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을 깬다

자유경제원 / 2015-12-15 / 조회: 4,662       미래한국

정재욱 기자  jujung19@futurekorea.co.kr

이승만은 누구일까.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공화정인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임에 틀림없지만, 혹자는 “독재자, 분단의 원흉”이라는 식으로 말들이 많다. 이것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만의 주장이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에 대한 비판은 집요하고 체계적이다. 과연 그들의 그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부합되는 내용들일까.

신간 <이승만 깨기>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판에 대한 명쾌한 반론이다. 결론은 “제대로 알고나 떠들어라”이다. 이 책은 이승만과 한국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전문가들이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6개월 동안 관련 내용에 대해 주제발표를 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하였으며, 이 주제발표와 토론을 원고로 정리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승만에 대한 왜곡과 모략을 자료와 사실을 근거로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 조직적 선동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반(反) 이승만, 반(反) 대한민국’의 실체를 격파하고 있다. ‘이승만의 7가지 누명 벗기기’는 이승만을 엉터리 자료,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 공격하는 거짓 논리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반박하는 통쾌한 책이다. 책의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들 발췌 소개한다.

국민이 물러나란다고 권좌에서 내려오는 게 독재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독재냐 민주냐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역사적 과정에 대한 상대적 평가일 뿐이다. 봉건왕조제와 식민제를 물려받아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걸음마 시기의 지도자에게 갑자기 성숙한 서구식 민주주의 기준을 들이대고 “왜 민주주의 못했어?” 하고 회초리를 들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승만의 독재를 탓하기 이전에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은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의 첫걸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민족사 최초의 민주공화제적 헌정질서의 출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대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헌법과 법률에 의해 통치되는 시대를 열었다.

모든 독재자는 가혹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반대자들을 진압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미숙했던 민주체제를 더 성숙시키는 과정이었다.

부정선거로 당선? 그건 부통령 선거였다

(조우석  문화평론가·KBS 이사)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선거 당선자로 모는 단초는 1960년 3·15 선거였다. 3·15 선거는 이기붕을 비롯한 최인규 내무장관, 홍진기 법무장관 등이 주도한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자유당의 부정선거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선 한 달 전 야당 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사망하면서 사실상 단독 출마하여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당선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거에 대한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선거의 원흉이라고 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승만을 악마화하려는 모략일 뿐이다.

당시는 정권 말기 현상을 보일 때였다. 경무대 주변에서 이승만의 국정 장악력이 느슨해지는 징후와 함께 이기붕 쪽으로 권력의 무게 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연로했던 그가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 못했고,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선거 부정을 지휘 연출한 총본산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국무회의 속기록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그간의 통치 행태로 보아 선거 부정을 획책할 유형의 정치인도 아니었다.

6·25 나자 제일 먼저 도망?=그럼 전쟁 지휘부를 후방으로 옮기는 게 잘못인가?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대통령의 피난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남침 하루 후인 6월 26일 오후였다.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이날 오후 2시 40분경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때였다. 이 대통령은 피난 의견을 단호히 거절했고, 6월 27일 새벽 2시에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피난을 건의했을 때도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북한군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피난을 결정했다. (이 보고는 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잘못된 보고였다.)

국가 원수가 적군에게 체포될 수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안위와 전쟁 지휘를 위해 긴급 피난을 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승만이 비겁자라면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을 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전황이 명백히 불리해지고 적기가 서울 상공을 선회하는 중에도 맥아더 사령관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압박해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또 육군본부에도 직접 방문해 전황을 파악하고 독려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기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때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 구간이 무너지자 무초 미국 대사가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할 것을 권고했다. 이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공산군에게 포위당한다면 나와 내 아내는 이 총으로 자결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은 조금도 없소. 결코 도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 그럼 1년 전에 정부 조직한 북쪽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이승만 대통령이 분단의 원인 제공자라는 주장은 그의 1946년 6월 3일의 단독정부 수립 의지를 밝힌 정읍 발언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정부 수립보다 한참 뒤늦은 대응이었다. 북한에서는 남한에서의 단독선거인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기 1년 전에 이미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단독국회를 구성하고 단독정부를 만들었다.

스탈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0일 “북조선에 공산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라는 비밀 지령을 내려 소련의 공산 위성국가 수립이 적극 전개됐다. 그 결과 1946년 2월 8일 북한에 사실상의 정부 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했고, 1946년 11월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으며, 1947년 2월에는 ‘임시’ 자를 떼어버리고 명실상부한 공산 단독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두고도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친일 청산 않고 친일파 비호?=건국내각은 북쪽은 친일파, 남한은 독립운동가 중심

(김용삼  본지 미래한국  편집장)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초안이 나흘 만에 만들어진 졸속 입법이었으며, 소급입법이었고, 재판을 3심이 아닌 단심으로 하는 위헌적 법률이었다.

이 무렵 북한에 포섭된 국회의원 13명이 대한민국 전복을 위해 국회에서 활동한 ‘국회 프락치사건’이 터졌다. 이 가운데 주동자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등이 반민법 제정을 주도하고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 참가한 자들이었다. 이는 반민법과 반민특위가 남로당과 북한 공산집단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활동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다.

반민법은 이승만과 친일세력이 방해공작을 펴서 반민특위 활동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라 1949년 8월 31일 반민특위 위원장 이인(법무부 장관)의 담화처럼 “38선이 그대로 있고 시국이 혼란하고 인재가 부족한 이때에 반민족 행위 처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죄질이 가장 심했던 자만을 처단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은 것이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방해했다는 것은 이승만에 친일 프레임을 걸어 공격하려는 공산 진영의 시도일 뿐이다.

현재 남한 내 좌파·종북세력들은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득세한 국가, 북한은 친일파를 깨끗이 청산하여 민족적으로 흠결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북한에서 말하는 친일청산이란 공산당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들을 숙청한 것에 불과하다. 특히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라도 공산 소비에트화에 동참하면 책임을 묻지 않았다.

북한 초기 친일파 등용의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식민지 시절 도의원을 지낸 강양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 만주에서 검사장을 한 북한 검찰총장 한낙규 등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 = 무슨 앞잡이가 말도 안 듣고 미국을 협박해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이승만은 용미(用美)주의자다. 청년 시절 이승만은 친미주의자였지만 독립운동, 건국, 6·25전쟁, 전후 재건기 내내 미국과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때마다 국제정치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벼랑 끝 외교’ 전술을 구사하면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이뤘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이승만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적(敵)”이라고 투덜대기까지 한 일화가 그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이 적이라고 극언했던 이 대통령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미국의 앞잡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나? = 국제분쟁은 총보다 외교가 정답!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승만은 수학한 기간을 포함, 38년 동안 미국에서 외교독립 운동을 수행했다. 1917년 출간된 <청일전기>, 1904년 11월 4일부터 1934년 12월 28일까지, 그리고 1944년 1월 5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 기록한 총 31년간의 <이승만 일기> 등의 기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항일 외교독립 운동이 증명된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식은 당시 최고의 전문성을 구사한 활동이었다. 일본이 처한 국제관계의 약점은 물론 강대국 사이의 역학관계를 고려한 판단에 기초해 미래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실력자들을 설득하고, 또 이를 장기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국내외 동포들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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