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E Home

담합은 시장의 죄가 아니다

글쓴이
신수민 2026-05-27

자취 5년차가 되면 마트가 달라 보인다. 신입생 때는 진열대 앞에서 "뭐 먹지"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얼마지"를 먼저 본다. 라면도 식용유도 설탕도 해마다 가격표가 다시 붙는다. 흥미로운 건 어느 브랜드를 집어도 가격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A사를 내려놓고 B사를 들어도, 옆 매대 PB상품을 봐도, 가격은 약속한 듯 닮아있다. 그 "약속"이 진짜 약속이었다는 사실이 4월 검찰 발표로 드러났다. 전분당 9조 원, 밀가루·설탕까지 합치면 10조 원대 담합. 자취생의 영수증이 무거워진 이유 하나가 매대 위에 적혀 있었다.

뉴스가 나오자 여론의 결론은 비슷했다. '역시 시장에만 맡겨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도 같은 결론에 섰다. 담합 기업에 대한 영구 퇴출과 무제한 신고 포상금 제도가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진단은 절반만 맞다. 담합은 시장경제가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만 자라는 잡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가격이다. 그러나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하이에크는 가격을 "분산된 지식이 응축된 신호"라 불렀다. 어느 농부 한 명이 작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안다. 어느 운송업자 한 명이 유가가 오를 것을 안다. 누구도 한꺼번에 알 수 없는 단편적 정보들이 가격이라는 신호로 모여 시장 전체에 전달된다. 이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 자원은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어느 누구의 자의적 결정도 가격을 좌우하지 못한다.

담합은 바로 이 신호 체계를 비트는 행위다. 몇몇 공급자가 가격을 올리기로 합의하면, 가격은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카르텔의 의사를 전달한다. 하지만 시장경제는 강력한 자기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다. 카르텔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모든 참여자가 합의 가격을 지켜야 유지되는데, 누구든 단 한 명만 합의를 깨고 가격을 살짝 낮추면 시장 전체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를 깬 자가 가장 큰 보상을 받고, 합의를 지킨 자는 손해를 본다.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구조다. 그래서 자유로운 시장의 카르텔은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왜 제분, 제당, 전분당에서는 카르텔이 수년, 길게는 수십 년간 유지되었나. 답은 시장 구조에 있다. 한국의 밀 자급률은 1%, 그런데 수입 밀 시장은 상위 5개사가 64%를 점유하고, 제분 시장은 7개사가 88%를 차지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이 원재료들의 B2B 거래 비중이 75~95%라는 점이다. 소비자가 직접 가격을 비교할 수 없는 영역이고, 새로운 사업자가 들어오려면 검역, 유통망, 거래선이라는 두꺼운 벽을 넘어야 한다.

진입장벽이 카르텔의 구조적 약점을 가려준 것이다. 자유로운 시장에서는 카르텔의 높은 가격이 곧바로 신규 진입자를 부른다. 새로 들어온 사업자가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 카르텔은 무너진다. 그러나 진입이 막혀있으면 높은 가격은 그저 카르텔의 이윤으로만 남는다. 7개사는 서로를 감시하기만 하면 되었고, 새 경쟁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시장경제의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작동할 공간 자체가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결정적인 균열을 낸 것이 검찰의 압수수색이 아니라 삼양사의 자진 신고였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카르텔은 결국 내부 배신, 죄수의 딜레마의 본래 결말로 무너진다. 영구퇴출과 거액 포상금은 다음 카르텔을 약간 더 위험하게 만들 뿐, 토양은 그대로 둔다. 처벌은 잡초의 줄기를 자르고, 경쟁은 잡초의 뿌리를 뽑는다. 진짜 처방은 시장의 문을 더 여는 것이다. 식품 원재료 수입 절차의 간소화, 검역 규제의 합리화, 신규 사업자의 진입 비용 인하. 외국 제분업체가 한국 B2B 시장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다면 국내 7개사의 합의는 다음 분기를 넘기지 못한다.

다시 마트로 돌아온다. 진열대의 가격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사실은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경쟁의 부재였다. 자취생의 카트가 무거워진 이유는 시장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충분히 열리지 않아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경제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자취생의 영수증을 가볍게 만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처벌이 아니다. 경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