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냉장고를 상상해 보라. 차가운 냉장고 속 당신이 좋아하는 탄산음료를 찾으면 옆엔 똑같이 생긴 제로 탄산음료가 하나 더 있다. 옆에 놓인 주류 판매대에도 신제품인 제로 소주가 몇 종류씩이나 눈에 띈다. 아예 제로로만 이루어진 음료수들도 한 손으로 다 세기 힘들 정도다. 제로 음료가 하나도 없는 냉장고를 보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냉장고는 제로 음료가 반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냉장고는 제로들에게 먹혀버렸을까?
답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시장 논리에 의해 소비자들의 수요가 변했으니, 냉장고가 바뀐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소비자들은 건강과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높아만 졌지만, 여전히 만족스럽게 먹을만한 당분은 부족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카페의 낮은 열량 음료를 고르고 골라도 우습게 여길만한 당과 열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편의점 음료도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소비자들은 언제나처럼 아메리카노나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들은 만족이 채워지지 않자 점점 불만을 가졌고 기업들은 그 틈을 찔렀다.
어쩔수 없이 기업들에겐 시장 진입이 필연적이었다. 그렇지만 손해만 보는 장사였을까? 답은 아니다. 기업들에게도 제로 시장 진입은 이득이었다. 설탕보다 수백 배 단 인공감미료는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아 제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마셔도 체중 걱정이 없는 음료를 찾는 사람들과 당뇨 같은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열광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 같은 고객들 덕분에 가격탄력성이 낮아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새로 태동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차별적인 경쟁우위까지 확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이런 시장을 놓칠 수 없었던 기업들은 자연스레 더 큰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기존 감미료에 거부감이 있었던 사람들도 꺼리지 않도록 비율을 조정하고, 기존 인기 제품을 제로 상품으로 재단장해서 출시하기도 했다. 시장 진입을 위해 투자를 늘림으로써 새로운 생산 노선을 만들었다. 이게 어느 순간부터 편의점에 자리 잡게 된 제로 상품의 시작이었다. 기업들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음료뿐만 아니라 설탕 제로의 과자나 아이스크림도 출시해 또 다른 시장을 만들었다. 괜찮은 맛에 건강걱정도 덜할수 있다니, 입소문을 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제로 식품을 사갔다. 자연스레 소셜 미디어에 물밀듯이 퍼졌다. 기존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킨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 많은 소비자 유입이 쏟아지고 큰 성과를 내는 기업들을 바라보면서 다른 기업들 사이에도 경쟁의 바람이 불었다. 수많은 기업이 시장에 진출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최근엔 제로 식혜가 출시되어 당뇨를 앓는 많은 어르신께 환영받았다. 이처럼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품도 제로 상품이 되면서 소비자는 더 큰 만족감을 얻었다. 기업 간의 치열한 경쟁이 소비자에게 더 큰 이득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흥미롭게도 제로 음료 시장의 성장은 정부의 압박이나 지원 없이 시장 내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부는 제로 음료 시장에 대한 규제나 지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이는 시장의 자율적인 조절 기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소비자의 욕구와 기업의 이익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다소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질지 모르는 지금 이 제로의 시대는 소비자들의 건강과 맛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장의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이다. 기업들의 경쟁과 혁신이 제로 음료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다.
다소 거창하게 들리는 ‘제로’라는 말은 이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개개인의 작은 불만들이 모여 수요가 되고, 수요가 기업들을 불러 모으고, 기업들은 또다시 소비자를 모았다. 자연스러운 선순환이 시장을 끊임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앞으론 어떤 제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다. 바야흐로 제로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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