만의 가수에 대한 경영스타일이 이렇게 굳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현진영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천에는 자신이 음악 활동을 했던 시기, '선생님’을 모시고 그의 지도에 따르며 경제적인 부분을 '감히’ 물어보지 못했던 DNA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스타일은 초창기 분명 안정적이었겠지만 결국 가수와의 분쟁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경영은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짓눌러서는 크게 개화하지 못한다. 한류의 기반을 만든 것은 분명 이수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부장적 리더십’은 그 유효 기간이 지났다. SM과 이수만을 벤치마킹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JYP는 공룡화되가면서 유연성을 잃어버린 SM을 보면서 그 맹점을 보완했다. 그러나 그 보완은 시스템에 일부 개선이었을 뿐 이른바 사람 경영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팽팽함과 다소의 느슨함이 이수만과 박진영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세 가지 시스템 중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들의 비율이 어떻게 조합되는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YG 50% + JYP 30% + SM 20% 같은 식이다(수치는 그냥 상징이다. 뉘앙스만 이해하시기를). 이 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전략에 따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YG 스타일이라고 해서 소속 가수들에게 100% 자유를 주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방기와 무책임이다. 개발할 영역이 있고 트레이닝을 시켜야 할 부분이 있다. 자율과 강제는 조합이 있을 때 아름다워진다. 이수만의 성공에는 분명 그늘이 있다.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자신이 음악을 했던 젊은 시절의 강압적이고 기획사 중심의 발상도 일부 몸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 장의 음반이 판매될 때마다 H.O.T 멤버들이 받았던 배분 수익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개척지를 향해 혼자 달려야 했던 이수만에게 기준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다. 현재 이수만은 경영에서는 손을 뗀 상태이다. SM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시스템을 바꿨다.
6. 이른 바 이수만 스타일
이수만은 그의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미덕은 차고 넘친다. 그는 무엇보다 변화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 이수만을 깨운 것은 MTV였다. 그는 MTV를 통해 음악의 미래를 읽었다. 음악 산업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고민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락이었을 MTV가 그에게는 공부였고 교과서였다. 이수만은 트렌드를 잘 읽었다. 뉴 키즈 온 더 불록의 결성에서부터 성공까지를 공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수만의 트렌드 읽기는 정보에 대한 분석에서 온다. 그는 스포츠 신문이 아니라 종합지를 정독하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예외적인 기획자였다. 그는 칭찬을 통해 내부의 결속과 아이디어를 끌어냈다. 직원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브레인스토밍은 연예기획사에서 아마도 처음 시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좋은 의견은 칭찬하고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현진영이 처음 대마초로 낙마했을 때 그에게 재기의 힘을 불어넣은 건 이수만의 관심과 칭찬이었다. 그는 경영을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수만은 도전을 주저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렵게 딴 학위와 자격을 버리고 불모지의 연예산업에 도전했다. 선진先進이 없어서 보고 배울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다. 이수만에게는 모든 것은 첫 발이었다. 당연히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위축되기는 하였으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컴퓨터 음악에 관심이 없을 때 CPU를 만들어 대중의 정서에 도전했다. 다들 우려했지만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수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실패를 싫어하는 오기가 있었다. 빗나가고 어긋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그는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찾으라면 아마 와신상담과 절치부심일 것이다. 애써 키운 현진영이 연달아 추락했을 때 그리고 S.E.S가 일본 진출에서 신통찮은 결과를 얻었을 때 그는 실패를 인정했지만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수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야망과 사업가로서의 동물적 감각이다. 그는 연예산업으로 코스닥 시장 등록 기록을 수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당시 딴따라 업종으로 코스닥 입성을 꿈꾸었던 사람은 아마 그가 유일했을 것이다. 현재도 그의 야망은 여전히 꿈틀대는 중이다. 2012년 6월 한국문화산업포럼이 충남 태안에서 개최한 '에너지와 문화콘텐츠 융합을 위한 지역 발전전략 대토론회’에서 들려준 이수만의 기조연설은 그의 꿈과 야망이 얼마나 지독하고 치열한지 보여준다.
“미래에는 누구나 두 개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하나는 아날로그적 출생국의 시민권이고 다른 하나는 버추얼 네이션이라는 가상 국가의 시민권입니다. 버추얼 네이션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SM 타운입니다. 지난 해 파리에서 한 공연도 그곳에 사는 SM 타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남미, 아랍에도 SM 타운 국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5,000만 명이 아니라 수십억 명의 인구를 가진 대국일 수 있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발언이다. 그는 기업가의 명단에 연예 산업 종사자의 이름을 올린다면 최초이자 유일하게 등재될 수 있는 '위대한’ 문화 산업 한국인이다.
*참고 도서
* 이수만 평전/안윤태 ㆍ공희준/정보와 사람
*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신현준/돌베개
* 게릴라 2호/이윤택/예니출판사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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