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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를 내야 진짜 연봉이 보였다

글쓴이
이용전 2026-05-27

사표를 내야 진짜 연봉이 보였다
— 헤드헌터 10년, 시장이 알려준 것


오후 네 시, 김 과장(가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7년차 개발자, 연봉 4,200만 원. 우리를 통해 다른 회사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힌 참이었다. 그런데 사직서를 내자마자 회사가 30퍼센트 인상안을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5,500만 원.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헤드헌터 10년을 했지만, 같은 장면 앞에서 매번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 30퍼센트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습니까?"

회사가 갑자기 인심이 좋아진 게 아니다. 김 과장의 능력이 사직서를 쓰는 순간 폭발한 것도 아니다. 변한 건 단 하나, '정보'다. 회사는 그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김 과장은 자신이 시장에서 얼마짜리인지 몰랐다. 양쪽 다 자기 자리에서 안주했다. 사직서는 그 안개를 걷어낸 신호탄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이라 부른다. 거래의 양쪽이 가진 정보가 다를 때 가격은 비뚤어진다. 누군가 비대칭을 깨야 진짜 가격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실 헤드헌터라는 직업은 결국 이 안개를 걷는 일이다.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채용시장은 본질적으로 정보가 흐릿한 시장이다. 이력서에 적힌 "매출 30퍼센트 향상"이 진짜인지 부풀려진 것인지, 면접 한 번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1970년 조지 애컬로프(George Akerlof)는 이런 시장을 '레몬마켓(Lemon Market)'이라 부르며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보 비대칭이 심하면 좋은 매물은 사라지고 결국 불량품만 남는다는 것이다. 채용시장도 늘 그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런데 시장은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이듬해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는 시그널링(Signaling) 이론으로 같은 노벨상을 받았다. 학력, 자격증, 전 직장의 브랜드, 추천인 — 이 모든 것이 정보의 안개를 뚫는 신호 장치라는 것이다. 회사가 명문대 출신을 선호하는 건 학벌주의라기보다, 검증된 신호를 사는 행위에 가깝다. 이력서를 부풀리는 사람들조차 이 메커니즘을 거꾸로 증명한다. 시장이 신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신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시장은 시간을 두고 반드시 가짜를 솎아낸다. 평판 조회, 레퍼런스 체크, 수습 기간이 그 정밀한 거름망이다. 우리 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 번째 회사부터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 한두 번은 운으로 가지만, 세 번은 못 속인다.

다시 김 과장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결국 카운터오퍼(Counter Offer)를 거절하고 새 회사로 옮겼다. 이유를 묻자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답했다. "내가 떠나야만 알아준다는 게 슬펐어요."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건 회사 한 곳의 잘못만은 아니다. 신호가 없는 곳에서는 누구도 정확한 가격을 매길 수 없다. 시장은 잔인한 게 아니라, 신호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정직한 시스템이다.

가끔 누군가 묻는다. "차라리 정부가 직무별 공정 임금을 정해주면 안 되나요?" 그럴 때마다 나는 가격이 사라진 사회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떠올린다. 가격이 없으면 사회는 인재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모른다. 누가 더 노력해야 하는지, 누가 어느 분야로 옮겨야 하는지, 그 거대한 좌표를 잃는다. 김 과장이 회사 안에서 4,200만 원에 묶여 있던 시간이 바로 그 작은 축소판이었다.

새 회사로 옮긴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김 과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새 회사에서 일하니까 매일매일 제가 4,200만 원짜리가 아니었다는 걸 느껴요." 사람의 가격은 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시 발견된다. 시장은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 자리를 알려준다.

10년간 수백 장의 사직서와 카운터오퍼를 보면서 내가 배운 건 한 가지다. 시장경제란 매정한 경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내 가격을 알려주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알려주는 거울. 그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

오늘도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걸어 묻는다. "제 시장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나는 답한다. "지금이 아니라도, 시장이 곧 알려줄 겁니다." 그게 시장경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친절한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