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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딜레마: 시민공화주의

한정석 / 2021-02-10 / 조회: 1,048

2014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대한민국에 '정의론’ 열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한국에서 샌델의 정의론은 더 이상의 관심과 논의를 불러오지 못하고 있다.


단지 유행이었던 것 뿐일까. 하기는 그 어려운 윤리철학 책이 국내에서 120만 부가 팔렸다는 사실 자체가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정의에 목말랐던 대부분의 독자들은 샌델의 정의론에서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센델에게는 '무엇이 정의냐’는 질문의 답보다 시민공화주의라는 정치철학이 더 본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참여 민주주의라든지, 심의 민주주의가 우리 정치의 대안이라는 주장들의 바탕을 이루는 센델의 시민공화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샌델은 스스로를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샌델의 이념을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또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이클 센델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고전주의 고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센델의 시민공화주의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정치철학은 그리스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폴리스들의 황혼기에 등장했다. 이 두 현자의 시대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 이어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 건설로 동방과 이집트의 이질적 문화와 가치, 재화와 종교들이 아테네에 밀려오던 시기였다. 따라서 더 이상 아테네는 폴리스적 전통으로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리스를 떠받치던 공동체 정신은 종교와 국적을 초월한 개인의 등장으로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다.


이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 즉 a poria의 시기에 위기 극복론으로 제시된 정치철학이 바로 플라톤의 <국가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함께 서구의 근대 자유주의 사상은 근대 유럽이 산업혁명의 시기에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정치적 이념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보편적 질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경제적으로 주도하는 계층에 의해 주창되고 승인된다.


독일의 헌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규범은 구체적 현실이 보편성을 포섭하면서 등장한다’고 했던 말은 바로 섣부른 보편주의 정치철학이 가질 수 있는 비현실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선한 의도, 나쁜 결과’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보편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샌델의 정치철학은 위기와 갈등과 해체의 운명 앞에 놓인 정치공동체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책이 된다.


위기 앞에 놓인 공동체에게는 샌델의 주장처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연대와 가치의 재확신이 필요하며 이때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단해야 하는 원리는 도덕일 수 밖에 없다. 샌델의 책이 한국에서 대단한 히트를 친 이유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이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불안감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결코 한국 대중의 지적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시민공화주의의 모순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주 딜레마적 상황을 설정한다. 딜레마라는 것은 그 말의 의미처럼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고 위기에 처한 아테네의 길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등과 발작적 히스테리를 샌델은 '토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며 이 때문에 샌델은 자신이 비판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모순, 그 안에 자신을 존치시키게 된다.


샌델의 정치철학은 시민공화주의를 주창하지만, 사실 그러한 정치철학으로 구축된 공화국에는 주권이 존재하고, 그러한 주권은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기에 개개인이 통치의 효력으로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위임을 통해서만 통치가 이뤄진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시민 공화주의는 법학자들로서는 여간 골치아픈 문제가 아니다. 공법적 체제로 시민공화주의를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인데 주권의 원리 때문에 그렇다. 주권의 원리를 배제한 어떤 국가공동체에 대한 이념도 모두 헛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칼 슈미트의 지적처럼 우리는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연대함으로써 정치적 질서를 창출하게 되고, 이에 만장일치로 합의한 통치질서가 곧 주권 국가가 된다.


한 국가의 주권은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갖는다. 이 주권이 한 사람의 지배자에게 있게 되면 군주국가가 되고, 소수 엘리트에게 주어지면 귀족국가가 되며 국민 전체에 주어지면 민주제의 국민국가가 된다. 이러한 국가의 유형은 처음부터 그런 계획과 보편적 규범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 시대의 현실에 맞는 구체적 요건들이 그런 질서를 낳았다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국가는 필요하지만 특별한 정체(政體)가 요구되지는 않는다. 민주정이든 공화정이든 심지어 군주정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정치체제가 개인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정치학자 한스 헤르만 호페가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라는 저서에서 근대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오히려 계몽군주 국가들에서 시민들의 자유와 재산이 더 잘 보호되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낸 것도 이러한 점을 말해준다. 북유럽의 계몽군주 국가들은 전쟁을 회피했고 교육과 산업을 장려했다. 


이렇듯,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외삽적 접근은 민주주의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센델이 항상 강조하는 '더 많은 정치 참여와 더 많은 공론의 장’은 구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덕목이다. 이 점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기에 그러한 이성으로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공론의 장에서 서로 만난다면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있게 되고 기꺼이 그러한 보편성에 복종하게 됨을 역설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칼 슈미트는 이러한 자유주의 정치론자들의 주장을 '영원한 대화’만을 요구하는 정치적 낭만주의로 일축한다. 이들은 정작 주권자의 이름으로 적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때에 결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샌델에게 궁금한 것은 시민공화주의를 찬양하는 그가 과연 적과 전쟁해야 할 때 전쟁을 결단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적과도 공동선의 발견을 위해 영원한 대화를 하려 들지에 대한 것이다. 칼 슈미트의 지적처럼 정치적 질서는 언제나 적과 동지의 구별로부터 시작되며, 적이 없다면 국가와 정치공동체는 내부의 적과 동지라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외부에 기필코 다른 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의 종말’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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