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이 놓친 책임의 경계: 선의보다 필요한 예측 가능한 질서
-
글쓴이
정시헌 2026-05-27
-
편의점에 가 본 적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도시락도, 생수도, 생필품도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은 장면을 떠올려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편의점의 가치는 단순히 24시간 문을 여는 데 있지 않다. 언제 가도 필요한 물건이 있다는 신뢰에 있다. 그 신뢰가 무너지면 소비자는 불편을 겪고, 점주는 매출을 잃는다. 최근 CU 물류 파업 논란이 보여준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서울경제신문에 따르면 이번 파업의 영향을 받은 점포는 약 3,000곳으로 추산됐고, 피해 규모도 하루 6억~16억 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노사 갈등은 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에서 시작되지만, 그 비용은 공급망을 따라 교섭 당사자가 아닌 가맹점주와 소비자에게까지 옮겨 갈 수 있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쟁 역시 단순한 노사 문제가 아니라, 시장 전체의 예측 가능성과 연결된 문제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노란봉투법의 취지는 하청 노동자처럼 교섭력이 약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데 있다. 그 문제의식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산업 현장에는 원청이 사실상 중요한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법적 책임은 하청업체에 머무르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구조가 노동자의 협상력을 약화한 측면도 있었다. 따라서 원청의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취지가 곧 좋은 제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개정법은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원청이라도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경우, 그 범위에서 사용자로 인정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법 조문이 기준을 제시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행위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배·결정’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원청이 작업장 안전을 위해 공통 안전기준을 정하는 것과, 하청 노동자의 임금 수준이나 근로시간을 사실상 직접 결정하는 것은 책임의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산업 현장의 안전을 위한 관리 행위에 가까울 수 있지만, 후자는 근로조건 자체를 결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경계가 불명확하면 기업은 교섭 자체보다 법적 분쟁과 절차 대응에 더 큰 비용을 쓰게 되고, 그 불확실성이 산업 현장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각 경제주체가 자신의 책임과 위험을 예측할 수 있어야 거래가 계속된다. 원청이 어떤 경우에 교섭 의무를 지는지, 교섭 대상이 임금인지 안전관리인지 복지인지가 불분명하면 교섭 요구와 법적 다툼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업은 그 불확실성을 피하고자 투자와 고용 결정을 미루거나, 자동화와 해외 이전을 선택할 유인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작 보호하려 했던 하청 노동자의 일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역설이 나타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제3자 피해다. 공급망이 촘촘하게 연결된 사회에서는 물류 중단이나 시설 점거가 교섭 당사자가 아닌 소상공인과 소비자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 편의점의 빈 진열대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공급망 갈등이 현실에서 어떤 비용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류가 멈추면 원청과 노조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제품을 공급받지 못한 가맹점주와 불편을 겪는 소비자도 그 비용을 함께 부담한다. 따라서 법을 설계할 때는 권리 행사의 정당성뿐 아니라, 그 권리가 타인에게 전가하는 비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노란봉투법을 무조건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무조건 확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성급하다. 필요한 것은 원청 책임을 인정하되 그 범위를 분명히 하는 제도 설계다. 원청의 사용자성은 실제로 원청이 지배·결정하는 근로조건에 한정해야 한다. 예컨대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임금 산정 기준, 근로시간 배치, 작업 지시 방식, 휴게시간 운영 등을 사실상 정한다면 이는 원청의 책임 범위에 들어갈 수 있다. 반면 납품 기한이나 품질 기준처럼 계약의 결과를 요구하는 수준에 그치거나, 사업장 전체의 공통 안전수칙을 안내하는 정도라면 근로조건을 직접 지배·결정한 경우와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교섭 대상도 이러한 차이를 반영해 임금, 근로시간, 안전관리, 복지 등 항목별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러 하청 노조가 동시에 교섭을 요구할 때는 교섭대표제나 공동교섭 절차를 통해 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는 실질적인 협상력을 얻고, 기업도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책임을 질 수 있다.
편의점 진열대가 늘 채워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많은 계약, 물류, 노동, 투자, 신뢰가 맞물려 작동하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은 노동권 보호라는 선의를 담고 있지만, 그 선의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흔들지 않으려면 책임의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 노동자를 위한 제도라면, 권리를 넓히는 만큼 그 책임도 예측 가능하게 설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