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잃어버린 30년, 이미 시작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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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대휘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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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수출의 힘을 얻은 코스피가 6,000선을 돌파한 지금, 문득 옆 나라 일본이 떠올랐다. 1990년대 일본은 도쿄 땅값이 미국 전역을 합친 것보다 비싸다는 말이 나오고, 닛케이 지수는 4 만에 육박했다. 그러나 버블이 꺼진 뒤 기다린 것은 일시적 불황이 아니라 30년에 가까운 장기 침체였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20년, 30년으로 늘려 가며 성장 없는 사회에 적응해 갔다. 디플레이션, 임금 정체, 고령화, 좀비 기업 문제가 분명했지만, 개혁보다 유지를 택했다.
지금 한국을 돌아보면 불길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출산율은 0명대이고,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청년 세대의 미래를 흔들 정도로 올랐고, 성장률은 1~2%대에 머무른다. 각종 규제가 쏟아지는 동안 시장의 활력은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겠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되묻게 된다. 한국의 잃어버린 30년은 이미 시작된 것은 아닌가.
1. 일본은 왜 30년을 잃었는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버블 붕괴보다, 그 이후의 선택에서 비롯됐다. 자산 가격이 무너지자 일본은 과감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연명을 택했다. 부실기업을 시장에서 퇴출하기보다 은행 대출과 저금리로 떠받쳤고, 부실 은행도 정치 논리에 가려 정리하지 못했다. 한 번의 짧은 충격 대신 오랜 정체를 감수한 셈이다. 저출산·고령화 위험을 알면서도 연금,노동,이민 개혁은 이해관계 때문에 미뤘다. 위기를 계기로 체질을 바꾸는 대신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
2.한국에서도 보이는 일본의 그림자
문제는 지금 한국에서도 비슷한 징후가 보인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일본처럼 되지 말자”고 말하지만, 실제 정책 선택은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부실을 신속히 정리하고 경쟁과 혁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한 개혁을 뒤로 미루고 각종 지원으로 연명하는 길을 걷고 있는가. 인구 구조부터 닮아 간다. 합계출산율은 0명대, 생산가능인구는 감소세다. 그럼에도 연금·건강보험 개혁은 정치적 부담 때문에 미뤄진다. 부동산 역시 비슷하다. 수도권 아파트는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기준이 됐고, 집이 있는 세대와 없는 세대의 격차는 벌어진다. 버블 조정 충격을 흡수할 중장기 설계보다 단기 규제·완화 대책이 앞선다. 성장률은 1~2%대에 머무르고,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각종 지원 속에 시장에 남아 있다는 지적도 많다. 표면적으로는 일본과 다르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인구·부동산·성장 구조를 뜯어보면, 우리가 일본이 걸었던 길의 초입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다.
3.일본과 다른 점, 남아있는 여지
그렇다고 한국이 일본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중요한 차이와 긍정적 요소도 분명하다.
첫째, 위기 경험이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와 기업 구조조정의 고통을 이미 한번 치렀다. 일본이 버블 붕괴 직후 부실을 덮어 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위기 때마다 비교적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이 기억과 제도는 다시 조정 국면이 다가올 때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다.
둘째, 산업 구조와 기술 역량이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IT,디지털 전환에 뒤처졌던 것과 달리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모바일 등에서 글로벌하게 경쟁하고 있다. 규제가 많고, 중국이 치고 올라오는 형국이지만 뛰어난 기술과 인적 자원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다.
셋째, 변화의 속도이다. 다양한 갈등, 정치 피로에도, 한국 사회는 한 번 문제의식이 형성되면 정책과 제도가 빠르게 바뀌는 편이다. 느리고 점진적인 일본식 조정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이 남아 있다면, 인구, 부동산, 재정 문제에서라도 방향 전환을 시도할 여지는 남아 있다.
4.한국의 잃어버린 30년을 피하려면
결국 이 차이점을 통해 실제 선택으로 이어지는가이다. 한국판 잃어버린 30년을 피하려면 몇 가지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부실기업을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해야 한다. 다양한 이유를 핑계로 퇴출을 미루면 단기 고통은 줄어들지 몰라도, 전체 경제의 역동성은 떨어진다.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묶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인구구조에 대한 변화도 미룰순 없다. 연금과 건강보험, 노동시장 개혁은 표를 의식해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니라, 지금 세대가 책임지고 설계해야 할 과제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다음 세대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커진다. 부동산과 금융 정책 역시 단기 가격관리보다 버블과 조정을 흡수할 수 있는 제도 설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세대, 계층 간 자산 격차를 완화하면서도 시장 기능이 작동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호황과 지수 뒤에 가려진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고, 불편한 개혁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30년이 아닌 나아가는 30년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