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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격제‧차량 5부제가 최선? 위기일수록 시장 조정기능 신뢰...

글쓴이
왕호준 2026-03-25 , 마켓뉴스

◆ 29년 만에 석유 가격 통제 시행, 가격 억누르는 방식--시장 조정 기능 약화시킬 우려 / 국제 가격 상승 반영하면 가격 안정 효과 줄어들고, 반영하지 않으면 정유사 손실 커져 / 가격 통제‧재정 확대‧이동 제한, 조치 반복될수록 정책 의존도 높아진다


29년 만에 석유 가격 통제가 다시 시행됐다.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정부는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도입하며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에 상한선을 설정했다. 물가 상승 압력을 완화하고 서민 부담을 줄이기 위한 비상조치라는 점에서 정책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가격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도 타당한 대응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국제유가 급등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 유류 가격 상승은 물가 전반을 끌어올리고 물류·농업·제조업 등 산업 전반의 비용을 높인다. 실제로 중동 사태 이후 국내 기름값이 급등하면서 산업 현장의 부담이 커지고 있고, 물가 상승 압력이 확대될 경우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부가 비상 대응에 나선 배경에는 이러한 현실적 위기 인식이 있다.


문제는 가격을 행정적으로 억누르는 방식이 시장의 조정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가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상황을 반영하는 신호이며, 경제 주체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가격이 상승하면 소비는 조정되고 공급은 확대되며 자원은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가격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면 이러한 조정 과정이 작동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던 문제가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실제로 최고가격제가 시행되자 정유사들은 계약 관계에 있는 주유소를 우선 공급하고 현물 시장 물량을 줄이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특정 브랜드에 속하지 않은 무폴 주유소나 일부 자영 주유소가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공급 감소를 막기 위해 반출량 유지와 매점매석 금지 규정을 동시에 시행해야 하는 상황은 가격 통제가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격 통제가 지속될수록 정책은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국제 가격 상승을 반영하면 가격 안정 효과가 줄어들고, 반영하지 않으면 정유사의 손실이 커진다. 결국 손실을 재정으로 보전하는 방식이 불가피해지고 정책은 시장 통제가 아니라 재정 투입으로 유지되는 구조로 바뀐다. 실제로 정부는 최고가격제로 발생한 손실을 정산해 보전하고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유류비 부담 완화와 지원 정책을 추진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반복될수록 경제는 점점 더 정부 개입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공급 충격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진 상황에서 재정 지출까지 확대되면 시장의 가격 조정 기능은 더욱 약해진다. 특히 고환율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규모 재정 지출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물가와 외환시장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단기적인 안정을 위해 시장 신호를 억누르는 정책이 장기적인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가격을 통제하는 정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스스로 조정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일이다. 세제 조정이나 취약계층 지원과 같은 보완적 정책은 가능하지만, 가격 자체를 행정적으로 억누르는 방식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러-우전쟁 같은 고유가 국면에서도 정부는 가격 통제보다 유류세 인하와 공급 안정 대책을 통해 충격을 완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시장의 작동을 유지하는 정책이 결국 더 안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차량 5부제나 10부제 같은 수요 억제 정책까지 거론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차량 운행을 제한하는 방식은 국민의 이동권을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강력한 행정 조치이며, 정상적인 시장 대응이라기보다 통제 중심의 위기 대응에 가깝다. 위기 상황일수록 정책은 시장의 기능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부담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


전쟁과 유가 급등이라는 충격 속에서 정부가 강한 개입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격 통제와 재정 확대, 이동 제한과 같은 조치가 반복될수록 시장의 조정 기능은 약해지고 정책 의존도만 높아진다. 위기 상황일수록 필요한 것은 통제가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회복시키는 방향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입이 아니라 정책의 절제와 시장에 대한 신뢰다.


왕호준 자유기업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