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감하면서 빵집은 결국 얼마간의 빵을 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능률적이고 낭비적인가?
1800년대 이후 자본주의 제도는 인류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만족스러운 일자리의 부족, 고질적이고 심각한 임금 및 부의 불평등, 심지어 생산은 되지만 소비는 되지 않는 소비자 물품의 낭비 같은 소위 온갖 종류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결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절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 결함은 생산 및 분배를 장악하고 있는 제도의 짜증나는 특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도 자체를 폐지해서 결함도 해소하던지 아니면 정부 개입을 통해 손을 좀 보면 된다.
왜 바게뜨와 패스트리는 버려져야 하나
그러나 그런 식의 접근은 뭔가 의심쩍다. 빵을 버리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프랑스인 친구 하나는 그저 문을 닫을 즈음 빵집을 가보기만 해도 자본주의 사회의 비능률성을 볼 수 있다고 페이스북에 성토했다. 실제로, 그 시간에 빵집에 가면 맛있는 바게뜨와 패스트리가 꽤 많이 팔리지 않은 채 있을 것이고, 문을 닫으면 아마도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고 빵집이 운영방식을 바꾸면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일까?
액상프로방스에 있는 우리 집 근처 빵집을 생각해 보자. 나는 거의 매일 아침 그 곳에서 패스트리와 커피를 산다. 거의 매일 가니까 완전히 단골 고객이긴 하지만, 똑같은 빵만 사는 건 아니다. 대개는 패스트리 하나를 사지만, 가끔 배가 정말 고프거나 바로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할 때면 초콜릿 빵을 두 개 산다. 그리고 가끔은 집을 떠나 있거나 뭐 다른 이유들 때문에 며칠 동안 가지 않기도 한다.
관광객처럼 한 번만 가는 게 아니라 해도 다른 손님들 대부분은 이따금 들릴 뿐이다. 빵집은 누가 뭘 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대략적인 판매량을 계산해 내야 한다.
빵집도 그렇고 다른 사업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리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서는 다소 예측 가능한 행동들을 하니 다행이다. 물론 그 무리 안에서 각 개인들의 행동까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복잡한 확률을 다룬다면 그 예측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바게뜨와 패스트리가 다 팔리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빵의 가격이나 빵집의 소유권이나 그와 관련된 그 무엇은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프랑스나 액상프로방스의 모든 빵집들이 빵의 종류와 생산량을 모두 결정하는 중앙 빵집 위원회를 통해 경영된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 무리의 규모를 크게 잡았다 해도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은 세상의 근본적 특성이다.
빵의 생산량은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나는 자본주의 제도 역시 빵집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잘 대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우선, 모든 빵집들은, 심지어 Paul이나 La Varenne의 가맹점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자율적이다. 그래서 더 잘 계산하고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특징 즉, 손익 구조 덕분에 사람들을 위해 어떤 가치를 더 창조하고 줄일 것인지에 대한 중대한 피드백을 재빨리 얻을 수 있다.
빵집은 임대한 점포, 전기, 빵을 굽고 파는 인력, 밀가루와 같은 재료 등, 자원을 사용한다. 자본주의 제도에서는 투입된 자원과 생산품 모두 화폐 단위로 가치가 매겨지는 가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교가 가능하다. 빵집의 총판매 액수가 투입된 자원의 총 가격보다 크다면, 빵집은 이익을 얻는다. 반대의 경우라면, 빵집은 손해를 입는다. 빵집은 이런저런 변화를 주면서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을 해 볼 수도 있다.
과잉생산이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빵집은 아마도 오차 범위 내에서 매일 평균 판매량보다 약간 많이 생산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날은 고객들이 특정한 패스트리나 바게뜨를 평소보다 더 많이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손님이 빵집에 왔다가 원하는 빵을 사지 못했다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잉 생산은 손익 구조로 제한을 받는다. 만약 빵집이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는 구조라면 손해를 볼 것이고 지속적인 사업 운영이 어려울 수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나 매니저가 바뀌거나 그 자리에는 고객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이 들어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빵집들 역시 버리는 빵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혁신적 방안의 도입을 시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의 수요 양상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과거 판매량을 바탕으로 신경망 (neural network)을 구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머신 러닝 전문가들은, 예를 들어 신약 개발 같이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곳에 투입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정부개입은 비능률성을 상승시킨다
이런 것들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만약 정부가 개입한다면 빵집들의 음식물 쓰레기를 훨씬 더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매일 초콜릿 빵을 몇 개나 생산할 지 중앙에서 계획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어쩌면 정부는 모든 빵집에서 팔리지 않는 빵의 무게나 양을 제한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아니면, 팔리지 않은 빵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음식물 쓰레기가 줄어들까?
그러면 일단 빵집에서 버리는 빵이 줄어드는 것은 손쉽게 볼 수 있겠지만, 다른 곳에서 낭비가 생기고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게 문제다.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은 무조건 강제적 시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빵집들은 번거롭게 정부 시책에 부응하는 절차를 따라야 할 것이고, 그들을 감시하는 관료들이 필요할 것이다.
정책을 따르지 않는 빵집 주인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여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데 많은 자원들이 필요하다. 특히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인력들을 데려와야 한다. 동시에, 정부가 빵집들을 처벌할 때 국민들은 그 비용을 자발적으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측정할 수 있는, 그나마 불완전한 시장의 피드백조차 없다.
물론, 정부가 개입하면 강제적으로라도 빵집들이 더 능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만약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서 이익이 있을 것이었다면, 기업가들은 그럴 만한 인센티브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미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소비자들이 원하는 빵을 살 수 없다 하더라도 음식물 쓰레기 자체를 줄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일 것이다. 사회 경제 제도는 비록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선호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쉽게 눈에 띠는 쓰레기로 인한 심미적 불편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호소력 있어 보인다.
빵집 이야기가 주는 더 큰 교훈
보기에 단순한 빵집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말 큰 교훈을 준다. 자본주의 생산 및 분배 제도의 문제처럼 보였던 것이 알고 보니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제도의 결함은 인간에게 알려진 최고의 대응이다. 왜냐하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적응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일이 충분치 않은 세상의) 일자리 문제나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은 자본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의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내재된 불완전함을 비난하는 것이다.
본 내용은 https://fee.org/articles/capitalism-is-imperfect-because-the-world-is-imperfect-but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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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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