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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칼럼] 오딧세이와 자유시장경제

글쓴이
고광용 2026-08-25 , 브릿지경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딧세이>를 관통하는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제우스의 법(Zeus’ Law)’이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고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손님 역시 주인의 환대를 존중하고 이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 즉 손님과 주인 사이의 환대와 상호성의 규범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규칙이 단순히 친절을 베풀라는 도덕률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딧세이>의 세계에서 낯선 사람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제우스의 법’은 낯선 이를 처음부터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손님에게는 주인의 재산과 질서를 침해하지 않을 의무를 부과한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도록 하는 사회적 규칙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우스의 법’은 자유시장경제와 만난다. 시장경제의 가장 놀라운 특징 역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협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빵을 사면서 제빵사의 출신이나 정치적 견해를 알 필요가 없고, 해외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살 때 생산자를 직접 만날 필요도 없다. 가격과 계약, 신뢰할 수 있는 거래규칙만 존재한다면 낯선 사람과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 시장은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거대한 '낯선 사람들의 협력체계’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작동하려면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재산은 내가 처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은 동의 없이 침해할 수 없다는 재산권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며 사기와 강탈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거래 상대가 누구든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는 믿음도 필요하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법치와 재산권이 중요한 이유다.


<오딧세이>의 구혼자들은 이러한 규칙이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머물며 음식과 재산을 소비하고, 결국 주인의 가정과 재산까지 차지하려 한다. 처음에는 손님이었지만 환대를 권리처럼 여기고 이를 약탈로 바꿔버린 것이다. 환대를 받을 자유와 환대를 약탈할 자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시장경제도 마찬가지다. 자유시장경제는 기업이나 개인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이 아니다. 자신의 재산과 선택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 자유에는 타인의 재산과 선택을 침해하지 않을 책임이 따른다. 사기, 계약 위반, 폭력과 강탈은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을 파괴하는 행위다. 자유와 책임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자유로운 질서를 구성하는 두 축이다.


이 원리는 정부의 역할에도 적용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거래의 가격과 조건을 직접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재산권을 보호하고 계약의 이행을 보장하며 사기와 폭력을 막는 것은 시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반대로 특정 집단에 특권을 주거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규칙을 자주 바꾸는 것은 시장의 신뢰를 훼손한다. 좋은 제도는 시장을 대신하지 않는다.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규칙을 지킨다.


자유시장경제에는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다. 개인의 이익 추구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신뢰와 절제, 약속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어기는 사회에서는 거래비용이 커지고 시장도 위축된다. 반대로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강한 사회에서는 낯선 사람 사이에서도 수많은 교환과 협력이 가능하다.


수천 년 전 <오딧세이>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낯선 사람을 적으로 볼 것인가, 거래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인가. 제우스의 법이 낯선 사람 사이의 환대와 상호성을 통해 질서를 만들었다면, 현대의 자유시장경제는 재산권과 계약, 신뢰와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 낯선 사람들을 협력하게 한다.


문명은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다. 서로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이 일정한 규칙을 믿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면서 발전했다. 자유는 무질서가 아니다. 서로의 자유와 재산을 존중한다는 규칙이 있을 때 비로소 자유는 협력이 되고, 교환이 되고, 번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